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도 그럴 것이 나는 하나의 타자니까요. 구리가 나팔로 깨어난다면, 거기에 구리의 잘못은 없습니다. 제게는 이게 명백합니다. 나는 내 사상의 개화에 참관합니다, 그것을 바라보고 그것을 듣습니다. 내가 악궁을 한 번 튕기면, 교향곡이 저 깊은 곳에서 술렁이거나, 펄쩍 무대 위로 올라옵니다.
늙은 멍청이들이 나라는 것에서 줄곧 잘못된 의미만 찾아내지 않았더라면, 무한히 먼 옛날부터 소리 높여 저자임을 자처하면서 외눈박이 지성의 산물을 쌓아 올린 저 수백만의 해골들을 우리가 쓸어낼 필요도 없었을 겁니다!
- P67

친애하는 스승님께,
우리는 사랑의 계절에 있고, 저는 곧 열일곱 살이 됩니다. 흔히 말하듯이 희망과 몽상의 나이이지요, - 그리하여 여기 저는, 뮤즈의 손가락이 닿은 아이로서, - 진부하다면 죄송합니다 — 제 신실한 믿음, 저의 희망, 저의 감각, 시인들의 것인 이 모든 것들을 말하고자 합니다. - 저는 그걸 봄의 것들이라고 부릅니다.
- P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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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

발톱으로 갉아
양말을 뚫고

밖으로 탈출한
엄지발가락

그런데 더는
도망갈 수가 없다

줄줄이 딸린
네 식구 때문에 - P14

엄마의 장독대

세 형제가 사는
우리 집은
엄마의 장독대

공부를 잘해
학교에서 상 받아 오는 형은
꿀단지

종일 젖병 물고
울다 자기만 하는 동생은
보물단지

심부름만 시키면
어딘가로 사라져 버리는 나는
애물단지 - P25

선글라스

이걸 쓰면

무지개도 흑백이다 - P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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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장소

주위를 둘러보았을 때 아무도 없었다
나는 나무와 나무 사이에서 별안간 생각에 잠긴다
희고 불어터진 나의 손이 앙증맞고 부드럽다는 생각짧은 팔과 오동통한 다리가 제멋대로 휘청거린다는 생각
공원의 한복판에 나를 방치한 채 백 년쯤 흘렀다는 생각
겹겹의 산 뙤약볕을 추격하는 참매미 울음소리

순박한 나의 부모들은 나무 뒤에 숨어서 희희 웃고 있다.
- P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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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활의 발견

너는 영원을 믿어서 난처한 사람
불편한 믿음을 간직한 사람
천사의 왼 다리를 우려 마시면
지긋지긋한 수족냉증도
영원토록 따뜻해질 거라 믿는
순진무구한 팔다리로
영원히 우족탕이나 휘저을 사람

오래된 공책의 측면처럼 입 벌린 어둠으로
너는 쏟아진다
커피 자판기가 되는 꿈을 꾸다가
버스 종점에서 우두커니 깨어난다

너는 운동화 속 돌멩이처럼
점차 또렷해지는 불편을 느낀다
때때로 태어나던 장면을 기억해 내기도 한다
가짜 진주알로 만든 천사의 의치 속에서
쨍그랑 깨지는 말실수

이마 위로 쏟아진 앞머리를 쓸어 올리면서 너는
그렇다고 아무거나 교양이 되는 건 아니잖아요
라고 말한다 - P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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흐미*

철옹성이 무너지네 단절의 벽이 무너지네 울음통이 출렁거리네

돌무덤 오워를 돌며 목울대를 세워 길 떠나는 검은 말을세우네

다문 입술 안으로 쟁여둔 더운 눈물이 제 안의 현을 두들길 때 문득 다가서는 너와 나와의 거리, 떠나간 이들이 손 내미는 한걸음의 거리

잠들지 않는 시름에 목젖은 붓고 명치 아래 통증은 깊어지네
마두금 두 줄 안에서 넘실거리는 강물
뿌리까지 붉게 물든 피뿌리꽃,

빗장을 열고 푸른 천상으로
낮고 깊은 내 안의 이야기를 토하네

꽃 피우고 꽃 진 자리
털어내고 길 나서네


• 흐미 khoomei : 몽골 투바족 전통 음악의 한 창법.
- P24

끌어당기기

몸 안엔 누구나 자석이 있다네요
말 한마디 걸지 않아도 끌어당기는 힘이 있어
사랑의 눈길로 당신을 지켜보면
왠지 절로 뒤돌아보게 된다네요

앞마당에 늦게 핀 배롱나무가
한여름 햇살 아래서 간지럽다고 몸을 비틀어요
배를 잡고 열일곱 살 계집애처럼 배실거려요
꽃분홍 살갗을 핥는 바람의 혀 때문에
배롱나무가 나를 끌어당기는 것일까요
내가 배롱나무를 잡아당기는 것일까요

내 발등으로 떨어진 이파리 하나
날 올려다보네요
안아달라고 보채는 아이처럼
밀당을 하자네요
끌어당겨도 내달리는 모순의 계절에 서서
배롱나무가 저리 손만 대도 웃네요
버틸 도리가 없다고요
- P34

붉은 모래, 키잘쿰

깔보지 마라
모래는 불멸의 꽃
사막에서 살아남은 유일한 생명체

하찮은 것에서
가장 단단한 살의로 견뎌낸 詩

맨발로 우는 붉은 모래
귀가 아프다
- P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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