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년 전 낙산사 가는 길에 사마귀를 옮기는 개미떼를 본 기억이 떠올랐다. 수백 혹은 수천 마리의 개미가 바글바글 모여 죽은 사마귀를 이동시키고 있었다. 마치 커다란 상여를 지고 이동하는 장례 행렬 같았다. 어쩌면 그 사마귀는 개미들의 만찬 식탁에 놓일 지도 모른다. 장례식인지 만찬 회동인지 알 수 없는 그 개미떼의 행렬을 보며 생각했다.어차피 먹는다는 건 매번 장례식이구나. 내 식탁은 늘 다른 누군가에게는 장례식인 셈이다. 내 삶은 누군가의 죽음을 흡수하며 지탱한다.
집에서는 부엌이 바로 삶과 죽음이 공존하는 공간이다.인간의 먹이가 된 물고기, 부위별로 이름 붙은 채 살덩이로만 존재하는 동물들.할머니들은 여전히 그 공간의 싱크대 앞에 서 있다. 남성의 부엌 진출이 더딘 사회에서 집 안과 집 밖의 이중노동을 껴안고 사는 여성들은 할머니들이 없으면 어찌 살까 싶을 정도다. 사회의 진보 속에서 여성의 노동은 다른 여성에게 전가된다. 여성 노인의 집안 노동은 부뚜막에서 싱크대로 이동했다.
부엌은 예로부터 하대하는 공간이었지만, 언제나 중요했다. 오늘날과 같은 난방시설이 갖춰지기 전 부엌은 음식뿐 아니라 집 안의 난방도 담당했다. 부엌은 음식을 만드는 공간이자 불을 다루는 공간이다. 부엌을 지키는 조왕신은 불의 신으로도 불린다.곧 집안의 공기를 덥히고 사람의 마음도 덥히는 공간이다. 부엌은 집의 심장이다.가족 구성원이 골고루 드나드는 공간이어야 관계의 순환이 원활하다. 어느 한 사람이 부엌이라는 공간에 과하게 머물고 있다면, 식탁에 편히 앉는 사람이 정해져 있다면, 집안의 관계는 어디에선가 막히기 마련이다.
먹는 입, 말하는 입,사랑하는 입의 권리를 생각하는 정치적인 식탁은 누구든 환대해야 한다. 배고픔을 해결하는 동물적 존재에서 말하는 권리를 가진 정치적 인간으로, 나아가 타인과 온전히 관계 맺을 수 있는 사랑하는 인간으로 살아갈 권리는 모두에게 있다. 구속당한 입들의 해방이 권력의 구조를 흔들 것이다.

ㅡㅡ이라영 지음《정치적인 식탁》/동녘pp.25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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