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지먼트 - 복수를 집행하는 심판자들, 제33회 소설추리 신인상 수상작
고바야시 유카 지음, 이영미 옮김 / 예문아카이브 / 201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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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XX년. 흉악한 범죄가 날로 증가하는 일본에서 치안유지와 공평성을 중시한 새로운 법률이 만들어졌다. 그것은 바로 '복수법'이다. 복수법은 범죄자에게 당한 피해 내용을 고스란히 합법적인 형벌로 집행하는 법률이다.」


작가는 이런 극단적인 선택을 한 가상의 일본 사회를 세팅하고, 복수를 집행하는 사람을 감시하는 복수감찰관 '도리타니 아야노'를 주인공으로 내세웠다. 도리타니는 3년 간 복수집행자들을 가까이서 감찰하는 일을 하면서 이 일을 하기엔 자신이 너무 정이 많아 적성에 맞지 않는 것 같다고 느낀다. 심지어 그는 벼랑에 선 집행자들의 마음에 위안과 용기를 주기까지 한다. 집행을 볼 때마다 가슴이 무거워지고 안타까운 기분이 드는 도리타니. 3년의 업무 끝에 결국 그도 어떤 큰 결심을 하기에 이르게 된다. 이야기는 5개의 복수 집행으로 구성되어 있다.



-사이렌: 십대 아들을 죽인 열아홉 소년에게 복수를 가하는 아버지의 이야기 

-보더: 할머니를 살해한 손녀, 즉 자신의 딸에게 복수를 집행하는 어머니의 속 사정 

-앵커: 무차별 대량살인을 저지른 범죄자에게 동시에 복수를 허가 받은 세 복수집행자의 갈등

-페이크: 손자를 지키려다 그 친구를 죽인 영능력자와 피해자 어머니의 경쟁 

-저지먼트: 여동생을 아사해 죽게 만든 학대 부모에게 복수하는 열 살 오빠의 선택  



「누군가의 악의가 뭔가를 망가뜨리고, 망가진 사람은 그 분노를 또 다른 누군가에게 돌린다. 어쩌면 이 세상에 절대적인 타인은 존재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복수법을 선택한 순간, 집행자가 되는 인간의 마음에는 변화가 생긴다. 범인을 향한 증오뿐이었던 감정에 '내 손으로 죽여야 한다'는 강렬한 공포심이 덧붙는 것이다.」


「집행자 중에는 집행을 끝낸 후, 수형자와 똑같은 인간이 되어 버렸다고 한탄하는 사람도 있었다.」


살벌하고 건조한 공간인 '복수집행실'에서 가해자, 복수집행자가 보여주는 심리 상태에 대한 통찰이 돋보이는 소설이었다. 복수집행자는 소중한 사람을 잃은 원인을 가해자가 아닌 스스로에게서 찾는 심리상태를 보인다. 소중한 사람을 잃고나서의 후회가 복수하고 싶다는 분노와 겹치면서 집행자는 점차 형 집행을 주저하게 된다. 또 어떤 가해자는 실제로는 가해자가 아닌데도 겸허히 죽음을 받아들일 정도의 책임감을 느끼기도 하고. 어떤 가해자는 전혀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는 모습을 보여주어서 형 집행자의 결단에 박차를 가하기도 한다. 소설추리 신인장 작품이라고 하지만, 미스터리 요소 같은 건 거의 없고. 범죄를 주로 다루고 있는 소설 치곤 보기 드물게 상당한 휴머니즘이 느껴져서 인상적이다.  


「열 살짜리 소년이 복수집행자로 선택된 결과를 세간에 큰 문제를 불러 일으켰다. 게다가 수형자 중 한 사람은 소년의 친엄마다. 인권 단체는 비인도적이고 야만적인 행위를 정당화하는 악법이라며 격노했다.」


복수법. 피해자의 유족들 마음의 상처를 치유해주고자 만들어진 이 법은 그 목적과는 달리 유족들에게 또 다른 형태의 상처를 안겨준다. 살인자가 되는 것을 주저하는 유족들의 모습, 복수가 또 다른 복수를 낳는 모습 등은 복수가 무의미하다는 것을 암시한다. '앵커'의 등장인물이 "어린아이들은 무엇이든 용서할 수 있는 힘이 있다"고 말한 것에서 결국 진정한 강함은 '복수'가 아니라 '용서'가 아닌가 하는 점을 새삼 인지하게 한다. 남의 일일 때 우리는 이성적으로만 복수법을 판단하려 할 테지만. 우리들의 일이 되면 어떻게 될까. 종교, 신념, 피해자와의 관계. 이런 것들이 '도덕성'을 넘어서서 개인의 선택에 영향을 줄 것이다. 스스로가 어떤 선택을 내릴 것인가 상상해보니, 결국 하루하루 충실히 아낌없이 살아야 한다는 지극히 당연한 메세지를 떠올리게 되고 말았다. 사실상 개개인은 용서도 복수도 할 필요가 없는 평온한 날만을 기원하지 않을 수 없겠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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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ook] 잔화요란
오카베 에츠 지음, 최나연 옮김 / ㈜소미미디어 / 2017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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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카베 에츠의 소설 『잔화요란』은 인간 관계 뒤에 숨어 있는 부도덕한 비밀을 둘러싸고 여성이 성장해나가는 과정을 그린 성장 소설이다.  소설은 옴니버스 형식으로 되어 있으며 여섯 명의 여성이 서로 얽혀 있는 구도를 취한다. 가장 중심이 되는 주인공은 리카이다.  리카는 회사 상무와 내연 관계에 있다. 리카가 다니는 서예 교실에서 만난 친구 중 마키는 에로스 연애를 추구하는 커리어 우먼이고, 다른 한 명 이즈미는 무너져가는 부부관계를 겨우 지탱하고 있는 커리어 우먼이다. 미츠코는 리카의 내연남인 카시와기의 부인이며 남편의 내연 사실을 알고서 남편의 후배인 케이치를 리카에게 중매로 소개시킨다. 미우는 미츠코와 카시와기의 딸로, 엄마가 아빠의 내연 사실을 알면서도 아빠에게 맞서지 않고 비겁하게 중매를 선 것에 대해 불만을 품고 겉돌기 시작한다. 류코는 리카가 다니는 서옉실의 선생님으로, TV 출연을 할 정도의 실력가이다. 류코는 서예 지도를 통해 여자들의 심리적 동요를 잠재우고 깨달음을 주는 보조적 역할을 한다. 오카베는 표면적 모습 뒤에 숨겨진 시기 질투, 욕망이 근간이 되어서 각자의 이야기를 만들어간다. 옴니버스이지만 이야기는 매우 복합적으로 착착 진행되어 후끈한 열기가 넘치는 클라이맥스를 맞이한다. 이렇게 상징적이고 의미가 깊은 클라이맥스. 얼마만인지.

소설을 읽다 보면 리카의 결혼을 둘러싸고 결혼에 대한 다양한 시선이 교차하는 것을 알게 된다. 카시와기와 미츠코는 완벽한 쇼윈도 부부이고, 그런 부모를 바라보는 미우의 속은 소리없이 타들어간다. 이즈미 부부는 무시가 반복되는 거의 붕괴 직전의 관계를 보여주고, 마키는 결혼해서 남성에게 의지하는 여성은 시시하고 한심해 보인다고 생각한다. 리카는 카시와기에게 복수하기 위한 심정으로 결혼을 결정했기 때문에 결혼에 대한 인식 자체가 흐릿하다. 결혼의 의미나 여성의 사회적 지위에 대해서 논하는 게 중심은 아니지만 그런 주제를 둘러싸고 여자들이 보여주는 갈등과 불안한 감정들을 효과적으로 보여준다는 점에 주목하게 된다. 그런 위태로운 어른들의 모습에 경종을 치듯 미츠코가 숨겨둔 흥신소 조사보고서를 화로 속에서 내던진 미우의 행동은 매우 드라마틱했다.

감탄스러운 점은 분량에 비해 많은 인물의 이야기가 컴팩트하게 응축되어 있다는 점이었다. 리카, 마키, 이즈미, 미츠코, 미우, 류코. 여섯 명의 여성들이 서로 상당히 높은 개연성으로 얽혀 있다. 마키는 리카의 약혼남인 케이치에게 의도적으로 접근해 육체적 관계를 맺는다. 미우는 주변의 모든 어른들에게 대항심을 품고, '리카'의 이름으로 배우 활동을 하기도 한다. 카시와기 부부는 결혼을 한 리카 부부를 집에 초대해 천역덕스럽게 대접을 한다. 이런 얽힌 인간관계는 억지스럽지도 않고, 난해하지도 않다. 또한 모든 인물의 성향이 각기 다채롭고 풍부하다. 게다가 열일곱의 미우, 이십 대인 리카, 삼사십 대를 넘어선 중년의 마키, 이즈미, 류코. 다양한 연령대의 여성들이 보여주는 감정은 불안, 격정, 체념, 성숙 그 모든 면을 보여준다. 어느 인물의 이야기를 읽든 가슴 속이 아련해지거나 미어지는 것 같은 기분이 들 수 있다. 『립반윙클의 신부』를 읽고 너무 단조로운 구조와 엔딩에 대해 아쉬움이 든다고 리뷰한 적이 있는데, 그에 비하면 『잔화요란』은 옴니버스 소설의 장점을 최대한으로 살려 완성된 작품이란 생각이 든다.   

여자가 느끼는 감정의 라인을 얼마나 '공감가는 문장'으로 잘 정리하는가. 그것이 여성 소설가가 가진 무기가 아닌가 생각한다. 『종이달』, 『야행관람차』, 『잔화요란』 등 최근에 읽은 작품들은 모두 여성 심리를 은밀하면서도 치밀하게 잘 그려내고 있다. 『종이달』은 어떤 튕겨나감이 없이 매끄럽게 감정 라인을 고조시키는 게 인상적이었고. 『야행관람차』와 『잔화요란』은 연령대에 맞는 인물 성향을 현실적으로 묘사하는 게 인상적이다. 좋은 소설은 읽는 동안 계속 밑줄을 치고 싶게 만든다. 읽는 사람으로 하여금 자기의 과거와 현재를 돌아보게 한다. 『잔화요란』에서 태풍을 겪는 여주인공들은 클라이맥스를 거쳐 스스로가 납득하는 방식으로 매듭을 짓는 모습을 보고 독자도 어떤 결론을 내릴 수 있도록 격려가 될 것만 같다. 여운이 남고 생각할 거리가 많은 소설이다. 기대치 않게 감정 자극이 많이 된 작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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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텝
찬호께이.미스터 펫 지음, 강초아 옮김 / 알마 / 201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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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호께이의 스토리. 미국 오클라호마 주, 2023년. 죄수 형량제도라는 것이 실시되는데, 이는 재소자들은 그들의 심리 상태를 기반으로 형량과 출소가 결정하는 시스템이다. 컴퓨터 프로그램과 인공지능 기술 덕분에 완벽하다고 여겨지는 시스템. 하지만 이 시스템을 속이고 출소 판정을 받은 매슈 프레드라는 남자가 다시 끔찍한 범죄를 저지르게 되자 시스템 안정성에 비상등이 켜지게 된다. 


한편, 일본에서는 오클라호마 주의 죄수 형량제도를 차용한 시스템을 개발하는데. 마찬가지로 시스템을 속이고 출소한 청소년 범죄자가 자살을 한 사건이 발생한다. 조사관 료코는 탐정 페이 메이구를 찾아가 시스템을 속이고 소년의 탈주를 돕게 한 범인을 찾아달라고 의뢰한다. 그런데 이 페이 메이구에게는 시간을 몇 번이고 역행할 수 있는 초능력이 있는데...


4개의 챕터로 구성된 이 소설은 범죄소설, 추리소설, 그리고 SF 소설의 면모를 잘 보여준다. 특히 최근의 추리소설들이 SF를 기반으로 하고 있는 것에서 조금 더 나아가 SF를 지향하고 있다는 게 특징점이라고 하겠다. 특히가상세계, 평행세계가 등장하기 때문에 각 챕터는 현실이었다가도 다른 챕터에서는 '가짜'가 되기도 하는 점이 묘미이다. 


또 소재 자체도 미디어 매체에서 흥미롭게 다뤄오던 인공지능, 범죄 예측 시스템, 시간 여행, 기억 조작 등을 차용하고 있으니 흥미롭지 않다고 할 수 없겠다. 영화 <Ghost in the shell (공각기동대)>나 애니메이션 <싸이코패스>도 이런 소재들로 성공을 이루어낸 걸 생각하면, 소재 자체는 훌륭하다. 동일한 소재를 바탕으로 이야기를 같이 짜내려고 한 찬호께이와 미스터팻 두 작가의 콜라보도 박수칠만 하다.


그런데. SF소설을 읽을 때면 나는 늘 문장과 구조의 어색함 때문에 느껴지는 오글거림과 지루함을 참아내야만 한다. 나는 SF작가들이 소설에서 사용되는 과학적 지식이나 이론을 독자에게 설명하는 데에 너무 너무 공을 들이는 나머지 '소설'이 가져야 하는 맥락성을 잠시 잊고 마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적어도 찬호께이는 이런 맥락성은 잊지 않고 소설의 긴장감과 문장의 유려함을 유지한 채로 SF요소를 들이대는 데 성공했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미스터 팻의 소설은 복잡하게 꼬이고 어지럽혀진 수수께끼의 글에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문단 중간 중간에 암호 같은 소제목을 달아 놓고 그것의 정체를 알리지 않는다. 테이블 그림까지 동원하면서 자기가 말하고자 하는 트릭을 구구절절 설명한다. 그저 등장인물들의 이름과 대화, 스토리가 약간 섞여져 있을 뿐인 수수께끼 책이란 생각이 들어서 계속 지루한 감상이 들끓었다. '범죄자의 수기'의 형태를 취하고 있어 수수께끼는 상대적으로 적은 찬호께이의 챕터가 훨씬 '소설'로서의 매끄러움을 유지하고 있어 좋다고 보았다. 찬호께이 x 미스터팻의 콜라보레이션은 미스터팻에게 의문의 한 패를 안겨주지 않았나 하고 개인적으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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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사랑일까 - 개정판
알랭 드 보통 지음, 공경희 옮김 / 은행나무 / 200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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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유가 녹아 든 소설 형태의 글. 지극히 내 스타일의 문장이었다. 복잡하고 현란하면서도 사실은 무미건조한 문장의 연속이지만 밑줄 치며 읽게 된다. 


우린 "성격이 정반대인 사람들이 더 끌린다" 라는 말을 자주 하곤 하는데. 앨리스와 에릭 커플의 연애 양상을 보면 '정반대' 보다 더 복잡한 성격 유형의 특징을 보게 된다. 앨리스와 에릭의 취향 또는 성격에 대한 묘사는 단순한 '연애 지침서' 에서 볼 법한 것들 보다는 훨씬 디테일하다. (여기서 '소설'에서 기대할 수 있는 재미를 읽을 수 있었다.) 그래서 내릴 수 있는 결론은 앨리스와 에릭의 '사랑 방식'에 잘못된 점이 있었다기 보다는 그저 그것들이 맞물리지 않고 충돌하다가 튕겨져 나가는 형태를 취했을 것이라는 점 뿐이다. 보통은 연애가 잘 굴러가지 않고 끝을 맞이했을 때 무언가 '문제점'을 찾게 되는데 말이다. 앨리스는 마지막 장에서 에릭에게 그 동안의 수많은 경고 신호를 무시하고 자신을 방치한 것이 문제였다고 하며 종지부를 찍지만, 전적으로 에릭이 잘못되었다고 하는 것이 이 소설이 주고자 하는 결론은 아닐 것이다.

 

에릭과 데이트를 시작할 때는 "왜 안되겠어!" 하고 될대로 되란 식으로 돌진하던 앨리스가 에릭과 헤어진 후 보여주는 모습은 상당히 상반된다. 자신에게 좀 더 진중하고 젠틀하면서도 솔직하고 열정적으로 다가오는 필립에게 앨리스가 솔직해지지 못하는 건 에릭과 헤어진 충격도 있겠지만, 에릭과는 상당히 반대되는 접근방식에 있어서 당황하고 있는 듯도 보인다. 무엇이 의도이건 간에, 앨리스의 애매한 태도 속에서 느껴지는 건 또 상당히 다양한 사유가 나올 수 있는 연애가 앞으로 전개될 거라는 점이다. 제목이 묻고 있듯이. "우리가 사랑일까." 계속되는 의문을 남기면서. 그렇다면 연애 초반에 애리스와 에릭이 느끼던 불같은 감정이 반복되는 충돌과 희생 속에서 사라져 버리는 것을 보면서. 안정적인 연애에 도달하는 것이 얼마나 축복인 것인가 하고 유치한 감상을 얻게 되고 말았다만.

 

글의 형태 자체는 내 취향이었지만, 재미있었느냐고 묻는다고 그냥 그랬다고 하는 게 맞겠다. 주제에 집중하기 위해서, 연애나 사랑이 아닌 것과 관련된 사유는 전부 스킵해야했으니까. 좀 더 멋지고 좀 더 철학적이고 좀 덜 감정적인 (그러면서도 학자로서의 사유가 가득 한) 사랑 이야기를 읽었다는 점이 기념비적이다.




예술가가 수프 통조림이나 세제 상자의 미적인 성질을 드러내는 것은 구조적으로 같은 과정이 아닐까. 누군가 그녀의 작은 부분들을 제대로 봐주는 느낌을 경험할 수 있는 날이 오기를. 누군가 "당신이 ...... 하면 정말 좋아"하고 말해주면 외로움이 사라지고 그녀도 같은 반응을 보이련만. (p 14)


마침내 그녀를 행복하게 해주고 같이 있으면 편안한 사람을 만났다. 이제 파티에서 우울하게 어슬렁거리고 TV앞에서 저녁을 보낼 일이 없어졌다. 둘의 관계에는 과거의 연애에 뒤따랐던 불안감 따위는 없고, 그녀가 찬미하던 상식적인 안정감이 있었다. (p 43)


그녀는 이유를 분석할 수 없었지만. 에릭의 집 어두운 부엌에 앉아 있노라니 불현듯 극적으로 자신감이 사라져버렸다. 몇 분 전만 해도 어른의 세계에서 생존할 수 있는 힘을 갖추고 있다고 자신했는데. 발이 걸려 넘어지지 않고 필요한 역할을 할 수 있다고 자신했는데. 이제 모든 게 급속도로 해체되어 자책감과 혐오만 남았다. 그녀의 자신감은 늘 확인을 받아야만 자라는 불안전한 구조였다.-원하는 걸 얻거나, 누군가 자신이 좋아하는 사람의 사랑을 받으면 자신과 타인에 대한 믿음을 쌓을 수 있었다. (p 43)


자신의 강한 욕망과 빠른 진도에 스스로도 놀랐다. 한구석으로는 거부하고 싶은 마음도 컸지만 착한 여자는 어떠어떠해야 한다고 배워온 인습적인 도덕관념의 잔재에 순종하고 싶지 않았다. (p 51) 


하지만 에릭이 암시하는 시간의 틀은 극도로 짧아서, 일주일을 넘어가지 않았다. 앨리스는 미래가 더 분명히 보이기를 바랐지만, 그 남자는 연대기적으로 장래에 관계되는 위험스런 일은 쏙쏙 빠져나갔다. (p 55) 


그 남자는 돈에 관한 한 인심이 후했다-반지는 결코 싸지 않았다. 그러나 그 남자의 처신은 감정적으로 너그럽지 않았다. 그것은 앨리스의 5파운드짜리 치즈에 대한 빚을 갚으려는 인색한 시도였다. 에릭이 더 큰 선물을 주려는 것은 선물하는 걸 좋아하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감사하는 위치에 서면 자율성을 잃고 간섭 받게 되는 것을 싫어해서이기도 했다. (p.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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립반윙클의 신부
이와이 슌지 지음, 박재영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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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은 내버려진 여자들의 이야기이다. 지극히 평범한 행복을 바랬던 여주인공 나나미의 일상이 곤두박질 친 것은 지극히 순식간에 일어난 일들이었다.  


"원래는 평화로운 가정에서 평범하게 살아가던 주부였습니다.(p 184)"


부모의 이혼과 아버지의 무심함때문에 상처받은 소녀시절을 보낸 나나미는 연애와 사랑에 대한 환상을 가지지도 못한 채였다. 23살, SNS 페이지에서 만난 데쓰야와 만나면서 느끼는 순진한 감정들을 SNS 에 익명 닉네임으로 올리던 평범한 여자였다. 결혼을 하기로 하면서 데쓰오에게는 부모의 이혼 사실을 숨겼고, 결혼식에는 가짜 하객을 고용한 것도 숨길 수 밖에 없었다. 그리고 SNS 게시글은 결혼식 날 들켜버렸고, 거짓말을 한 사실도 곧 발각이 되어 나나미는 이혼을 당한다.


나나미가 이혼을 당하는 과정은 매우 강압적이고 폭력적이다. 나나미에게는 해명을 할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았고. 무엇보다 나나미가 알지 못할 뿐 끔찍한 배후가 있었다. 소설 속에서는 나나미에게 하객을 알선하고 여러 일을 소개시켜 준 '아무로'라는 남자가 실은 나나미의 인생을 뒤에서 조작한 악당이 아닐까 하는 의구심을 계속 조장한다. 읽는 사람으로 하여금 '나나미, 그렇게 순진해서 어쩌잔 말이야!' 하게 되도록. 


나나미가 도쿄에서 살아남기 위해 여러 고된 일을 하는 와중에도 성매매 만큼은 절대 할 수 없다고 하는 모습을 보면 이전에 봤던 여러 소설들이 동시에 떠오르기 시작한다. 연약하고 순수한 여자들이 남자와 사회의 폭력에 의해 거리로 내몰리고 결국 어쩔 수 없는 선택을 하게 되고, 시간이 흘러 닳을 대로 닳아 "나도 그랬었지"하고 슬프게 내뱉는 장면은 이제 너무 흔하단 느낌이다. 『립반윙클의 신부』는 이렇게 '내몰린 여성'들의 '교제'를 메인으로 하고 있다. 나나미가 남편에게 버려지는 부분은 소설에서 작은 부분에 지나지 않는다. 나나미는 AV 여배우인 마시로와 '하객알바'를 하다 친해지고, 이후 일상을 공유하면서 더 깊은 관계로 발전한다. 립반윙클이라는 건 마시로의 SNS 닉네임이다. 립반윙클의 신부는 마시로와 나나미의 관계를 상징하는 제목이다. 소설은 성별을 초월한 사랑의 감정이 발생할 수 있게 한 두 여자의 '배경'에 대해 여러 감상을 가질 수 있는 여지를 남기고 있다.


결말은 상당히 이중적이다. 나나미가 마지막으로 '당신을 위해 죽을 수도 있다'라는 감정을 마시로에게 비치자, 실제로 마시로는 동반자살을 시도하는데, 이것은 경악할만한 '폭력'에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말기암에 걸린 마시로가 "혼자 죽긴 무서워, 같이 죽을 사람이 필요해, 그러니까 친구를 '고용'할 거야"라는 본심을 나나미에게 숨기고 있었던 것을 알지 못하는 나나미는 죽어버린 마시로를 여전히 애처롭게 추억하고 있었다. SNS로 한 순간에 망친 인생 속에서, 가장 가까웠던 사랑인 마시로는 SNS에서 연결조차 되지 않았었다는 점을 감상적으로 여기면서. 이 부분이 소설의 정수가 아닌가 생각했다. 


이야기는 나나미의 감정에만 집중하고 있고 다른 캐릭터의 성향에 대해서는 설명을 자제하고 있다. 그런 것 치고는 인물의 캐릭터성은 그런대로 두드러진다. 특히나 아무로가 마시로의 장례를 위해 마시로 본가를 찾아갔을 때 보여주는 오열이나 비상식적인 노출 행위를 보고있자니, 일본 소설에서 흔히 보여지는 '이탈을 통한 슬픔 해소'를 또 한 번 보게 된 느낌이다. 그렇지. 마타요시 나오키의 『불꽃HIBANA』가 굉장히 비슷한 형태의 결말을 보여준다. 또 여자가 무너져가는 일상 속에서 어떤 선택을 하는지 보여준다는 점에서 가쿠다 미쓰요의 『종이달』이 연상되기도 했다. 베스트셀러에 오르거나 또는 상을 타는 소설을 보면 그 시대, 그 나라에 깔린 정서가 어느 정도 전해져 오는 것 같다. 계속해서 이런 정서가 유행하려는 걸까나. 개인적으론 그다지 취향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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