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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림의 중요성을 깨달은 달팽이
루이스 세풀베다 지음, 엄지영 옮김 / 열린책들 / 2016년 7월
평점 :
달팽이는 왜 느린지 알고 싶었던 어느 달팽이의 여정
나도 예전에는 잘 날아다녔단다. 하지만 지금은 날 수가 없구나. 옛날에, 그러니까 너희 달팽이들이 이 들판에 살기 훨씬 전에는 나무가 지금보다 훨씬 더 많았지. 너도밤나무, 밤나무, 떡갈나무, 호두나무, 참나무 등등, 셀 수 없을 정도였어. 그때만 해도 모든 나무들이 내 집이나 마찬가지였단다. 밤마다 나무들 사이를 자유자재로 날아다녔지. 사라져 버린 나무들에 대한 추억이 쌓이면서 몸이 너무 무거워지는 바람에 이젠 날 수조차 없구나. 보아하니 넌 아직 어린 것 같은데. 하지만 지금까지 네가 본 것, 쓴맛이든, 단맛이든 네가 여태것 맛본 것, 그리고 비와 햇빛, 추위와 밤, 그리고 모든 것들이 너와 함께 움직이다 보니 무걸울 수밖에. 그 무게를 감당하기는 아직 네가 어리기 때문에 몸이 느린 거란다.
"지금 제 기분이 어떤지 저도 잘 모르겠어요. 하지만 웬지 그리 좋은 것 같지는 않아요." 달팽이가 중얼거렸어. "반항아야 그런 걸 두려움이라고 한단다. 두려움." "그럼 저를 반항아라 부르지 마세요. 그 이름만 가지면 용기, 엄청난 용기가 솟아날 줄 알았는데." 달팽이를 등에 태우고 느릿느릿하게 움직이던 거북이는 두려움을 무서워할 필요가 없다고 했어. 그러곤 자기가 알고 있는 지식을 모두 동원해서 달팽이에게 말해 주었지. 진정한 반항아라도 두려움을 느낄 때가 있지만, 맞서 싸워 이겨 낸다고 말이야.
마지막 꽃잎을 먹고 있던 거북이가 천천히 입을 열었단다. 만약 달팽이가 그렇게 느리지 않다면, 즉 느릿느릿하게 걷지 않고 송골매처럼 빨리 날거나, 메뚜기처럼 저 먼 데까지 폴짝폴짝 뒤어다니거나, 벌처럼 우리 눈이 못 쫗아갈 정도로 날쌔게 날아다닌다면, 아다 둘, 그러니까 달팽이와 거북이의 만남은 이루어지지 못했을 거라고 말이야.
"내가 주변을 관찰하고 뭔가를 파악할 줄 아는 건 타고난 본성이란다. 달팽이 네게도 좋은 점이 얼마나 많은데, 이렇게 느리다고 한탄만 하고 있어서야 되겠니? 내가 <반항아>라는 이름의 달팽이를 알게 된 것도 따지고 보면 네가 몇 걸음 가다가 뒤에 누가 쫓아오는지 보려고 고개를 돌리는 거북이처럼 느린 덕분 아니겠니.
반항아는 오래간만에 푹 자고싶은 생각밖에 없었지, 그래서 껍질 속으로 들어가려던 순간, 그는 달팽이들의 몸에서 흘러나온 허연 점액들이 서리 위에서 반짝거리면서 길처럼 쭉 이어진 모습을 바라보았어. 그리고 생각했어. `이것은 고통의 흔적이지만, 동시에 희망의 자취이기도 해.` 그는 당장 달팽이들을 불러 그들이 남긴 자국을 보도록 했단다.
"아니에요. 여려분을 이곳으로 데려온 건 제가 아니에요. 전에 이름을 갖고 싶다고 무작정 납매나무을 떠난 적이 있잖아요. 들판을 돌아다니면서 전 정말로 많은 걸 깨우칠 수 있었답니다. 특히 느림의 중요성을 말이죠. 그리고 아주 힘든 경험이긴 했지만 이번에도 아주 소중한 사실을 하나 깨닫게 됐어요. 민들레 나라는 저 먼 곳이 아니라, 우리 모두의 간절한 마음속에 있었다는 걸 말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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