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하의 안위대한 개츠비]

문학동네 위대한 개츠비. 잘 읽힌다. 김영하답다...라는 일반적인 얘기를 하려는 게 아니고...민음사와 문학동네에 대한 편견은 더더욱 아니다. 얼마전에 적었던 파리대왕편에 대한 번역문제로 민음사에게 엄청난 실망을 한 적도 있다.

대여해서 읽었던 민음사의 위대한 개츠비를 아주 무리없이 감동적으로 마쳤던 기억이 있다. 그런데 얼마전 순전히 장서의 욕심으로 새롭다는 평이 자자했던, 그래서 읽다가 포기한 사람들이 페이지를 넘기는데 성공했다는, 문학동네의 위대한 개츠비를 구입할 기회가 생겨 냉큼 집어들은 후 책장에 꽂아넣고 하세월을 보낸 후 오늘 몇장 읽어보다가 다음 기회에 민음사 것과 바꿔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65쪽을 읽다가 짜증이 확 일었다. 코메디다.
(˝내가 개츠비야.˝ 그가 불쑥 말했다.
˝뭐?˝ 나는 소리를 질렀다. ˝아, 이런, 미안.˝
....그가 사려깊은 미소를 지었다...지나치게 공들여 격식을 차린 그의 말투는 우스꽝스러움을 간신히 면할 정도였다. 자기 소개를 하기 전 얼마 동안 그가 조심스럽게 말을 고르고 있다는 인상을 강하게 받았다.)

김영하의 해설 중에, 기존의 번역본을 읽다가 포기했다면서 그 원인중의 하나가 말의 위계라며 이십대에서 삼십대로 보이는 닉과 개츠비, 데이지와 개츠비가 서로 존대하는 건 21세기에 어울리지 않는다며 서로 반말을 하는 번역을 시도했다. 하지만 난 솔직히 이게 더 이상하다. 읽는 내내 인물들의 고전스런 맛은 없고 친구들이 가벼운 대화를 읽는 듯, 경박스럽다. 어릴 적 친구도 아닐뿐더러 우연히 제 사촌 여동생의 오래된 연인인 제3자와의, 최소 5살 이상은 차이가 날 개츠비와 말을 튼다고? 요즘 20대에서 30대초반은 처음 만나면서 어깨를 툭툭 치며, 어이, 내가 원빈이야하고 말을 까면 상대방도, 뭐, 네가?라고 말을 트나? 지나치게 격식을 차린 말투의 개츠비가 닉을 처음 보고 내가 개츠비야라니. 김영하씨, 이건 괜찮은거요?

당시는 1920년대의 근대라는 시간적 배경을 가지고 있다. 그 때의 말투와 지금의 말투는 기본적으로 다르다. 미국도 그건 마찬가지일터, 당시의 어투와 뉘앙스를 완전히 무시하고 모던으로 색칠한 번역은 전혀 고전문학의 맛을 내지 못하고 있는 듯하다. 아니, 그냥 쉽게 말해서 난 민음사본으로 읽으며 말의 위계로 인한 어색함이나 고루함을 전혀 느끼지 못한 바, 바로 이것이 바로 말의 위계를 책읽기의 장애로 생각한 김영하의 인식이 잘못됐다고 판단하는 역학적 근거다. 물론 개인적인 근거이지만 대부분의 독자가 이것으로 인해 읽기를 포기했다는데 절대 공감이 되지 않는다. 상감마마의 하오체나 댁은 뉘신지요정도는 몰라도 말이다.

김영하가 말한 고딩들의 `졸라잼없어`라는 책의 범주에 이 민음사책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정확한 번역의 김욱동과의 은근한 논쟁이 있었음을 볼 때 - 물로 이는 언론과 출판사간의 시장선점을 위한 기싸움때문이기도 하지만 - 사실 민음사본을 타겟으로 한 것으로 본다. 이 역시도 김영하의 상상력의 오버로 원 문장을 지나치게 꾸몄다고 생각되는 부분도 보인다. 물론 번역이란게 읽히는 시대의 정서에 맞게 다를 순 있지만, 의미가 통한다고 해서 원작자의 텍스트를 변형시켜도 된다는 것을 의미하진 않는다.

이쯤되면 차라리 김영하가 위대한 개츠비를 각색했다고 보는게 낫지 않을까 .핏제랄드의 위대한 개츠비가 아니라 김영하의 안위대한 개츠비. 독자는 누구의 개츠비를 읽어야하나. 매끄러운 글빨로 수채화처럼 부드럽게 번역한 것, 그래서 요즘의 세대가 읽기 쉽게 한 공로는 칭찬받아 마땅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존 번역의 문제의 원인을 말의 위계나 정직한 번역으로 간주하고 그것들을 자신만의 새로운 각색에 대한 이유로 댄 것은 원저자에 대한, 고전 번역에 대한 오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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