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흰둥이 야만인에게 무슨 일이 있었나
프랑수아 가르드 지음, 성귀수 옮김 / 은행나무 / 2013년 10월
평점 :
절판
“이 고독과 미지의 땅에서 그는 이미 죽은 것이나 다름없었기에 죽음은 더 이상 낯설지도, 두렵지도 않았다. 그러니 살아야 했다. 살아야만 했다.”
19세기 중반, 유럽을 발칵 뒤집어 놓을만한 사건이 발생한다. 바로 ‘흰둥이 야만인’의 출현이었다. 단지 그 출현만으로도 놀랍지만, 더욱 더 사람들을 경악시킨 것은 바로 그 ‘흰둥이 야만인’이 17년 전 실종되어 사망처리가 된 프랑스 선원인 나르시스 펠티에라는 사실 때문이었다. 당시 열네 살의 어린 소년이었던 펠티에는 오스트레일리아 퀸즈랜드 북부에 위치한 케이프요크 반도에서 실종되고 만다. 어린 소년은 동료선원들과 함께 식수를 찾으려다 홀로 동떨어져 일행들에게서 버려지고 만다. 그 누구도 그의 존재를 찾지 않았고, 그를 찾기 위해 노력하지 않았다. 결국 그는 이 사회에서 ‘사망’처리가 되어 없는 존재가 되어버리고 말았다.
그러다 17년이 지난 1875년, 영국 선원들이 원주민들 틈에서 단연 눈에 띄는 바로 이 ‘흰둥이 야만인’인 펠티에를 발견하게 된 것이다. 17년이라니. 그렇게나 긴 시간 동안 그 소년이 원주민들 틈에서 살아남았을 줄 어느 누가 알았을까. 더욱이 완전한 야만인이 되어 자신의 이름도, 문명에 대한 것도, 언어조차도 잊은 채 살아갈 것이라고. 온몸에 원주민들의 문신을 한 채 그들의 방식과 삶을 배운 채 17년을 살아 온 펠티에. 과연 이것이 현실, 실제로 일어난 일이라고 하면 그 누구도 믿기 힘들 것이다. 하지만 이는 사실이었다. 실제 19세기 중반, 나르시스 펠티에라는 인물의 실존 이야기인 것이다.
그리고 그런 그를, 다시금 문명으로 데리고 오기 위한 준비가 시작된다. 과연 그를 그 상태 그대로, ‘흰둥이 야만인’으로서의 모습으로 두는 것이 옳은 일일까, 아니면 원래 그의 자리였을 문명으로 되돌리는 것이 옳은 일일까. 무엇보다 가장 혼란스러운 것은 펠티에였을 것이다.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하는 문명을 다시금 받아들여야 했기 때문이다. 결국 문명과 야만이라는 두 가지의 충돌이, 이야기의 흐름을 정교하게 엮어나가고 있다.
글에서 알 수 있듯이, 어쩌면 그를 문명으로 데리고 오려는 것은 우리들의 욕심과, 그러한 모습 속에서도 인간으로서의 본질을 되찾아야 한다는 억지스러움이 빚어낸 또 다른 비극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환경에 무서우리만치 적응하고, 적응당하는 인간의 모습을 다시 한 번 경험한 놀라운 사건이었다. 문명과 야만의 세계를 오고가는 펠티에의 삶을 치밀하고도 정교하게 표현해 낸 섬세한 문장들이 더욱 더 이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게 만드는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