포르투갈 황제
셀마 라겔뢰프 지음, 안종현 옮김 / 다반 / 202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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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에게 부모는 한때 절대적인 존재입니다. 가장 원초적인 의미에서도 그렇죠. 나약하기 짝이 없는 아기는 부모(꼭 친부모가 아니더라도 돌보아주는 어떤 존재)가 없다면 살아남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니까요.

이 절대적인 의존 관계는 한동안 지속되고, 그사이에는 부모와 자식 간에 (비교적) 평화로운 공존 상태가 이어집니다. 그러나 아이는 자라면서 점점 부모로부터 떨어져 나오려 합니다. 자신이 독립된 존재임을 주장하고, 때로는 부모에게 반항하죠. 그 독립을 향한 의지와 행동은 여러 모습을 띨 수 있고, 그에 따라 비슷하면서도 다른 수많은 이야기들이 생겨납니다. 인간이 살아온 모든 곳, 인간의 모든 역사를 통해서요. (정확한 기억인지 자신은 없는데, 에리히 프롬 같은 이는 아담과 이브의 에덴동산 추방도 인간이 인간으로 존재하기 위해서는 불가피했던, 일종의 사춘기적 독립 같은 사건으로 보았던 것 같습니다.)

부모에 대한 아이의 마음이 그러할 때, 아이에 대한 부모의 마음은 어떨까요? 어떤 반응과 어떤 행동을 하게 될까요? 그 역시 한 가지 모습은 아닐 텐데, 셀마 라겔뢰프의 포르투갈 황제는 그중에서도 아주 특별한 이야기 하나를 우리에게 전해 줍니다.

농장에서 머슴살이를 하는 얀 안델손은 그다지 원하지도 않았던 자식을 보게 됩니다. 아니, 아이가 생긴다니까 걱정이 태산입니다. 형편도 넉넉지 않은 데다 이제는 고된 일을 마치고 집에 들어와도 제대로 쉬기는 틀렸다고요. 하지만 갓 태어난 딸아이를 두 손에 받아 든 순간, 그의 인생은 영원히 바뀌고 맙니다. 이제 이 아이 없는 삶은 생각할 수조차 없게 되죠. 너무도 소중한 아이에게 아름다운 황금빛 태양이라는 뜻이 담긴 이름도 붙여 주고요. 아이도 영특하게 무럭무럭 자라나고 세상 누구보다 아버지를 사랑합니다.

딸아이 클라라가 열일곱 살이 되던 해 큰 시련이 찾아옵니다. 인자한 농장주가 세상을 떠나고 사위가 농장을 물려받는데, 이 인간이 문제입니다. 전 농장주가 무상으로 땅을 빌려주며 오두막을 짓고 살게 해주었는데, 이제 와서 그 값을 내라는 것입니다. 기가 막혀 어쩔 줄 모르는 얀과 그의 아내에게 클라라가 스톡홀롬에 가서 돈을 벌어 오겠다고 말합니다. 달리 방도가 없던 부부는 그러라고 하고요. 하지만 도시로 간 이 어린 소녀에게 좋지 않은 일이 벌어지고, 소식마저 끊어집니다. 그 사실을 견디지 못하는 얀은 상상 속의 세상에서 살게 됩니다. 딸아이가 포르투갈의 여황으로 등극했고 따라서 아버지인 자신은 포르투갈 황제라고요.

이제 그는 다른 사람들 눈에는 제정신이 아닌 사람으로 보입니다. 황제의 위엄을 잃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쓰지만 그럴수록 남들에게는 우스워 보일 뿐이지요. 하지만 그는 여전히 친절하고 남을 도우려 애쓰는 사람입니다. 위엄 있게 보이려는 것도 오로지 딸의 권위를 실추시키지 않기 위해서일 뿐입니다. 게다가 제정신이 아니라고는 하지만 오히려 남들이 보지 못하는 것을 보고, 하지 못하는 일을 하지요. 진실에 가까운 어떤 것들을요. 그런 점에서 그는 서양 전통문화에 나오는 성스러운 바보와도 비슷합니다. 톨스토이의 우화들에 나오는 바보 이반 같은 사람, 어딘가 모자라기 때문에 오히려 신의 신비를 드러내는 사람 말이죠. 실제로 그는 몇 가지 신비로운 능력을 발휘하기도 합니다.

앞에서 부모에게 절대적으로 의존하는 아이들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런데 이 소설에서는 아버지 얀이 딸에게 절대적으로 의존합니다. 처음에는 무지렁이 부모가 교육받은 자식에게 의지하는 것 정도로 보이던 그 의존성은 갈수록 깊어집니다. 실질적인 의존이라기보다는 정신적인 의존, 거의 신에 대한 의존 같은 것이 되어 가죠. 결국 딸에 대한 그의 마음은 거의 종교적인 것에 가까워집니다. 그가 상상/망상 속에 빠진 것은 딸에게 일어난 어떤 사건 때문이 아니라 딸의 부재 자체 때문인 것으로 보입니다. 딸의 부재 자체를 견딜 수가 없었던 거죠. 신의 부재를 견딜 수 없듯이.

그러면 딸은 어떤 마음일까요? 소설은 클라라가 명목상으로는 집이 넘어가지 않도록 돈을 벌기 위해 도시로 떠나지만, 실은 그곳을 벗어나고 싶어 했음을 암시합니다. 그런 딸의 마음을 얀이 알아차리는 장면도 나오고요. 독립을 갈망하는 사춘기 소녀였으니까요. (앞에서 말한 에리히 프롬의 이야기와 연결해 보면, 클라라가 어린 시절 잔칫집 사과나무에서 사과를 몰래 따다 잡히는 장면은 어떤 상징일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클라라는 부모를, 특히 아버지를 사랑하지만 그 굴레에서 벗어나고 싶은 마음이 더 컸던 게 아닐까요? 그래서 그토록 오랫동안 돌아오지 않았던 것이 아닐까요?

소설을 다 읽고 나서 마음이 아려 왔습니다. 눈물로 조금 흘렸던 것 같습니다. 딸을 향한 아버지 얀의 한없는 사랑 때문에요. 그런데 문득 이 책의 숨은, 또는 진정한 주인공은 소설 내내 자취를 감췄던 딸 클라라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 소설이 정말로 말하고 싶은 것은 아버지의 사랑이라기보다 그런 사랑을 저버리고 떠난 자식의 죄책감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요. 그것은 작가 자신의 죄책감이 아닐까 싶기도 합니다. 소설의 배경이 1860년대 스웨덴의 어느 마을로 되어 있는데, 그것은 1858년 생인 작가 자신의 유년 시절이 배경이라는 뜻인 것 같고, 작가 자신의 모습이 얼마간 투영되어 있다는 의미 같기도 하거든요.

셀마 라게뢰프는 닐스의 이상한 여행을 쓴 작가이자 아동문학으로는 유일하게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작가입니다. 어린 시절 이 작품을 책으로도, 매주 일요일 아침마다 텔레비전에서 방영해 준 만화영화로도 너무나 재미있게 보았습니다. 정말 좋아한 작품이었어요. 하지만 작가에 대해서는 아는 것이 거의 전혀 없었지요. 어릴 때는 물론이고 지금까지도요. 우연히 접한 포르투갈 황제는 이 작가를 다시 보게 해주었습니다. 소설 자체도 우연히 발견한 보석 같은 느낌이었고요. 그리고 무엇보다 부모님과의 관계, 그리고 아이들과의 관계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보게 해주었습니다. 이 보편적인 문제를 또 다른 시각에서요. 아직 누군가의 자식일 뿐인 사람부터 자식이자 부모인 사람들까지, 누가 읽어도 저마다 마음에 와닿는 것이 있을 것 같습니다아이에서 아이들 아버지가 된 지금, 거의 50년 가까운 세월을 건너 잊고 있던 친구를 새로이 다시 만난 기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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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종현 2025-12-10 16:46   좋아요 1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안녕하세요. 포르투갈 황제를 번역한 안종현이라고 합니다. 우연히 알라딘에 리뷰를 보고 글을 남깁니다. 지끔까지 본 리뷰 중에 가장 깊이 작품을 보신 것 같아 그냥 지나칠 수가 없네요. 특히 클라라 관점(페미니즘, 독립)에서 보면 또다른 이야기가 되는 작품이라서요. 전 개인적으로 클라라가 죄를 짓고 용서를 받는 과정을 통해 완전한 독립을 이루었다고 생각합니다. 기독교적 관점에서 원죄와 속죄, 그리고 용서의 과정이 그대로 그려지기 때문입니다. 좋은 글 정말 감사합니다. 괜찮으시면 제 브런치에 글을 좀 소개해도 될까요?

bongsun 2025-12-10 17:5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앗, 번역자 님께서 직접 글을 읽으시고 댓글 남겨 주시다니요. 브런치에 소개해 주신다면 제가 영광이지요. 보석 같은 작품 읽을 수 있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안종현 2025-12-10 18:01   좋아요 1 | 수정 | 삭제 | URL
흔쾌히 허락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글을 정말 정갈하게 잘 쓰시네요. 그럼 좋은 하루 보내시길 바랍니다. ^^

bongsun 2025-12-10 18:0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감사합니다. 선생님께서도 좋은 하루 되시고, 좋은 일 가득한 연말 맞으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