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평을 핑계삼은 내 신앙고백]
“십일조가 알고 싶다”
윤상원 지음/ 넥서스CROSS/ B/ 2017.10.20/ ISBN 979-11-6165-130-9_03230
신앙생활/ 종교생활 48년차 아직은 부족하기 이를 데 없는 사람이 호기로 이벤트에 선정되어 이 민감한 주제의 책에 대한 어설픈 서평을 작성합니다. 바라기는 저자에게 누가 되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이 개인적으로 있습니다. 참고로 저는 서평이라는 전제는 있지만 제 신앙에 빗대어 내 삶에서 십일조와 헌금이라는 민낯을 이글을 통해 공개하고 공유하고자 합니다.
모태신앙으로 대한예수교장로회 통합측 교단 - 이것도 제대로 분간할 수 없으며, 그냥 교단마크와 형식적인 행사에 간혹 사용되어 사람들의 입에 회자되다 본인의 귀에 들리는 것이 전부였으며, 지금도 굳이 구분하여 정의하고 싶지는 않은 표현입니다 - 에서 신앙생활을 시작해 왔으며, 신앙의 4대를 이루고 있습니다. 직업상 대구로 이사 오면서 출석하는 교회가 대한예수교장로회 합동 교단에 소속된 교회이며 제 생애 5번째 교회입니다.
한동안 귓등으로도 듣지 않던 헌금에 대한 설교나 말씀은 그저 주일 아침 텔레비전의 정말 유일하게 재미있는 만화영화를 뒤로하고 불편한 마음으로 어릴 적에 걸어서 4~50분 거리의 탄광촌 강원도 정선의 함백중앙장로 교회가 제 생애 첫 교회며, 모친의 한복장에서 조심스레 꺼내어 우리 3형제에게 건네주시며, 딴 짓하지 말고 연보주머니에 꼭 집어넣어야 한다는 명령한 함께 빳빳한 거금 천원 지폐가 유일한 기억입니다.
광부에게 시집 오셔서 여러 종교를 거듭하다 느지막하게 자리 잡고 귀의하신 시어머님 - 제게는 조모님이 되시며, 우리 가문(?)의 신앙의 조상이 되십니다 - 에 의해 자연스럽게 교회를 출입하셨습니다. 당신의 지아비와 우리 삼형제가 신앙에서 떠나 방황하지 말고 신앙생활 제대로 하기를 간절히 바라며 기도의 무릎을 꿇으셨습니다. 그렇지만 아직 밑의 두 동생은 돌아오지 않고 있으며, 그래도 당신의 기도 중 하나였던 부친의 신앙의 회복은 이루시고 부르심을 받으셨습니다. 뒤이어 부친께서도 홀로 신앙생활 잘 해오시다 2017년 4월 부르심에 응하셨습니다.
모친의 헌금에 대한 가르침과 교회를 들락거리며 전해 듣던 말씀에 간간히 들려오던 십일조와 전도에 대한 협박성 말씀에 마음이 부담스러웠습니다. 지금까지 27년여 한 직장에서 생활하며, 항상 빠듯하다는 생각에 감히 엄두도 내지 못하고 있습니다. 명목상 십일조인 생활 십일조로 얼마를 떼어 십일조 봉투에 담아 이름을 적어야 하나 고민했습니다. 그러나 교회에서 선포되는 설교 중에 하늘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다 아시지만 그래도 이름을 구체적으로 적어야 복을 구체적으로 받을 수 있다던가 하는 말에 창피하지만 얼굴 두껍게 들이밀었던 적도 있었습니다.
슬하에 3남매를 두고 이젠 어느 정도 성장하여 사회로 나갈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그들이 어렸을 때 한 가지 드는 고민 중의 하나가 과연 이 자녀들을 신앙적으로 어떻게 양육해야 하는가가 항상 걱정꺼리였었습니다. 금요 성령 축제라 명명된 금요 기도회에 나가선 항상 앉던 앞자리에 앉아 3남매의 머리에 손을 대고 고래고래 소리 질러가며, 이들을 주의 손에 온전히 의탁하기 원합니다. 만나주시고, 만져 주시고, 만들어 주옵소서! 기복적 기도를 목청이 터져라 기도도 했었습니다.
주일학교에 가는 자녀들에게 월급날이면 은행 직원이 알아서 '아~아! 또 신권 바꾸러 오셨군요?' 할 정도로 모친의 영향을 받아 드릴 것은 없지만 그래도 드리는 것은 나름 정성을 다해 드리자며 신권에 아이들 주일 헌금도, 명목헌금도 봉투에 넣어 이름을 적어 봉헌하였으며, 한동안 연봉의 많게는 2~30%까지 헌금이 차지할 정도였으며, 연말정산시 연 헌금액이 0만원까지 될 정도였었습니다.
오죽했으면 2007년 미국으로 직장에서 주어진 교육의 기회를 가족과 함께 다녀오기 위해 부족한 자금을 은행으로부터 대출을 받았을 때도 십일조를 해야 하나? 고민할 정도였었습니다. 얼마 되지 않는 적금을 들어 만기 수령할 때에도 십일조를 어떻게 해야 하나님 보다 우선 내 마음이 편할까 고민하고 내 잣대에 맞춰 정확한 잣대와 헐렁한 내 잣대를 이분법적으로 적용하며, 가슴 떨려하던 기억도 갑자기 스쳐지나갑니다.
그런데 이 책을 읽고 나서 그에 대한 부담이 확실히 경감했음을 말씀드립니다. 록펠러는 자신의 부의 십일조를 계산하기 위해 별도의 인원을 꾸려 십일조만 계산하게 하였다는 황당한 말을 듣기도 하고 동경도 하고 마음 불편함도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구약의 율법과 십일조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온전히 성취되었다는 것과 신약의 교회는 더 자유로운 십일조를 드릴 수 있는 자유가 있다고 우리에게 빛을 던져준다는 서평 전문가인 방영민 목사의 말이 이 책의 핵심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아울러 최근에 제가 출석하는 교회가 아닌 다른 교회에서 들은 말씀 중 기억나는 한 구절이 이 책의 십일조의 공공성, 즉 헌금의 공공성이 아닐까 싶은데 내용은 이렇습니다. 교회 재정 중 과연 얼마만큼이 복음을 위해 사용되어지고 있는가가 그 교회가 건전한 재정을 가진 교회인지 여부를 가늠하는 척도라고 하는 말씀입니다 교회의 사사화(사유화)를 우려하시는 목소리라 이 책이 더 많은 이들에게 건네져 읽혀져 헌금사용의 문제점에 대한 성도들의 깨어있는 의식이 있어야 할 것 입니다. 물론 종교세 과세와 이에 따른 볼썽사나운 행태는 정말 내가 이러려고 기독교인이 되었던가 하는 자괴감마저 어쭙잖게 가지게 합니다.
저는 이 책을 읽으면서 목사님 개인적 인간적 면모와 저와 같은 무지한 성도들의 잘못된 신앙관과 말씀에 대한 자의적 해석으로 인해 고통 받는 자들의 아픔, 그리고 능력이 없는 자는 오히려 십일조로부터 - 레위인을 제외하고 - 받았었다는 새로운 사실을 하나 더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중간 중간 세 가지 설, 두 가지 설 등과 같은 기존이 개념에 대해 첫째, 둘째, 셋째 하시며 또박또박 반박하시는 듯한 문체가 읽기에 좀 불편하였지만 그만큼 아직도 불편한 구석이 여기저기 산재해 있음을 기억할 때 목사님의 이 귀중한 중간정리가 제대로 그 역할을 감당하여 더 이상 존폐 논쟁에만 멈추는 것이 아닌 명확한 정의가 자연스럽게 정립되어갔으면 하는 바람이 있습니다.
2016년 말부터 진행 중인 국가적 사건을 접하며, 국민뿐만 아니라 성도도 깨어있어야 함에 대한 막중한 책임감마저 듭니다. 종교개혁 500주년이라고 떠들어 기 이전에 왜 종교개혁이 일어났으며, 루터와 그 친구들은 무엇을 했으며, 독일은, 스위스는 무엇을 했으며, 장로교는 무엇이며, 우리의 신앙고백은 어떻게 계승되어야 하는지, 그리고 우리의 헌금생활은 어떻게 정착시켜야 하는지, 행해야 하는지 뒤늦게나마 문제의식을 가지게 되었음에 감사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