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하의 시간들
델핀 드 비강 지음, 권지현 옮김 / 문예중앙 / 2011년 2월
평점 :
절판


 

열차가 다음 역을 향해 달리는 동안 마틸드는 몸을 안쪽으로 더 밀어 넣었다. 몇 센티미터를 더 확보하고, 내렸다 타지 않으려고 꿋꿋이 버텼다. 절대 놓아선 안 된다. 공기는 포화 상태다. 사람들의 몸은 조밀한 하나의 지친 덩어리로 융합되었다. 웅성거림은 침묵에 자리를 내주었고 사람들은 다들 힘든 걸 꾹 참는다. 턱은 열린 창문을 향해 올라가고 손은 버팀목을 찾는다. -66쪽
 
빽빽하고 무질서한 인파에 밀려 도시는 언제나 자신의 리듬, 자신의 분주함, 자신의 통행 시간을 강요하는구나 하고 생각했다. 도시는 외로운 길을 가는 이 수백만 명의 사람들을 알지 못할 거라고 생각했다. 그들이 만나는 곳에는 아무것도 없다. 빈 공간이나 잠깐 빛났다가 사라지는 불꽃 외에는. -268쪽
 
만남을 가로막는 것은 도시다. …“영원히 만나지 못하는 교차로들이 끝없이 펼쳐진 땅”은 사랑과 인연을 불가능한 것으로 만드는 공간이다. 지하철에서, 자동차 안에서 ‘지하의 시간’, 고독과 침묵의 시간을 보내는 두 주인공을 도시는 포로로 잡고 놓아주지 않는다. -275쪽, 옮긴이의 말
 



도시의 습한 기운과 끈적끈적한 찝찝함이 그대로 느껴지는 작품이었다. 한 때는 도시의 북적이는 활기와 화려함에 동경을 품기도 했더랬다. 그야말로 반짝 빛나는, 꿈의 도시였다. 다양한 사람들이 다양한 모습을 하고 다양한 곳을 향해 오고가는 모습들에 사람구경을 하는 것만으로도 즐거웠다. 때론 그들을 바라보며 다양한 추측과 가늠을 해보는 것만으로도 즐거웠던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찰나였다. 도시의 이면을 마주하고 나면 그때의 그 감정들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감쪽같이 사라져버리고 마는 것이다. 도시는 화려하게 겉치장을 하고 있지만, 속내는 그야말로 썩어문드러졌다. 가슴 속을 깊게 후벼 파는 고독과 외로움에 치가 떨리는 곳이다. 하루에도 수많은 사람들과 오고가며 마주치지만, 그 뿐이다. 한 순간 스치고 마는 기억에도 남지 않을 사람들일뿐 이름과 다양한 취향들을 공유할 사람들은 손에 꼽을 정도로 미비하다. 그렇게 습하고 어둑한 도시 속에서 우리는 몇 번이고 스쳐지나가기만 할 뿐이다. 


도시에서 가장 기분이 나쁜 곳은 지하철이다. 어디든 간편하게 이동할 수 있다는 장점을 동반한 그야말로 고독한 곳이다. 출퇴근 지하철은 정말이지, 지옥을 방불케 한다. ‘지옥철’이라는 말이 괜히 나온 말은 아니리라. 많은 사람들의 틈에 껴 몸을 움직이기도 힘든 지경에 이르면 숨이 막혀 죽어버릴 것만 같은 공황상태에 휩싸인다. 이보다 더 견디기 힘들었던 것은 사람들의 참기 힘든 이기심과 무표정이었다. 특히나 퇴근시간에 느껴지는 그 묵직함은 절로 나까지 그 묵직함에 눌려 쓰러질 지경이었다. 늘 불쾌한 침묵이 동반하고 간혹 그 침묵을 가르는 시끄러움 역시 불쾌하긴 마찬가지였다. 무엇하나 즐겁지 않은 공간이다. 그래서 인지 <지하의 시간들>에서 비유하는 지하철 속 풍경이 전혀 낯설지 않았다. 외려 지나칠 정도로 공감이 가는 통에 절로 고개가 끄덕여질 정도였다.  


<지하의 시간들>은 한 남자 티보, 한 여자 마틸드의 독백을 교차해 가며 보여준다. 같은 도시 아래 전혀 다른 공간에서 살아 숨 쉬는 그들의 이야기를 번갈아 들으며 사람 사는 인생이 어쩜 이다지도 거기서 거기일까 싶어 씁쓸함이 느껴졌다. 사랑하는 여자와의 관계를 이어갈 수 없음을 알고 이별을 통보한 뒤 후에 올 일상생활 속의 변화와 아픈 감정 역시, 세 아이의 엄마로 커리어우먼으로 성공했지만 한 순간의 직장상사와의 트러블로 나락으로 떨어지게 된 마틸드의 가여운 감정 역시. 모든 것이 우리에겐 친숙한 이야기로 다가오고 있다. 그래서 인지 읽는 내내 지나친 감정이입으로 나 역시 씁쓸하고 고독한 감정을 느꼈던 것 같다. 무덤덤한 듯 이어지는 일상생활을 무덤덤하게 써내려가는 작가 특유의 이야기가 참으로 좋았다. 그래서 인지 나 역시 무덤덤한 감정으로 그들의 행방을 함께 따라갔던 것 같다. 처음 접하는 작가이지만 유독 프랑스 작가의 작품을 좋아하는 나로서는, 또 하나의 마음에 드는 작가를 마주한 것 같아 두근거리는 시간이었다.
늘 인생의 특별함을 바라며 상상하고 꿈꾸고, 그 꿈속에서 웃음 짓던 날들이 있었다. 이제 와서 느끼는 것이지만, 나이를 먹을수록 그 꿈들이 짓밟힌 게 아니라 내 순수했던 감정들이 짓밟혀 탁해졌다. 도시에 물들고 점점 더 도시 속으로 나아갈수록 환하게 밝혀주던 가로등 불빛이 하나 둘씩 사라져가는 기분이었다. 하지만 회색빛 도시 속에서도 꿈은 존재한다. 이 책은 한층 우울하고 고독한 시기를 보내고 있던 나에게 다시금 작은 희망을 안겨주는 작품이었다. 고독한 지하철 속에서 티보와 마틸드가 서로를 인식했듯이 말이다. 어쩌면 역자의 말처럼 도시는 운명의 인연을 가로막는 존재일지 모른다. 운명의 존재이지만 그 장애물이 서로를 스쳐지나가게 만드는 것이다. 하지만 그 스쳐지나감조차 운명으로 나아가는 발걸음이다. 티보와 마틸드의 후의 행방은 내 상상 속에 펼쳐지고 말테지만, 어쩌면 이 책을 읽는 모든 이들이 같은 결말을 상상하며 미소 짓고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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