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연풍이를 만났어. 녀석은 제법 인생살이에서 성공했는지 제 나이도 생각치 않고 매우 댄디스런 세미복장에 백단위는 가뿐할 비싼 금테 안경을 쓰고 있었어. 내가 그녀석에게 얻어먹어야 할 형편이지만 왠지 오늘만큼은 내가 쏜다는 분수모르는 허세를 불러일으키더군. 꼴에 남자라고 말이야. 그래서 녀석에게 좋은 데 가서 술 한 잔 하자고, 내 이 술을 작년 가을부터 기다린거라고, 가자고, 손목을 잡아 끌었는데 막무가내로 거절하더란 말이야. 용건만 말하라고, 급하게 갈 데가 있다고. 약간 벙찌긴 했지만 내가 누구야? 눈치 백단아니겠어. 그녀석은 내가 1차를 쏘면 2차로 커피값을 내야하는데 그게 싫었던거지. 이야, 정말 치사하더라. 에잇, 나쁜 녀석!

그 술이 원래 스페인산인데 400년만에 오리지날 맛으로 한국에 들어왔다는 술이야. 전세계적으로도 유명한 술이지. 사실은 집에 이 술병이 한 개 있는데, 이 새로 나온게 훨씬 맛있어보였어. 게다가 두번째 병의 두번째 술은 최초로 소개되는 거라더군. 양도 커다란 소주댓병 두 병 크기에, 집에서 심심할 때 혼자 홀짝홀짝거리라고 애주가들을 위한 작은 샘플까지 덤으로 주는 모양이야. 이 좋은 기회를 녀석과 함께 하고자 한 나는 참으로 순진무구 그 자체 아니야? 녀석은 이 호의를 끝내 거부하더군. 그래서 연풍에게 다음에 또 보자는 허허스러운 작별인사를 할 수 밖에 없었어, 아 물론 녀석과는 영원한 작별을 했어.

늦겨울 차가운 밤바람은 낱장손수건처럼 표표히 날아와 머리를 헝클이고 난 모가지를 한껏 몸속으로 구겨넣고 침침한 거리를 13분 21초동안 쓸쓸히 헤매었지. 그러다 생각난 나딘이란 친구에게 전화를 했어. 나올 수 있냐, 나올 수 있다, 지금 바로!, 그럼 술 한잔? 오케이. 우린 만나서 나딘이가 자주 가는 열린술집이라는 보기만해도 기괴칙칙몽롱해지는 뭉크풍 그림들로 벽면을 장식한 유명한 술집에 자리를 잡고는 다시 그 400년 어쩌구하는 술을 마신거야. 보기좋은 떡이 맛도 좋다잖아? 와, 우린 그 술병의 자태에 일단 넋을 잃고 말았어. 아냐, 술 취해서 그런게 아니라구. 정말 멋졌어. 우리들이 높은 탄성을 연달아 지르자 옆테이블에서 거 좀 조용히 합시다라며 도전을 해오더군. 욱했지만 그냥, 착해지기로 했어. 도끼선생의 악령에 나오는, 내가 너무나 닮고싶은 스따브로긴처럼 초인적인 자제력을 발휘했달까. 그 테이블은 운이 좋았던 셈이지. 아무튼, 그것은 마치 순백의 크로아티아 여성의 누드화를 보는 듯하달까, 아니면 검은 히잡속에 비치는 아랍 여성들의 우물처럼 깊고 고혹적인 눈빛같다랄까, 순간 나의 미각은 용광로였고 넘치는 쇳물처럼 입속에 침이 진득해지더군. 왠 늙은 기사와 말 그림도 섬세한 붓터치로 멋드러지게 그려져 있는데 친숙한 느낌이 들길래 약 3초간 감상을 했어.

맛은 또 어떠냐고? 말을 마. 사실 술이란건 나한테는 다 써! 술 마시는 이유는취했을 때 그 느낌때문 아니겠어? 그게 중요한 거라구. 녀석과 마시면서 이 술맛을 찬미하느라 정말 주둥이가 아플지경이었어. 다른 술보다 마실수록 나의 또렷했던 정신이 뺑그르르 돌며 얼티밋한 아스트랄의 세계로 빠지면서 마치 유럽의 어느 옛 고성에 들어 앉아 쌈박한 흑백티비의 블랙코미디를 보는 듯, 때론 이빨 번득거리게 웃게 하고 때론 서로에게 침묵을 강요하는 진지한 기분마저 느끼게 했어. 인생이 가르쳐주기도 힘든 이 웃프고 진솔한 감정을 감히 술따위가 말야, 불러일으킨거야. 참으로 보기만해도 세상이 아름다워 보이는데 맛까지 봤으니 천국이 따로 없더라구.

나딘이랑 안면이 있는지 술값을 일할이나 깍아줬어. 좋은 녀석, 나딘. 나쁜 녀석, 연풍. 어마어마한 양을 사이좋게 나눠마시고는 헤어졌어.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갑자기 술집에 전화를 걸어 그 술을 주문해버렸어. 에라, 모르겠다하고 말이야. 생각나서 견딜 수가 있어야지. 이런 즉각적인 행동을 잘 안하는 나로서는 의외였어. 전화를 끊고나서 손에 쥔 핸디를 보면서 헥! 스스로도 깜짝 놀랐다니까? 취해서 그랬을 거야. 뭐 괜찮아. 어쩔 수 없어. 이미 이 술이 집에 배달되었다고 문자가 와버렸어. 돌이키고 싶은 마음도 없으니, 그저 맛나게 마시고 기분 좋게 불콰해지길 바랄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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