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서 잘 살아나가려면 향수에 저항해야만 하니까. 우리가 이미 올라타고 있는 배에 머물러야 하고, 현재에 단단히 발을 붙이고 있어야 하며, 어떤 방향으로든 나아갈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 또한 멈추지 않고 계속 돛대를 적절히 조종해야 하며, 돛이 제대로 바람을 타고 갈 수 있도록 그게 얼마나 부풀었는지, 바람의 방향이 갑자기 바뀌지는 않는지, 돛의 아랫부분을 지지하는 봉재가 제 위치에서 이탈해버리지는 않는지 매 순간 주의깊게 관찰해야 한다. 현재 삶의 혼돈과 속임수와 어려움에 열중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빛나는 과거에서 찾을 수 있는 달콤한 단순함에 빠져들지 않도록 조심해야만 한다. 이것이 바로 그날, 호메로스와 세이렌과 로버트 페이글스가 한 목소리로 내게 해준 말이었다. ㅡ애덤 니컬슨《지금, 호메로스를 읽어야 하는 이유》/세종서적 p.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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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년 전 낙산사 가는 길에 사마귀를 옮기는 개미떼를 본 기억이 떠올랐다. 수백 혹은 수천 마리의 개미가 바글바글 모여 죽은 사마귀를 이동시키고 있었다. 마치 커다란 상여를 지고 이동하는 장례 행렬 같았다. 어쩌면 그 사마귀는 개미들의 만찬 식탁에 놓일 지도 모른다. 장례식인지 만찬 회동인지 알 수 없는 그 개미떼의 행렬을 보며 생각했다.어차피 먹는다는 건 매번 장례식이구나. 내 식탁은 늘 다른 누군가에게는 장례식인 셈이다. 내 삶은 누군가의 죽음을 흡수하며 지탱한다.
집에서는 부엌이 바로 삶과 죽음이 공존하는 공간이다.인간의 먹이가 된 물고기, 부위별로 이름 붙은 채 살덩이로만 존재하는 동물들.할머니들은 여전히 그 공간의 싱크대 앞에 서 있다. 남성의 부엌 진출이 더딘 사회에서 집 안과 집 밖의 이중노동을 껴안고 사는 여성들은 할머니들이 없으면 어찌 살까 싶을 정도다. 사회의 진보 속에서 여성의 노동은 다른 여성에게 전가된다. 여성 노인의 집안 노동은 부뚜막에서 싱크대로 이동했다.
부엌은 예로부터 하대하는 공간이었지만, 언제나 중요했다. 오늘날과 같은 난방시설이 갖춰지기 전 부엌은 음식뿐 아니라 집 안의 난방도 담당했다. 부엌은 음식을 만드는 공간이자 불을 다루는 공간이다. 부엌을 지키는 조왕신은 불의 신으로도 불린다.곧 집안의 공기를 덥히고 사람의 마음도 덥히는 공간이다. 부엌은 집의 심장이다.가족 구성원이 골고루 드나드는 공간이어야 관계의 순환이 원활하다. 어느 한 사람이 부엌이라는 공간에 과하게 머물고 있다면, 식탁에 편히 앉는 사람이 정해져 있다면, 집안의 관계는 어디에선가 막히기 마련이다.
먹는 입, 말하는 입,사랑하는 입의 권리를 생각하는 정치적인 식탁은 누구든 환대해야 한다. 배고픔을 해결하는 동물적 존재에서 말하는 권리를 가진 정치적 인간으로, 나아가 타인과 온전히 관계 맺을 수 있는 사랑하는 인간으로 살아갈 권리는 모두에게 있다. 구속당한 입들의 해방이 권력의 구조를 흔들 것이다.

ㅡㅡ이라영 지음《정치적인 식탁》/동녘pp.25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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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브가 선악과를 먹은 행위 자체가 말씀에 대한 거역‘이라 문제였듯이, 음식이 들어오고 말이 나가는 입은 욕망의 회로이기 때문에.
피지배자가 가장 기본적으로 통제받는 신체 기관이다. ‘앵두 같은 입술‘이어야 할 여자들의 그 입, 주어가 아니라 목적어인 그 입, 그 주등이가 다른 세계를 여행하고 있으며 너무 많은 말을 뱉어낸다고 생각하기에 온 사방에서 이 입을 증오한다. 여자의 입술은 훔쳐야 하는장식물이지만, 입에서 나오는 말은 막아야 한다.
ㅡp.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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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는 이별에 대해서 말하지 않는다 - 김언 시론집
김언 지음 / 난다 / 201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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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상력의 회로가 설치돼 이이 히로가 설치돼 있는 사람들은 사람의 얼굴을 보고그 얼굴에서 이야기를 읽어낸다.
그렇지 않은 사람에게 얼굴은 그냥 얼굴일 뿐이라고- 커트 보니것, 『나라 없는 사람』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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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이 왔다

오규원

대문을 열고 들어오지 않고 담장을 넘어
현관 앞까지 가을이 왔다.
대문 옆의 황매화를 지나
비비추를 지나 돌단풍을 지나
거실 앞 타일 바닥 위까지 가을이 왔다
우리 집 강아지의 오른쪽 귀와
왼쪽 귀 사이로 왔다
창 앞까지 왔다
매미 소리와 매미 소리 사이로
돌과 돌 사이로 왔다
우편함에서 한동안 머물다가 왔다
친구의 엽서 속에 들어 있다가
내 손바닥 위에까지 가을이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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