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울져 떨어지는 시계들의 파문
히라노 게이치로 지음, 신은주.홍순애 옮김 / 문학동네 / 2008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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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지막 바벨의 컴퓨터까지 다 읽고 나서 또 다시 칠일재를, 다시 한 번 바벨의 컴퓨터를 제대로 읽고 나서 첫번 째 백주로 시작되는 단편들의 이야기의 구성과 그 의미의 윤곽을 희미하게나마 찾을 수 있었다.

작가가 의도하는 바를 찾는 재미와 또한 내가 상상하고 이해한 오역의 즐거움이 합해져 비로소 풍요로워 질 수 있었고, 히라노의 다른 책 "책을 읽는 방법"에서 강조한 '슬로리딩'을 실천한 바 내 빈약했던 독서의 지평과 사고의 높이가 한 차원 도약한 듯한 기분을 얻을 수 있었다.

 

이 책의 전체를 관통하는 주제는 '죽음', '자의식', '가능성', '재생(再生)' 이라는 키워드에서 집약되고 또 확장된다.

「백주」의 결(結)에서 맺는 한 편의 '시'(표제가 포함된)의 멜랑콜리한 난해함이 구체적인 이미지와 의미들의 고리로 연결되며 확장된 파문을 일으키며 보다 선명한 동요를 일으켰다.

 

「바벨의 컴퓨터」는 크로아티아 태생 이고르 올리치의 '아이드로잉'과 '바벨의 컴퓨터'(보르헤스의 소설 바벨의 도서관의 제목에서 차용) 란 테크놀로지 예술 작품들을 통해 히라노의 예술관과 문학관을 투영하여 보여주며, 특히 바벨의 컴퓨터는 유한한 삶(죽음) 안에서 도서관(유한의 언어)이란 시간의 초월적 존재자에게 현대의 신(新) 전능자인 테크놀로지를 결합시킴으로써 인간 삶의 다양하고 우발적이고 경계지어져 있는 것들(이념, 종교, 인종 따위)에 대해 그 의미를 소멸시킴으로써(*참조: p.347~348  "이 때 죽음은 그들을 언어에 의해 온전하게 하는 마지막 꿈이다. 컴퓨터는 그 때문에 모든 '씌어지지 않는 말'을 구제하고 기록한다. '씌어질 수 있는 말'은 단지 그 예외에 지나지 않으며, 게다가 그 특권성은 박탈된다. 왜냐하면 어차피 그것들을 산출하는 것은 오직 하나의 어떤 프로그램이며, 그것들은 무한에 가까운 다양한 말 속에서 우연히 생긴 어느 한 가지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그 생(生)의 의미를 죽음이란 꿈으로 성육신(成肉身) 혹은 갱생시키고자 하는데 그것은 피안의 세계를 지향하는 가톨릭적인 것으로 그 피안의 영위가 곧 니힐리즘으로 떨어질 수 있음을 지적한다. 그러나 그것(바벨의 컴퓨터)이 허무적인 것임과 동시에 신이 죽은 시대에 피안을 향해 희망을 거는 하나의 방법일 수 있음의 인식에 착안하여 다음과 같은 결론을 가진다.

컴퓨터 프로그램에 의해 망라되어 표현되어지려는 모든 언어 표현은 과거에도 미래에도 그 광경의 구체성에 있으며 또한 그 작업에는 끝(유한)이 있으며, 그후에 인간이 말할 수 있는 것은 모두 이 컴퓨터에 의해 산출된 언어(문학, 갱신)뿐이다. 이러한 언어는 그 혼돈을 야기한 신의 입장(바벨의 기원)에 입각하여 실은 신이 인간에게 벌을 준 것이 아니라 인간을 가능성을 향해 더욱더 전진시키기 위한 은총이라는 올리치의 의견이 곧 히라노의 생각과 일치하는 것이리라.


 「아이드로잉」도 흥미롭다, 어쩌면 올리치의 이 작품에서 얘기하는 바가 히라노의 「백주」의 비유와 상징을 역설적으로 더욱 명징하게 보여주는 게 아닐까.

동일한 상황을 설정하여 피실험자에게 눈으로 그리는 궤적(eye-mark)를 그리게 함으로써 동시에 여러 사람의 그것을 확인하게 함으로써 본질적으로 상호간이 그리는 패턴과 경계 그 윤곽은 사실은 차이가 없으나 그 마크야 말로 축소되고 복제된 국경과 같은 것으로 만듦으로써 우리가 경계 짓는 민족, 성별, 사회적 지위 등의 차이를 만들어 우리가 갖고 있는 동질성을 은폐하여 타자와 결합할 수 없는 이기적인 복수로 만드는 데, 그것이 아니라 우리의 본성인 단일성을 희구하여 개개인의 탈 차이화(non-differentiate)를 도모해야 한다는 것이다,[예술은 따라서 우리의 윤곽을 절단하여 우리를 흘러넘치게 하는 도끼이다.]-p331. ; 여기에서 책은 우리 가슴 속 언바다를 깨뜨리는 도끼와 같다 고 말한 카프카와도 통한다.

 

그리고 다시 처음, 「백주」..."현기증이 난다.~" 내가 너를 쫓는 것이냐, 네가 나를 쫓는 것이냐, 너와 나의 경계가 무너지고 마주보는 거울의 비춰진 모습처럼 어느 빌딩 어느 차 마저 다 똑같다...

틀림없이 앞으로 나아가고 있는데 계속 일그러지는 상, 심연으로 빠져든다 그리고 자신의 흔적을 찾기 시작한다.

 

...........

이름 없는 것이 날아와 그 거처를 드러낸다.

그 착수(着手)에 무르게 이가 빠진 칼날의 경계 오려낸 틈에서 뿜어낸 뜨뜻미지근한 숨

시간의 단면 투명한 황폐에서 용접은 무한히 지연되고

임시로 박힌 원심의 찰나에 어두운 집에서 들려오는 외침 소리가

환청의 물방울을 흩뿌리는 불꽃처럼

모습을 드러내는 대문 위에서

날개는 그 때마다 매듭이 풀려 석류의 과육에 물든 윤곽을 허공으로 날려버린다

그 궤적의 순간에

갑자기 거리를 씻긴다

진흙

말게 갤 전조에 긴장되어

녹슨 쇳덩어리는

침묵의 틈에 빙하처럼 스스로를 쏟아 붓는다

방울져 떨어지는 시계들의 파문

성대에 박힌 말뚝의 광선을 다 마시고

하나인 장소는

언어로 나타난다

깊이 그 난반사에 침잠하는

숫자들의 희롱

 

-p.13~15

 

 「칠일재」에는 퇴역군인인 아버지의 죽음과 함께 칠일재를 치르는 분주함 속에서 죽음을 현실로 대하는 화자의 모습을 보여주는 동시에 반면 아버지를 화장하는 과정에서 불에 탄 뼈에 삶의 흔적을 보는 등 죽음 자체가 가지는 철학적인 의미를 삶과 결부시켜 진지하게 돌아보게 하는 메세지가 있었으며, 고양이를 매개로 하여 아버지에 대한 기억과 에피소드를 풀어내는 이야기형식이 인상적이었으며, 더하여 견고하고 미려한 문체는 이 단편 전체 아우라의 부피를 극대화해 주었다.

 

「저편」에서「자기」까지 이어지는 극단편들에도 소년의 죽음이라는 비유적인 상징으로 극적이고 초현실적인 죽음을 통해 재생하게 되는 역설과 가능성을 그리고 있다.

 

여기까지가 전개라면, 그 절정은「최후의 변신」으로 치닫는다. 잘 알려진 카프카의 변신이라는 소설의 내용에서 그 아이디어를 가져와 자기를 잃어버리고 남의 잣대와 역할로서 정의 되어지는 자아의 모습에 환멸을 느낀 멀쩡했던(?) 주인공이 히키코모리로 전락(변신)하여 죽음과도 같은 최후의 변신을 모색한다. 인터넷이라는 사이버 공간에서 오로지 자신이라고 여겨지는 것으로서.

 

문학의 존재의의를 유려하고 응축된 문체, 그리고 풍부한 비유와 상징으로 증명한 듯 하다.

여러 각도로 접근하게 하고 분석하게 하고 두 번 세 번 밑줄긋게 하였으니 나에게 큰 의미가 있는 책이다.

 

추천한다, 이 책 뿐 아니라 이 작가, 히라노 게이치로를.....

 

14.09.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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