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위로하는 그림을 제 나름대로 정리해 봤습니다. 못오신 분들게 스팸을 함 날려봅니다. ㅋㅋ

나를 위로하는 그림/ 우지현/ 책이 있는 풍경/ 20150427

내가 고른 책속의 한 줄과 감상

(4) 프롤로그
세상은 눈물을 모이게 했고 그림은 눈물을 떨어지게 했다.세상으로부터 도
피하고 싶을 때마다 그림을 보며 그 시간을 버텼다.

; 어깨가 축 늘어질 때가 있습니다. 삶의 무게에 짓눌려 무기력해질대로 무기력해져 있을 때 무언가 나를 위로해 주는 것이 있다면 무엇일까? 문든 생각해 보게 합니다. 저는 저를 누구보다 더 잘 아는 내 속의 자아인 내가 "괜찮아! 그럴 수도 있는 것이지! 뭐!"하거나 "기운내!" 한 마디일 수 있겠지만 이 글의 저자는 그 대상이 그림이라고 합니다. 자신만의 방식으로 자신을 다독이는 것 같습니다. 하나의 작품으로 그림이 우리의 눈에 보여질 때 그 것은 그저 평면적으로 보이는 그 화면이 전부가 아닌 것 같습니다. 화가가 그 그림을 그리기 위해 짧게는 몇 시간에서 몇 년이란 시간을 주의깊게 관찰하고 구도를 잡고, 붓을 잡고 그 현상을 대상화하기 위해 어떤 경우 인고의 시간을 감내하고 자신의 모든 것을 마지막 한 방울까지의 물감을 짜 내려 튜브를 이리저리 쥐어 짜듯한 과정을 거쳐 결국 토해내는 마지막 숨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레 그 모든 것이 용융되고 작품으로 승화되어 명화의 경우처럼 몇 백년에서 수천년에 이르기까지 후대에게 전해져 우리가 이를 감상하고 평가하기에 이르게 되는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그러다 보니 수많은 이야기가 담겨져 있는 그림 하나로 인해 작가가 말하는 위로와 격려, 새로운 힘을 얻게되고 가슴이 따뜻해지며 공감할 수 있는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이 책은 크게 4가지의 주제로 구분을 지어 놓았습니다.

1. 일상 - 그림처럼 머물고 싶은 날

ㅇ 미술관 느리게 걷기

(68) “진정 위대한 모든 생각은 걷기로부터 나온다,”는 니체의 말처럼, 걷는 일은 사유의 명상, 자유와 기쁨, 위로와 용기의 원천이 된다. 걷기는 생각을 정리할 수 있는 기회이자 마음을 점검할 수 있는 시간이며 가장 빠르고 단순하게 삶의 의미를 깨닫게 해주는 소중한자산이다.

; 저는 하루 2만보를 걸으려 합니다. 단지 만보걷기를 사람들이 이야기들 하지만 욕심을 내어 무리하게 목표를 늘려잡았습니다. 이유는 간단합니다. 저탄소 녹색성장? ㅋㅋ 아닙니다. 자원의 유한화에 대한 경각심을 저도 실감합니다. 2018년 2월 중순 현재의 겨울 기온은 확실히 이상기온입니다. 들리는 소식에는 시리리아 북품이 제트기류라는 눈에 보이지 않는 공기층에 의해 남하하지 못하도록 갇혀있어야 하는데 그러질 못해 세계 곳곳에서 이상 기온 현상으로 심각한 자연재해를 경험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도 예외가 결코 아니어서 예전 삼한사온(삼일은 춥고, 사일은 따스한 전형적 한국의 겨울 날씨)는 이제 그 레코드를 다시 써야만 할 것 같습니다. 출근길 심하게 부는 바람이 아님에도 얼굴이 찬 바람에 뜯겨져 나가기 직전의 고통을 느끼게 하고, 가장 여린 노출부위인 귓바퀴는 누군가 자글자글 씹고 있는 듯한 고통에 결국 제가 제일 싫어하는 패션 중 하나인 마스크 형태로 넥 워머를 뒤집어 쓰고야 말았습니다.

한 때 자신을 자유케 한다는 명목으로 런너스 하이를 경험하기 위해 미친듯이 마라톤에 몰입했던 적도 있었고, 재정적인 이유도 있었지만 지금의 2014년식 차량을 구입하기 이전 35세의 3남매를 키우는 가장으로 생애 첫 차를 사기 전까지 최대한 미루어 차를 구입하기 전에도 걷는 것을 좋아라 했습니다. 마라톤이나 장거리 뜀박질을 해 보신 경험이 있으신 분은 이해하시겠지만 처음에는 아무생각없이 나름 열심히 뜁니다. 그러다 숨이 차오르기 시작하는 1킬로 정도도 채 못되어 '내가 왜 이 짓을 하고 있는거지?'라는 후회가 몰려와 숨이 더 가빠지기도 하지만 어느시점이 되면 - 실제 마라톤 풀 코스의 경우 30킬로 전 후 지점 - 아무 생각이 없어지고 내 속의 자아와 단 둘이 그 자리에 무언가를 움직이고 있는 육체의 자아를 발견하게 됩니다. 유체 이탈까지는 아닌 것 같습니다 ^^

그 때는 온전히 자신과의 독대만 이루어집니다.

2, 관계 - 너와 나, 그리고 우리
ㅇ 아버지의 길

(128) 아이는 자라며 좌절을 겪는다.좌절하고 또 좌절하며 성장한다.이 때 아이에게 필요한 것은 오직 하나, 아버지의 믿음이다. 따뜻한 눈으로 마음 깊이 믿어주는 아버지만 있으면 아이는 씩씩하게 좌절을 이겨내고 어른이 된다. 나를 성장시킨 것은 아버지의 믿음이었다. 한 사람의 성장은 믿어주고 바라봐주는 아버지의 사랑에서 비롯된다. 그것이 아버지가 평생에 걸쳐 내게 알려준 가르침이었다.

; 양산을 쓰고 앞에 서 가는 여인과 멀찌감치 뒤에서 뒷 짐 지고 걸어가는 중년의 풍채의 남자! 작업복 입은 사내로 그림 이름이 지어져 있지만 왠지 저자가 아버지의 길이라고 명명한 것처럼 딸 주시하며 뒤 따르는 아버지의 모습이 연상되는 것에 공감합니다. 단지 관음증 남자가 아니라 말입니다.

이제는 대화할 수 없는 분이지만 제겐 아버지가 작가가 표현한 그대로의 인격체이셨던 것 같습니다. 나의 피할 피난처요, 산성, 요새, 언덕, 그늘...

어느 순간 이미 웃자란 저는 저희 삼남매에게 이러한 모습으로 자리하고 있는지 항상 자문합니다. 그런데 제 대답은 언제나 글쎄요 입니다. 왜냐하면 저와 35년 차 나시는 아버지와 제가 저희 집 큰 친구와 28년차 나는데 묵묵하셨던 그 분과는 달리 저는 아이들이 닭 주둥이로 병아리를 쪼아대듯 다구치는 스타일이랍니다. 그래서 모든 대화가 그 친구들에게는 잔소리 여겨지는 부정적 측면이 강하다 보니 그 분이 자연스레 더욱 존경스러워지는 것 같습니다. 저도 그렇지만 그 분도 저처럼 우리 친구들이 잘 되기를 바라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3. 여행 - 나를 찾으려 길 위에 서다

(176) 문득 영화(르누아르)의 한 장면이 떠오른다. 관절염으로 극심한 고통을 안고 살아가던 어느 날,다리는 물론 손가락도 쓰지 못하게 되자 르누아르는 손에 붓을 묶고 그림을 그린다. 이미 모든 것 그렸으니 이제 그만두어야 한다는 아들의 걱정스런 만류에 그는 이렇게 답한다.

“고통은 지나가지만 아름다움은 남지. 아직 할 일이 남았어.힘이 다할 때까지 그릴 거야”

; 사랑하라 기뻐하라. 삶은 아름답고 행복한 것이다 (르느와르)

영화를 보지 못했지만 이 글을 통해 전달되어져 오는 떨림과 장렬하기까지 한 이 멘트는 단지 우리가 보기에 즐거운 이면의 다른 모습을 훔쳐 본 듯하여 가슴이 콩닥콩닥 뜁니다. 우리는 장인정신이라는 단어로 이를 표현할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우리나라에선 이조시대 이전부터 사용되어 왔던 단어이나 매우 낮고 저급하고 '쟁이' 등 천박한 대상을 지칭하는 대명사로 어감이 남아있는 것을 보니 저도 연식이 좀 된 것 같습니다. 그림 그리시던 분들을 '환쟁이'라고 불렀던 것을 보면 미루어 짐작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독일 같은 선진국에서는 마이에스트로라는 이름으로 불리워졌었죠? 우리의 시각도 조금의 변화가 있는 것 같습니다. 이전의 실업계고 (공고, 상고등)의 이름을 마이에스터교라고 바꾼 것만 해도 그렇다고 볼 수 있을 것 같은데요. 인정하십니까?

4. 삶 - 그래도 삶은 계속 된다

ㅇ 죽음을 향한 끊임없는 전진

(272) 구스타프 클림프 (죽음과 삶) 1910
클림트는 그림의 제목에 ‘삶과 죽음'이 아닌 ‘죽음과 삶’이라고 이름 붙였다. 삶 뒤에 죽음이 온다는 생의 결과론적 접근보다는 죽음이 있기에 삶이 있고 삶이 있기에 죽음도 온다는 생의 순환을 강조한 것이다.

; 닭이 먼저인가? 닭알이 먼저인가?

저자의 말처럼 삶 뒤에 죽음이 온다는 생의 결론적인 접근보다는 죽음이 있기에 삶이 있고, 삶이 있기에 죽음도 온다는 생의 순환을 강조한 것이라는 설명이 이 분은 죽음을 달관한 철학자가 아닌가 싶은 정도로 수려한 문체로 사람들, 독자를 홀리는 듯 합니다. 해골과 십자가, 죽음 앞에서 남여노소 인종도 별무소용이 없습니다. 구글에서 AI 이후 죽음(Death)를 연구하고 있다고 어느 분이 당신의 포스팅에서 말씀하신 것을 들은 기억이 납니다. 모든 인간의 마지막 질문이 이것이 아닐까요? 우리모두가 자유롭지 못하기에 더 매달리고 안간힘을 쓰지만 결국 아직까지의 의술과 과학의 발달로도 풀어지지 않는 미지의 방정식! 그래서 아마 그런 대기업에서 빅 데이터를 기반으로 이를 해결하기 위해 덤벼들만한 충분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니 고개가 절로 끄덕여 집니다.

일상의 모습부터 이해되지 않지만 희망이라는 그림까지 그림보다는 저자의 해설이, 꿈보다는 해몽이 더 나를 깊이 생각하게 하는 책이었던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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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일조가 알고 싶다 - 다시 배우는 십일조, 축복의 통로인가 다른 복음인가 알고 싶다
윤상원 지음 / 넥서스CROSS / 2017년 10월
평점 :
품절


[서평을 핑계삼은 내 신앙고백]
“십일조가 알고 싶다”
윤상원 지음/ 넥서스CROSS/ B/ 2017.10.20/ ISBN 979-11-6165-130-9_03230

신앙생활/ 종교생활 48년차 아직은 부족하기 이를 데 없는 사람이 호기로 이벤트에 선정되어 이 민감한 주제의 책에 대한 어설픈 서평을 작성합니다. 바라기는 저자에게 누가 되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이 개인적으로 있습니다. 참고로 저는 서평이라는 전제는 있지만 제 신앙에 빗대어 내 삶에서 십일조와 헌금이라는 민낯을 이글을 통해 공개하고 공유하고자 합니다.

모태신앙으로 대한예수교장로회 통합측 교단 - 이것도 제대로 분간할 수 없으며, 그냥 교단마크와 형식적인 행사에 간혹 사용되어 사람들의 입에 회자되다 본인의 귀에 들리는 것이 전부였으며, 지금도 굳이 구분하여 정의하고 싶지는 않은 표현입니다 - 에서 신앙생활을 시작해 왔으며, 신앙의 4대를 이루고 있습니다. 직업상 대구로 이사 오면서 출석하는 교회가 대한예수교장로회 합동 교단에 소속된 교회이며 제 생애 5번째 교회입니다.

한동안 귓등으로도 듣지 않던 헌금에 대한 설교나 말씀은 그저 주일 아침 텔레비전의 정말 유일하게 재미있는 만화영화를 뒤로하고 불편한 마음으로 어릴 적에 걸어서 4~50분 거리의 탄광촌 강원도 정선의 함백중앙장로 교회가 제 생애 첫 교회며, 모친의 한복장에서 조심스레 꺼내어 우리 3형제에게 건네주시며, 딴 짓하지 말고 연보주머니에 꼭 집어넣어야 한다는 명령한 함께 빳빳한 거금 천원 지폐가 유일한 기억입니다.

광부에게 시집 오셔서 여러 종교를 거듭하다 느지막하게 자리 잡고 귀의하신 시어머님 - 제게는 조모님이 되시며, 우리 가문(?)의 신앙의 조상이 되십니다 - 에 의해 자연스럽게 교회를 출입하셨습니다. 당신의 지아비와 우리 삼형제가 신앙에서 떠나 방황하지 말고 신앙생활 제대로 하기를 간절히 바라며 기도의 무릎을 꿇으셨습니다. 그렇지만 아직 밑의 두 동생은 돌아오지 않고 있으며, 그래도 당신의 기도 중 하나였던 부친의 신앙의 회복은 이루시고 부르심을 받으셨습니다. 뒤이어 부친께서도 홀로 신앙생활 잘 해오시다 2017년 4월 부르심에 응하셨습니다.

모친의 헌금에 대한 가르침과 교회를 들락거리며 전해 듣던 말씀에 간간히 들려오던 십일조와 전도에 대한 협박성 말씀에 마음이 부담스러웠습니다. 지금까지 27년여 한 직장에서 생활하며, 항상 빠듯하다는 생각에 감히 엄두도 내지 못하고 있습니다. 명목상 십일조인 생활 십일조로 얼마를 떼어 십일조 봉투에 담아 이름을 적어야 하나 고민했습니다. 그러나 교회에서 선포되는 설교 중에 하늘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다 아시지만 그래도 이름을 구체적으로 적어야 복을 구체적으로 받을 수 있다던가 하는 말에 창피하지만 얼굴 두껍게 들이밀었던 적도 있었습니다.

슬하에 3남매를 두고 이젠 어느 정도 성장하여 사회로 나갈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그들이 어렸을 때 한 가지 드는 고민 중의 하나가 과연 이 자녀들을 신앙적으로 어떻게 양육해야 하는가가 항상 걱정꺼리였었습니다. 금요 성령 축제라 명명된 금요 기도회에 나가선 항상 앉던 앞자리에 앉아 3남매의 머리에 손을 대고 고래고래 소리 질러가며, 이들을 주의 손에 온전히 의탁하기 원합니다. 만나주시고, 만져 주시고, 만들어 주옵소서! 기복적 기도를 목청이 터져라 기도도 했었습니다.

주일학교에 가는 자녀들에게 월급날이면 은행 직원이 알아서 '아~아! 또 신권 바꾸러 오셨군요?' 할 정도로 모친의 영향을 받아 드릴 것은 없지만 그래도 드리는 것은 나름 정성을 다해 드리자며 신권에 아이들 주일 헌금도, 명목헌금도 봉투에 넣어 이름을 적어 봉헌하였으며, 한동안 연봉의 많게는 2~30%까지 헌금이 차지할 정도였으며, 연말정산시 연 헌금액이 0만원까지 될 정도였었습니다.

오죽했으면 2007년 미국으로 직장에서 주어진 교육의 기회를 가족과 함께 다녀오기 위해 부족한 자금을 은행으로부터 대출을 받았을 때도 십일조를 해야 하나? 고민할 정도였었습니다. 얼마 되지 않는 적금을 들어 만기 수령할 때에도 십일조를 어떻게 해야 하나님 보다 우선 내 마음이 편할까 고민하고 내 잣대에 맞춰 정확한 잣대와 헐렁한 내 잣대를 이분법적으로 적용하며, 가슴 떨려하던 기억도 갑자기 스쳐지나갑니다.

그런데 이 책을 읽고 나서 그에 대한 부담이 확실히 경감했음을 말씀드립니다. 록펠러는 자신의 부의 십일조를 계산하기 위해 별도의 인원을 꾸려 십일조만 계산하게 하였다는 황당한 말을 듣기도 하고 동경도 하고 마음 불편함도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구약의 율법과 십일조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온전히 성취되었다는 것과 신약의 교회는 더 자유로운 십일조를 드릴 수 있는 자유가 있다고 우리에게 빛을 던져준다는 서평 전문가인 방영민 목사의 말이 이 책의 핵심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아울러 최근에 제가 출석하는 교회가 아닌 다른 교회에서 들은 말씀 중 기억나는 한 구절이 이 책의 십일조의 공공성, 즉 헌금의 공공성이 아닐까 싶은데 내용은 이렇습니다. 교회 재정 중 과연 얼마만큼이 복음을 위해 사용되어지고 있는가가 그 교회가 건전한 재정을 가진 교회인지 여부를 가늠하는 척도라고 하는 말씀입니다 교회의 사사화(사유화)를 우려하시는 목소리라 이 책이 더 많은 이들에게 건네져 읽혀져 헌금사용의 문제점에 대한 성도들의 깨어있는 의식이 있어야 할 것 입니다. 물론 종교세 과세와 이에 따른 볼썽사나운 행태는 정말 내가 이러려고 기독교인이 되었던가 하는 자괴감마저 어쭙잖게 가지게 합니다.

저는 이 책을 읽으면서 목사님 개인적 인간적 면모와 저와 같은 무지한 성도들의 잘못된 신앙관과 말씀에 대한 자의적 해석으로 인해 고통 받는 자들의 아픔, 그리고 능력이 없는 자는 오히려 십일조로부터 - 레위인을 제외하고 - 받았었다는 새로운 사실을 하나 더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중간 중간 세 가지 설, 두 가지 설 등과 같은 기존이 개념에 대해 첫째, 둘째, 셋째 하시며 또박또박 반박하시는 듯한 문체가 읽기에 좀 불편하였지만 그만큼 아직도 불편한 구석이 여기저기 산재해 있음을 기억할 때 목사님의 이 귀중한 중간정리가 제대로 그 역할을 감당하여 더 이상 존폐 논쟁에만 멈추는 것이 아닌 명확한 정의가 자연스럽게 정립되어갔으면 하는 바람이 있습니다.

2016년 말부터 진행 중인 국가적 사건을 접하며, 국민뿐만 아니라 성도도 깨어있어야 함에 대한 막중한 책임감마저 듭니다. 종교개혁 500주년이라고 떠들어 기 이전에 왜 종교개혁이 일어났으며, 루터와 그 친구들은 무엇을 했으며, 독일은, 스위스는 무엇을 했으며, 장로교는 무엇이며, 우리의 신앙고백은 어떻게 계승되어야 하는지, 그리고 우리의 헌금생활은 어떻게 정착시켜야 하는지, 행해야 하는지 뒤늦게나마 문제의식을 가지게 되었음에 감사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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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을 핑계삼은 내 신앙고백]
“십일조가 알고 싶다”
윤상원 지음/ 넥서스CROSS/ B/ 2017.10.20/ ISBN 979-11-6165-130-9_03230

신앙생활/ 종교생활 48년차 아직은 부족하기 이를 데 없는 사람이 호기로 이벤트에 선정되어 이 민감한 주제의 책에 대한 어설픈 서평을 작성합니다. 바라기는 저자에게 누가 되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이 개인적으로 있습니다. 참고로 저는 서평이라는 전제는 있지만 제 신앙에 빗대어 내 삶에서 십일조와 헌금이라는 민낯을 이글을 통해 공개하고 공유하고자 합니다.

모태신앙으로 대한예수교장로회 통합측 교단 - 이것도 제대로 분간할 수 없으며, 그냥 교단마크와 형식적인 행사에 간혹 사용되어 사람들의 입에 회자되다 본인의 귀에 들리는 것이 전부였으며, 지금도 굳이 구분하여 정의하고 싶지는 않은 표현입니다 - 에서 신앙생활을 시작해 왔으며, 신앙의 4대를 이루고 있습니다. 직업상 대구로 이사 오면서 출석하는 교회가 대한예수교장로회 합동 교단에 소속된 교회이며 제 생애 5번째 교회입니다.

한동안 귓등으로도 듣지 않던 헌금에 대한 설교나 말씀은 그저 주일 아침 텔레비전의 정말 유일하게 재미있는 만화영화를 뒤로하고 불편한 마음으로 어릴 적에 걸어서 4~50분 거리의 탄광촌 강원도 정선의 함백중앙장로 교회가 제 생애 첫 교회며, 모친의 한복장에서 조심스레 꺼내어 우리 3형제에게 건네주시며, 딴 짓하지 말고 연보주머니에 꼭 집어넣어야 한다는 명령한 함께 빳빳한 거금 천원 지폐가 유일한 기억입니다.

광부에게 시집 오셔서 여러 종교를 거듭하다 느지막하게 자리 잡고 귀의하신 시어머님 - 제게는 조모님이 되시며, 우리 가문(?)의 신앙의 조상이 되십니다 - 에 의해 자연스럽게 교회를 출입하셨습니다. 당신의 지아비와 우리 삼형제가 신앙에서 떠나 방황하지 말고 신앙생활 제대로 하기를 간절히 바라며 기도의 무릎을 꿇으셨습니다. 그렇지만 아직 밑의 두 동생은 돌아오지 않고 있으며, 그래도 당신의 기도 중 하나였던 부친의 신앙의 회복은 이루시고 부르심을 받으셨습니다. 뒤이어 부친께서도 홀로 신앙생활 잘 해오시다 2017년 4월 부르심에 응하셨습니다.

모친의 헌금에 대한 가르침과 교회를 들락거리며 전해 듣던 말씀에 간간히 들려오던 십일조와 전도에 대한 협박성 말씀에 마음이 부담스러웠습니다. 지금까지 27년여 한 직장에서 생활하며, 항상 빠듯하다는 생각에 감히 엄두도 내지 못하고 있습니다. 명목상 십일조인 생활 십일조로 얼마를 떼어 십일조 봉투에 담아 이름을 적어야 하나 고민했습니다. 그러나 교회에서 선포되는 설교 중에 하늘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다 아시지만 그래도 이름을 구체적으로 적어야 복을 구체적으로 받을 수 있다던가 하는 말에 창피하지만 얼굴 두껍게 들이밀었던 적도 있었습니다.

슬하에 3남매를 두고 이젠 어느 정도 성장하여 사회로 나갈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그들이 어렸을 때 한 가지 드는 고민 중의 하나가 과연 이 자녀들을 신앙적으로 어떻게 양육해야 하는가가 항상 걱정꺼리였었습니다. 금요 성령 축제라 명명된 금요 기도회에 나가선 항상 앉던 앞자리에 앉아 3남매의 머리에 손을 대고 고래고래 소리 질러가며, 이들을 주의 손에 온전히 의탁하기 원합니다. 만나주시고, 만져 주시고, 만들어 주옵소서! 기복적 기도를 목청이 터져라 기도도 했었습니다.

주일학교에 가는 자녀들에게 월급날이면 은행 직원이 알아서 '아~아! 또 신권 바꾸러 오셨군요?' 할 정도로 모친의 영향을 받아 드릴 것은 없지만 그래도 드리는 것은 나름 정성을 다해 드리자며 신권에 아이들 주일 헌금도, 명목헌금도 봉투에 넣어 이름을 적어 봉헌하였으며, 한동안 연봉의 많게는 2~30%까지 헌금이 차지할 정도였으며, 연말정산시 연 헌금액이 0만원까지 될 정도였었습니다.

오죽했으면 2007년 미국으로 직장에서 주어진 교육의 기회를 가족과 함께 다녀오기 위해 부족한 자금을 은행으로부터 대출을 받았을 때도 십일조를 해야 하나? 고민할 정도였었습니다. 얼마 되지 않는 적금을 들어 만기 수령할 때에도 십일조를 어떻게 해야 하나님 보다 우선 내 마음이 편할까 고민하고 내 잣대에 맞춰 정확한 잣대와 헐렁한 내 잣대를 이분법적으로 적용하며, 가슴 떨려하던 기억도 갑자기 스쳐지나갑니다.

그런데 이 책을 읽고 나서 그에 대한 부담이 확실히 경감했음을 말씀드립니다. 록펠러는 자신의 부의 십일조를 계산하기 위해 별도의 인원을 꾸려 십일조만 계산하게 하였다는 황당한 말을 듣기도 하고 동경도 하고 마음 불편함도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구약의 율법과 십일조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온전히 성취되었다는 것과 신약의 교회는 더 자유로운 십일조를 드릴 수 있는 자유가 있다고 우리에게 빛을 던져준다는 서평 전문가인 방영민 목사의 말이 이 책의 핵심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아울러 최근에 제가 출석하는 교회가 아닌 다른 교회에서 들은 말씀 중 기억나는 한 구절이 이 책의 십일조의 공공성, 즉 헌금의 공공성이 아닐까 싶은데 내용은 이렇습니다. 교회 재정 중 과연 얼마만큼이 복음을 위해 사용되어지고 있는가가 그 교회가 건전한 재정을 가진 교회인지 여부를 가늠하는 척도라고 하는 말씀입니다 교회의 사사화(사유화)를 우려하시는 목소리라 이 책이 더 많은 이들에게 건네져 읽혀져 헌금사용의 문제점에 대한 성도들의 깨어있는 의식이 있어야 할 것 입니다. 물론 종교세 과세와 이에 따른 볼썽사나운 행태는 정말 내가 이러려고 기독교인이 되었던가 하는 자괴감마저 어쭙잖게 가지게 합니다.

저는 이 책을 읽으면서 목사님 개인적 인간적 면모와 저와 같은 무지한 성도들의 잘못된 신앙관과 말씀에 대한 자의적 해석으로 인해 고통 받는 자들의 아픔, 그리고 능력이 없는 자는 오히려 십일조로부터 - 레위인을 제외하고 - 받았었다는 새로운 사실을 하나 더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중간 중간 세 가지 설, 두 가지 설 등과 같은 기존이 개념에 대해 첫째, 둘째, 셋째 하시며 또박또박 반박하시는 듯한 문체가 읽기에 좀 불편하였지만 그만큼 아직도 불편한 구석이 여기저기 산재해 있음을 기억할 때 목사님의 이 귀중한 중간정리가 제대로 그 역할을 감당하여 더 이상 존폐 논쟁에만 멈추는 것이 아닌 명확한 정의가 자연스럽게 정립되어갔으면 하는 바람이 있습니다.

2016년 말부터 진행 중인 국가적 사건을 접하며, 국민뿐만 아니라 성도도 깨어있어야 함에 대한 막중한 책임감마저 듭니다. 종교개혁 500주년이라고 떠들어 기 이전에 왜 종교개혁이 일어났으며, 루터와 그 친구들은 무엇을 했으며, 독일은, 스위스는 무엇을 했으며, 장로교는 무엇이며, 우리의 신앙고백은 어떻게 계승되어야 하는지, 그리고 우리의 헌금생활은 어떻게 정착시켜야 하는지, 행해야 하는지 뒤늦게나마 문제의식을 가지게 되었음에 감사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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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장 김창수
김탁환.이원태 지음 / 돌베개 / 201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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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몰랐던 이름 대장 김창수!
그러나 한국인이 가장 잘 아는 독립 운동가 중의 한 사람 백범 김구!
우린 이제 그를 영화로 다시 만난다!
그리고 다시 한 번 역사를 자라보는 시각을 갖는 시간이 되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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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창섭 지음 / 북촌 / 201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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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자원봉사센터 센터장이시며, 대구에 의미경영 콘서트를 위해 7년여 고민 끝에 출범시키셨던 오창섭 센터장님의 책이 나왔습니다.

당신이 항상 평소에 해오셨던 것 처럼 자신만이 아닌 타인을 먼저 생각하고, 누군가에 큰 힘을 주고 새롭게 무엇인가를 할 수 있는 용기를 불어넣어 주어 응원하는 책을 자료 준비와 인터뷰 등 5년여 시간을 들이신 끝에 출간하시게 되었습니다.

3포, 7포가 아닌, N포 시대라는 자조섞인 신조어가 탄생하는 어이없는 상황을 맞딱트린 청년세대부터, 최고의 자리, 정말 열심히 일할 수 있는 시대에 자의, 타의로 세상으로 내몰린 중년에 이르기까지, 우리의 인생에 항상 성공가도만 놓여진 것이 아닙니다.

혼자서 이 모든 것을 감당하고 극복해 나갈 수도 있겠지만 인간은 사회적 동물로 혼자 살아가고 이겨낼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옆에서 지켜봐주고 안타까와하며, 격려해주고, 힘을 불어넣어 주고 응원해 주며 손 내밀어 잡아주는 이들이 있었습니다.

이 책은 그러한 11명의 멘토들이 자신의 위기와 난관을 어떻게 누구의 도움으로 다시금 일어설 수 있고, 자신의 미래를 개척하며, 또 누군가를 도와주고 이끌어 줄 수 있는 위치로까지 올라설 수 있었는지를 우리에게 이야기 해 줍니다.

이 책을 이 시대 모든 연령대 분들에게 감히 추천합니다. 그리고 새힘을 얻으시고 용기 내시며, 주위의 힘들어 하는 내 이웃에게 전하여 힘을 북돋우어주며 응원해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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