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스하기 전에 우리가 하는 말들
알랭 드 보통 지음, 이강룡 옮김 / 생각의나무 / 2005년 5월
평점 :
절판


알랭 드 보통의 여러 번역서들 가운데 이 책이 제일 판매실적이 저조한 것 같습니다. 원인이야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겠지만 제가 보기엔 독자들이 도저히 콘텍스트를 유지하며 읽기 어려울 정도로 오역이 많은 탓도 일조하는 것 같습니다. 바로 첫 페이지부터 요령부득의 문장들이 나오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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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wever gloomy the thought may strike those of ethical disposition, there is difference between letting it bubble discreetly in one's mind while squeezing an orange or skimming through the channels of late night television and hearing it confirmed in the fury of another's accusation, along with a couple of vases sent crashing to the ground to emphasize the point.

역서: 도덕적 성향을 가진 사람은 이런 생각으로 무척 우울해질지도 모른다. 그러나 같은 생각이라도 밤늦게 티브이 채널을 이리저리 돌리거나 오렌지 주스를 만들면서 떠오르는 것과, 남에게 비난을 듣고 화가 나서 자신의 생각을 고집하려고 꽃 병 몇 개를 집어 던져 깨뜨리고서 실감하게 되는 것과는 다르게 마련이다.

사람들은 결국은 자신이 세상에서 제일 흠잡을 데 없는 좋은 사람이란 생각을 가지게 마련이지만 이런 자기자신에 대한 우월감이 도덕적인 성향의 사람들에겐 좀 불편할 것이라는 말입니다. 하지만 혼자 있는 시간에 자신에 대한 우월감을 느끼는 것과, 남이 나에게 “그래, 잘났다, 잘났어. 혼자 다 해먹어라” 하며 홧김에 병들을 바닥에 집어 던질 때 나의 우월함을 실감하는 것은 분명 차이가 있다는 얘기죠. 밖으로 나의 우월감을 드러내어 사람들의 원성과 분노의 대상이 되는 것보다는 혼자서 오롯이 스스로의 우월감에 잠기는 것은 무해한 일일 수 있다는 얘기입니다.

번역: 도덕적 성향을 가진 사람에게는 결국 세상에 쓸만한 인간은 자신 밖에 없다는 이 생각이 무척 암담하게 느껴질지 모른다. 하지만 오렌지주스를 짜거나 밤 늦게 무료하게 텔레비전 채널을 돌리면서 이런 생각을 하는 것과 누군가 내게 “그래, 잘났다, 잘났어. 혼자 다 해먹어라” 하며 홧김에 병들을 바닥에 집어 던질 때 나의 우월함을 실감하는 것은 분명 다른 문제다.

다음 문장에서는 간접적으로, 즉 의도적으로 자신을 깎아 내림으로써 자신의 우월감을 드러내는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고 있습니다. 하지만 책에 번역되어있는 문장으로는 이런 의미가 충분히 전달되지 않을 것 같군요.

The charm of self-inflicted insults comes in knowing how far to dig the knife and, with a surgeon's precision, how to avoid the rawest nerves. It is as harmless a sport as tickling oneself. When Elton John sang a beautiful song in which he lamented to his beloved, in the well-worn tradition of singers and moist-eyed poets, that he only wished his art could do justice to his ardour (‘Your Song’, 1969), we would be foolish to suppose that he doubted his talent for even a moment.

역서: 자해소동을 자주 빚는 이들의 특징은 현재 부엌칼이 얼마나 멀리 떨어져 있는지 확실히 알고 있다는 것이고, 외과의사처럼 가장 민감한 신경은 잘도 피해간다는 사실이다. 그것은 자신을 간질이는 것만큼이나 무해한 오락이다. 엘튼 존이 부른 아름다운 사랑 노래 가운데 사랑했던 이에 대한 비탄을 담은 곡이 있다. 낡은 전통을 고수하는 가수들과 우수에 찬 고고한 시인들 속에서 그는 오직, 자신의 열정(1969년 발표한 ‘너의 노래’)이 작품 속에 제대로 구현되기만을 원했다. 비록 한 때이긴 하지만 그가 자신의 재능을 의심했다는 것을 믿기 어려울 것이다.

이렇게 번역을 해서도 책이 나올 수 있다는 게 그저 경이로울 지경입니다. 거의 코믹한 수준이군요.

우선, dig the knife는 (신기하죠, 친구란 영화에서 보면 칼로 사람을 찌르는 것을 담근다고 하잖아요?) 찌른다는 뜻입니다. 더 큰 우월감과 만족을 얻기 위해 짐짓 자기비하를 하는 사람들을 자해하는 행위에 비교하는 거죠. 하지만 그들은 얼마만큼 깊이 찌르면 목숨이 위태롭지 않을지 잘 알고 있고, 또 가장 민감한 부분은 교묘하게 피해서 자해를 하기에 결국 스스로를 즐겁게 하기 위한 짓거리란 점에서는 자신을 간질이는 오락에 다름없다는 말입니다. ‘in the well-worn tradition of singers and moist-eyed poets,’는 ‘낡은 전통을 고수하는 가수들과 우수에 찬 고고한 시인들 속에서’가 아니라 ‘가수들과 감상적인 시인들이 이전부터 으레 해오던 방식으로’라고 해석을 해야겠습니다. ‘do justice to his ardour’도 ‘자신의 열정이 작품 속에 제대로 구현되기’가 아니라 ‘자신의 열정을 제대로 표현하기’가 맞겠죠. ‘we would be foolish to suppose that he doubted his talent for even a moment’ 역시 ‘비록 한 때이긴 하지만 그가 자신의 재능을 의심했다는 것을 믿기 어려울 것이다’가 아니라 ‘엘튼 존이 자신의 예술적 재능으로는 자신의 열정을 제대로 표현 할 수 없을 것 같다는 식으로 엄살을 떨 때 그 말을 잠시라도 믿는 사람은 바보다’라고 해야겠습니다.

번역: 어느 정도 깊이 찔러도 목숨에 상관이 없는지, 어디는 피해서 찔러야 할지 외과의사처럼 정확하게 알고 있을 때 자해는 매력적인 수단이 된다. 그것은 자신을 간질이는 것만큼이나 무해한 오락이다. 가수들과 감상적인 시인들이 이전부터 으레 해오던 것처럼 엘튼 존이 연인에 대한 그의 열정을 제대로 표현할 수만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슬퍼하는 아름다운 사랑 노래를 불렀을 때 그가 진짜 잠시라도 자신의 재능에 회의를 느끼고 있는가 생각했다면 그건 오산이다.

http://blog.naver.com/asnever

혹시 내가 먼젓번엔 오해를 한 것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에 몇 페이지를 더 들쳐본다.

어떤 번역작품은 독자들을 불행하게 만들 수 있다. 아니 그 보다는 정신적인, 심지어는 신체적인 고통까지 독자들에게 가할 수 있다고 하는 편이 낫겠다.

옛날에 영국에서 행해지던 고문기구 중에 rack이라는 것이 있었다. 사지를 잡아당겨 뼈가 탈구되고 근육이 끊어지게 만드는 가혹한 심문방법이었는데 여기에서 rack one’s brain(머리를 쥐어 짜다)이란 표현이 유래했다고 한다.

오역으로 엉망진창인 문장들을 책으로 내놓는 것은, 말 그대로 독자들의 머리를 형틀에 올려놓고 이해의 폭을 강제로 비틀고 잡아당겨서 마침내는 ‘그런 뜻이겠지’라는 타협과 굴종을 독자들에게 강요하는 일이다. 독서를 통해 즐거운 인식의 확대가 아니라 고통스러운 인식의 퇴행을 경험하게 만드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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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에 이어서 책에서는 거짓 겸손, 즉 겸손을 가장한 자화자찬에 관한 글이 계속 이어진다. 바로 앞에는 엘튼 존이 자신의 노래실력으로는 연인에 대한 그의 열정을 제대로 표현할 수 없다고 탄식하는 노래를 부를 때 그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으면 안 된다는 내용이 나왔다.

원문: 2page The ability to deprecate his musical skill was premissed on an apparently humble but profoundly arrogant belief that he had in fact written something of a gem.

역서: 12page 이렇게 자신의 음악적 재능을 탓할 수 있다는 것은 겸손함으로 보일 수도 있지만, 보석 같은 작품을 썼다는 믿음은 사실 아주 거만한 행위다.

마치 산탄총알처럼 공중으로 흩어지는 해석이다. 목표를 향해 뿌려지는 그 숱한 총알 중에서 한 개라도 의식에 걸려 의미를 형성하겠지 하는 역자의 느긋함까지 느껴지는 것 같다. Premise (전제가 되다)란 단어만 제대로 살렸으면 저렇게 자의적인 해석이 나오지는 않았을 것이다. 저자의 말은 엘튼 존이 자신의 음악적 재능에 대해 짐짓 겸양을 떨 수 있는 것은 자신이 정말 보석 같은 노래를 작곡했다는 자만심이 전제되었기에, 즉 그런 자만심이 마음에 먼저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라는 것이다.

제안 번역: 그가 자신의 음악적 재능을 비하할 수 있었던 것은, 겉으로는 겸손하지만 속으로는 자신이 거의 보석 같은 작품을 썼다는 거만한 믿음이 먼저 있었기에 가능한 행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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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자기비하는 “to show how much he can spare”를 위한 남자들의 유희라는 말이 뒤 따른다. 역자는 이 문구를 “그가 할 수 있는 만큼의 것을 보여주기 위한” 이라고 해석했는데 can spare는 ~없이 지내다, 즉 do without의 의미를 가지고 있고, 다음에 나오는 문장들에 비추어 볼 때도 “그가 얼마나 부족한 사람인가를 보여주기 위한” 이라고 해석하는 것이 맞고 문맥에도 어울리겠다. 하긴, 다음에 나오는 문장들도 모두 오역이 되어있기는 하지만……

원문: 2page What musical confidence it must take to sing melodiously one has not a jot of it. What greater assurance one attain than casually to spare the thought one is a self-centered churl?

역서: 12page 노래를 잘 부르기 위해 꼭 필요한 음악적 확신이 전혀 없는 이들도 있다. 사실 자기 중심적 얼간이가 되지 않기 위해서 그런 생각을 접어두는 것보다 확실한 방법이 어디 있겠는가?

이건 오역을 넘어선 반역이다. 이 문장을 어떻게든 녹여보려고 산화해갔을 독자들의 뇌세포에 애도라도 해야 할 지경이다. Spare란 단어의 해석도 계속 난항을 보여준다. 앞에서는 ‘없이 지내다’ 란 뜻이었지만 여기에서는 share, 즉 ‘나누어주다, 알려주다’ 란 뜻이다.

앞의 문장, 즉 자신이 얼마나 부족한 사람인가를 보여주는 게 남자들의 유희라는 내용과 연결되어서 해석을 하면

제안 번역:

도대체 얼마나 음악에 자신이 있으면 자신은 음악에 관해서는 전혀 내세울 게 없다는 내용을 멋지게 노래로 부를 수 있는 것일까? 또, 얼마나 자신감이 있어야 자신은 자기중심적인 잡놈이라고 아무렇지도 않게 말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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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자기 겸양은 “엄마, 이것 좀 봐요, 나 손 놓고도 자전거 탈 수 있어요” 하고 엄마에게 뽐내는 아이들의 행태와 비슷하다는 내용이 이어진다.

원문: 2page

“Johnsonian deprecation appears as a branch of cocksure, ‘Look, Mum, no hands’ cycling boast, in which the need to keep a firm grip on the handlebars of self-respect can temporarily be relaxed, so one can freewheel down the hill shouting merrily, ‘I’m such a lousy singer,’ and ‘Oh, what a brat I am.’

역서: 13page

새뮤얼 존슨이 지적했던 것은 독선과 자만의 양상을 띠고 나타나기도 한다. 자전거 실력을 뽐내는 아이를 보라. “보세요, 엄마. 이제 손 놓고도 탈 줄 알아요.” 잠시 긴장을 늦추며 뿌듯해할 수는 있겠지만 결국 아이에게 필요한 것은 자전거 핸들을 꽉 움켜잡아야 한다는 사실일 뿐이다. 누군가는 브레이크도 잡지 않고 “난 정말 재수없는 가수야”, “나는 정말 개차반 같은 놈이야”라고 유쾌하게 소리를 지르며 언덕 아래로 내달릴 수도 있겠다.

“자전거 핸들을 꽉 움켜잡아야 한다는 사실일 뿐이다” 는 거꾸로 해석을 해놓았다. One을 누군가로 해석하는 것도 자연스럽지 않고 lousy는 ‘재수없는’ 이 아니라 가수가 노래실력을 비하한다는 뜻이므로 inferior, worthless의 의미로 해석해야 한다.

제안 번역:

새뮤얼 존슨이 지적했던 것은 독선과 자만의 양상을 띠고 나타나기도 한다. 자전거 실력을 뽐내는 아이를 보라. “보세요, 엄마. 이제 손 놓고도 탈 줄 알아요.” 사람들은 자존심이란 자전거 핸들을 잠시 놓고는 페달도 밟지 않는 채 “난 정말 형편없는 가수야”, “나는 정말 개차반 같은 놈이야” 라고 유쾌하게 소리를 지르며 언덕 아래로 내달리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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