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슴도치의 소원
톤 텔레헨 지음, 김소라 그림, 유동익 옮김 / arte(아르테) / 2017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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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 이 고슴도치는 소극적인 모습을 보여준다. 마음 속으로는 누군가와의 관계를 갈망한다. 그러나 그 관계가 어떻게 진행될 것인가에 대해 이 고슴도치는 지나치게 고민한다. 다른 동물들을 초대하기 위한 초대장을 지웠다 썼다를 반복하고는 결국 서랍장 안에 봉인한다. 그러곤 혼자서 동물들이 자기 집에 놀러온다면 어떤 반응을 보일지 온갖 상상들을 한다. 동물들이 자기 가시를 보고 겁을 먹지 않을까, 가시에 상처를 입지 않을까 하고 끊임없이 고민하는 모습에선 자존감마저 위축된 것을 볼 수 있다.

겁나는 일이다. 그 동물들이 고슴도치와 어울리는 모습은 온갖 종류의 관계를 연상시킨다. 피곤하다. 곤란하다. 당황스럽다. 그래서 섣불리 누군가를 '받아들일 수 없게' 만드는 상상들이 이어진다. 지나칠 정도로. 그러면서 고슴도치는 혼란에 빠진 질문에 도달한다. 

『외로움은 내가 그렇게 되길 원하는 걸까고슴도치는 외로움이  원하는지   없었다나한테 원하는  뭐야가끔 어둠 속에서 지독한 외로움이 느껴지면 그는 이렇게 묻곤 했다.』

혹자는 이것을 상당히 철학적인 질문이라고 하였다. 누구나 이런 질문이 마음속에 떠오르는 일이 있다면, 나는 그 시기, 조건, 상황이 무엇인가에 대해 고민한다. 이것은 고슴도치가 지나치게 심약하기 때문이 아니라고 믿는다. 이미 많은 연구들이 인간의 성격이 환경에 의해 어느 정도 변화한다고 밝히지 않았는가. 

그렇게 심연에 빠진 시간들에, 우리는 고슴도치와 같이 된다. 숨는다. 그러면서도 갈망한다. 먼저 노력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는다는 걸 알면서도 쉽게 마음을 먹는 것은 어렵다. 스스로 한계를 짓고 경계를 만드는 것이 모든 가능성을 말살하는 가장 큰 저해요인이 된다고 할때. 그럼에도 그것을 그만두는 것이 그토록 어렵기에 헤르만 헤세는 데미안에서 '태어나려는 자는 알이라는 하나의 세계를 깨뜨려야 한다'고 말했을 것이다. 

<고슴도치의 소원>에서 상징적인 의미로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은 '겨울'이다. 겨울이 지나면 봄이 온다는 상투적 클리셰가 있기에 형성되는 메세지. 

읽으면서 결국에 이 지나친 상념들 뒤에 어떤 동물이 고슴도치를 찾아오게 될 것인가 주의하게 되는 것도 하나의 즐거움이다. 어떤 결말이 기다리고 있듯, 이 책의 정수는 '고슴도치의 모습이 우리와 다르지 않다'는 것을 음미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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쾌 : 젓가락 괴담 경연
미쓰다 신조 외 지음, 이현아 외 옮김 / 비채 / 202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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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포 소설 작가 중에선 미쓰다 신조의 작품,

형사 소설 중에선 찬호께이의 작품을 좋아한다.

근 10여년간 국내에 대만과 홍콩의 추리소설, 호러 소설들이 소개되고 많은 인기를 얻고 있다고 본다.

그 중 나를 홍콩 여행까지 하게 만들었던 찬호께이가 협력한 릴레이 소설 [쾌: 젓가락 괴담 경연]을 내돈내산으로 읽었다.

실려있는 작품의 순서는

〈젓가락님〉 미쓰다 신조

〈산호 뼈〉 쉐시쓰

〈저주의 그물에 걸린 물고기〉 예터우쯔

〈악어 꿈〉 샤오샹선

〈해시노어〉 찬호께이.

각 작품은 지역과 등장인물도 다 다르지만 서로 유기관계를 갖고 있다.

미쓰다 신조의 <젓가락님>에 나오는 젓가락과 관련된 괴담이 <악어 꿈>에서도 "일본에 이런 괴담이 있다더라" 하고 등장하고.

<저주의 그물에 걸린 물고기>에 나오는 귀신 신부 저주와 관련 인물들이

<해시노어>에서도 주요 인물로 등장한다.

이 작가들은 서로의 작품에 대한 구체적인 내용은 상의하지 않고, 필요한 최소한의 스토리와 설정만 전달 받은뒤,

주어진 공통 '소재'인 '젓가락'과 '산호'를 가지고 각자 이야기를 만들어낸 것 같다.

적어도 미쓰다 신조는 작가 후기에서 자신이 외국어를 읽지 못해 다른 작가들의 소설을 읽을 수 없는 것이 아쉽다며 번역본을 기다리고 있다고 덧붙인다.

용두사미의 반대말인 '점입가경'인 책이었다.

미쓰다 신조의 <젓가락님>은 소설 전체를 관통하는 '꿈과 관련된 괴담'을 소개 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미쓰다 특유의 '밀실 공포'와 의성어가 어루어진 단편이다. 도입부 역할로서는 나쁘지 않지만 특별한 감흥도 없다.

쉐시쓰의 <산호뼈> 는 퇴마 전문가와 의뢰인이 나온다는 점에선 개인적으로 교고쿠 나츠히코 스타일이 느껴졌다.

의뢰인이 썰을 풀면서 퇴마 전문가에 대한 의문점이 점점 생겨난다는 점에서 흥미로운 전개였다.

예터우쯔의 〈저주의 그물에 걸린 물고기〉는 휴대폰을 이용해 '귀신'이 인간과 소통한다는 부분에서 보면, 라이트 노벨 식의 느낌도 난다. <듀라라라>가 생각난 건 그래서였는지도. 그렇다고 해도 소재가 라노벨 격이란 거지, 전개나 등장인물의 캐릭터성은 충분히 볼륨감이 있었다.

샤오샹선의 <악어 꿈>은 미스터리한 요소보다도 추리소설의 성격이 강하다. 젓가락 저주의 비밀을 같이 파헤쳐 달라고 의뢰인이 찾아간 사람이 형사나 탐정이 아니라 소설 작가라는 점이 나름 독특한 설정이다. <악어 꿈>은 단편소설로로서 모자라지도 넘치지도 않는 평범한 작품이지만. 뒤의 <해시노어>의 주인공이 <악어 꿈>에서 조연으로 나오기 때문에 <해시노어>를 전개시키기 위한 밑밥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다. 작품간의 연결성을 유지하기 위해선 중요한 소설이었지만, 말한 것 처럼 개인적으로는 크게 재미있다는 인상을 받진 못했다.

<해시노어>는 "찬호께이 이 대단한 사람..." 이라고 감탄을 자아내게 만든다.

탐정을 자처하는 남자, 의뢰인, 그리고 이들을 돕는 보조이자 사건의 중심인 피해자. 이 셋이 펼치는 우당탕탕 추리 활극과 같은데.

활극 같다는 점에선 <산호뼈> 처럼 교고쿠 나츠히코의 작품을 떠올리게 한다. 특히 장미십자탐정 시리즈의 우당탕탕함이 느껴진다.

여기에 앞의 네 단편 소설보다도 더 웅장한 판타지성을 가미하였는데, 읽는 데 있어서 어색함이 전혀 없다.

<13.67>, <기억나지 않음: 형사>와 또 다른 스타일을 보여준 이 재밌는 사람 같으니.

이렇게 말하면 미안하지만 다른 작품들은 <해시노어>가 단편임에도 장편을 읽은 것 같은 느낌을 주도록 단단한 밑받침이 되어준 거라 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쾌: 젓가락 괴담 경연>은 점입가경식의 재미를 선사하는 모음집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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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ook] 일곱 번째 방
오쓰이치 지음, 김수현 옮김 / 고요한숨 / 202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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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전에 Zoo 로 출간했던 내용들을 ‘천재 오츠이치의 귀환‘ 이라고 하면서 단편집 제목까지 바꿔서 내면 뭐하자는 거냐고! 출판사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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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찾아줘
길리언 플린 지음, 강선재 옮김 / 푸른숲 / 201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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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일러 있습니다-


아내가 실종되었다. 결혼 5주년째 기념일날 아침에. 주인공 닉은 뉴욕에서 실직한 후 병든 부모를 간호하기 위해 뉴욕 토박이 아내 에이미를 미주리 시골 고향으로 데리고 내려온다. 고향 내 대학에서 강사자리를 잡고 아내의 전재산을 빌려 오픈한 바(Bar)를 운영하며 이주 생활에 익숙해지려던 즈음. 아내가 결혼기념일마다 했던 '보물찾기'의 단서를 남기고 사라졌다. 닉은 에이미가 실종되었다고 판단되자 경찰에 신고하는데, 경찰들은 닉을 유력 용의자로 보고 수사를 시작한다.


 


소설은 닉과 에이미 시점의 이야기가 교차적으로 나온다. 결혼 하기 전 연애 시절에 대한 회상과 미주리에 이사 하고 나서의 어색했던 적응기들이 덤덤히 나오는데. 이후로 갈수록 닉과 에이미가 감추고 있던 심리들이 매우 치밀하게 묘사되면서, 닉과 에이미의 어긋나는 일상들이 매우 숨막히게 다가온다. 즉, 닉은 에이미를 계속 일정한 자아상에 가두어 두고 그녀에게 충실하지 않으며 자신의 온갖 치졸한 짓들에 그럴듯한 변명을 들이대려 한다. 에이미는 계속 자신의 진정한 욕구-사랑을 원하는 나약한 아내의 목소리-가 거절당해 좌절하면서도 노력을 멈추지 않으려 한다. 노력? 그래, 그 노력이 닉을 크게 변화시킬 때까지. 


 


길리언 플린의 <나를 찾아줘>에 대해 알게 된 계기는 'STUFF Mom never told you'라는 팟캐스트 방송에서 '쿨 걸'이란 주제로 이야기 하면서 이 책을 언급한 것을 듣게 된 일이었다. (자, 스포일러 주의) 진행자들은 페미니스트들로 남성들이 사회적으로 만들어낸 '이상적인 여성상'인 '쿨걸'에 대해 길리언이 써낸 신랄한 문구를 방송에서 들려주었다. 그걸 들으며 내가 느낀 것은 심리학자 어슐라 누버의 저서 <나는 내가 제일 어렵다> 에 나온 여성 특유 심리기전을 에이미가 일부는 드러내고 있다고 생각했다. 바로 소셜 페르소나와 내면의 진실한 자아가 부딪칠 때 결국 침묵을 강요 당하고 말아 정신질병에 이르고 마는 여자의 모습. 아니나 다를까 <나를 찾아줘>를 실제로 읽다가 본문 중에서 '페르소나'라는 단어를 발견했을 때의 희열이란. (에이미의 독백 "하나의 페르소나를 고집하는 사람들은 지나치게 게으르거나 멍청해서 변신하지 못하는 것이다. ")  하지만 에이미는 수동적으로 무기력함에 빠져들지 않는다. 즉 울고, 의존적이 되는 그런 여성이 아니라, 자신의 욕구와 참자아가 거절당한 것에 대한 복수를 치밀하게 계획하여 자신의 '위대함'을 증명하려는 여성이 되려하는 것이다. 에이미는 여성들을 비판한다. 


 


"나는 오랫동안 ‘쿨한 여자’에 분노했다. 나는 남자들—친구들, 동료들, 낯선 사람들—이 그 끔찍하고 가식적인 여자들에게 열광하는 모습을 볼 때마다 그 남자를 앉혀놓고 차분하게 말하고 싶었다. 당신이 만나고 있는 건 여자가 아니다, 당신이 만나고 있는 건 그런 여자들이 실제로 존재하며, 자기한테 키스해줄 거라고 믿고 싶어 하는, 사회에 적응하지 못한 찌질한 남자들이 각본을 쓴 영화를 지나치게 많이 본 여자다."


 


"장담컨대 당신의 남자는 쿨한 여자를 원한다. 쿨한 여자란 기본적으로 그가 좋아하는 온갖 X같은 것들을 좋아하고, 결코 불평하는 법이 없는 여자다.나는 참을성 있게—몇 년을—기다렸다. 추세가 역전되어 남자들이 제인 오스틴을 읽기 시작하고, 뜨개질을 배우며, 〈코스모폴리탄〉을 즐겨 읽는 척하고 스크랩북 파티를 주최해 자기들끼리 잘 지내는 동안, 우리 여자들이 음흉하게 지켜보다 ‘그래, 그는 쿨한 남자야’라고 말하는 날이 오기를. 하지만 그런 일은 결코 일어나지 않았다. 오히려 온 세상 여자들이 합심하여 우리의 타락에 앞장섰다! 얼마 지나지 않아 ‘쿨한 여자’는 여자의 기준이 되었다. 남자들은 쿨한 여자가 존재한다고, 쿨한 여자가 백만 명 중에 하나 있는 꿈속의 여자가 아니라고 믿게 되었다. 모든 여자는 쿨한 여자가 되어야 했고, 그러지 않으면 그녀에게 뭔가 문제가 있는 것으로 여겨졌다. "


 


사실 에이미가 스스로 '내 참자아가 남편 닉에게 거절당했다'라고 느끼게 된 것은 닉의 에이미를 향하 태도가 차가워지기 시작했을 때이다. 닉은 결혼 후 3-4년 쯤이 지나 실직한 이후 모든 것에 비관적이 되어 욕설을 내뿜고 자신의 다른 역할(남편, 아들, 기타 등등)에 대해 무기력해도 된다는 무슨 특권이라도 얻은 것 처럼 치졸해지기 시작했다. 이런 부당한 것들을 참고 참다가 (그래, 에이미는 처음엔 쿨한 여자인 척 어느 정도 연기했다) 그에게 바른 소리(그러나 그들이 '주제넘다'라고 할)를 했는데 그때마다 닉은 뉴욕 상류층 출신인 에이미를 비꼬며 인격을 무참히 밟아대는 것이다. 가학적이다. 


 


"하지만 쿨한 여자가 되는 일은 매력적이다. 지기 싫어하는 나 같은 사람에게 모든 남자들이 원하는 여자가 되는 것은 매력적인 일이다. 닉을 만났을 때 나는 그가 원하는 것을 대번에 알아차렸고, 그를 위해서라면 기꺼이 노력해보겠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내가 잘못한 부분에 대해서는 비난을 받겠다. 중요한 건 처음에 내가 그에게 미쳐 있었다는 사실이다. 내게 그는 괴팍할 정도로 색다른, 착한 미주리 남자였다."


그 색다르고 착하며 작가라는 꿈에 대해 성실히 임했던 닉은 가학적인 남편이 되었다. 꼭 물리적 폭력이 있어야마 가학이라고? 자존감이 낮은 남자가 쌓이는 압박감과 자기 혐오를 견디지 못해 가장 손쉽게 공격해버리는 것이 바로 옆에 있는 아내이다. 그것은 엄연히 가학적인 폭력이다. 


에이미가 실종된 후 발견된 '보물찾기 단서'를 보면서 닉은 다음과 같은 분노를 느낀다. 


 


"지금의 에이미는 때때로 죽이고 싶을 만큼 화를 돋우었다. 내가 사랑했던 여자와는 조금도 닮은 구석이 없는 지금의 에이미에 국한하자면 말이다. 불과 몇 년 만에, 활짝 웃는 편안한 여자였던 예전의 에이미는 말 그대로 자신을, 몸과 영혼을 땅바닥에 내팽개쳤고, 현재의 새로운 에이미, 성가시고 신랄한 에이미로 나타났다. 나의 아내는 더 이상 내 아내가 아니라 내게 자신을 풀어보라고 부추기는 레이저 와이어의 매듭이었다. 나의 굵고 둔하고 신경질적인 손가락으로는 도저히 풀 수 없는 매듭. 촌놈의 손가락. ‘에이미 풀기’라는 복잡하고 위험한 일에 대한 훈련을 받아본 적 없는, 중서부 지역에 사는 평범한 사람의 손가락."


 


나는 닉 시점의 이 부분이 참 좋다. 바로 그는 자기 자신에 대해 아직 돌아볼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 바뀌어 버린 에이미가 모든 것의 문제라고 그는 생각한다. 적어도 그는 "1. 내가 왜 에이미의 자아를 더 잘 알지 못했을까, 이런 얼간이. 2. 내가 에이미가 변하게 만든 장본인이 아닐까?" 라고 생각할 수도 있었다. 그런데 이것은 사실 유전적으로든 후천적인 훈련의 결과이든, 우리가 '남성들'에게서는 흔히 보이지 않는 심리기전이라고 이미 증명이 되었다. 미국의 심리학자인 셸리 테일러Shelley Taylor는 진화론적 이론에 기초해 남녀가 스트레스에 다르게 반응한다고 주장하였다. 여자는 친화력을 써 스트레스에 대처하려는 한 편, 남자는 본능적으로 아예 맞서 싸우거나 혹은 도망가려 한다는 것이다. 


어슐라 누보는 이에 덧붙여, 남자가 감정적인 욕구를 숨기는 방식은 무관심하거나 공격적인 성향을 보이거나 분노하거나 일에 몰두하는 것이라고 언급한다. 그래서 화나는 일이 있거나 정체성의 위기에 빠지거나 나이드는 게 무서워지거나 어떤 문제의 해결책을 찾지 못해도, 배우자에게 힘들다고 터놓고 말하지 못하고 사소한 일을 꼬투리 삼아 비난을 퍼붓거나(“난 퇴근이 항상 너무 늦어서 피로하단 말이야!” “집안 꼴이 이게 뭐야?” “당신 요리가 왜 이렇게 점점 짜지는 거야?”) 가까이 다가오는 여자를 공격적인 태도로 대한다. 사회학적으로 보자면 남자아이가 홀로 자립하고 타인과 거리를 두는 일이 멋진 것이라고 배워왔기 때문이라는 의견도 있다. 그래서 남성이 타인과 너무 긴밀한 관계를 맺지 않기 위해 약자를 괴롭히거나 경쟁하고 우월함을 과시하는 등의 전략을 취한다는 것이다. 남성은 좀처럼 문제의 원인을 자기에게서 찾지 않고 외부적인 것들에서 찾도록 시스템화 되어 있다. 그리고 바로 그러한 점을 닉이 교과서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에이미의 완전한 팬이 되어 버렸다. 소설에서 말한 것 처럼 모두가 에이미를 보면 '어메이징'한 에이미에게 반해버리듯 나도. 하지만 나는 에이미의 소셜 페르소나가 아닌, 그것을 찢고 나온 에이미를 극찬한다. 닉으로 하여금 남자의 본성을 스스로 들여다보도록 훈련을 시켜 또 다른 '닉'을 만든 그 에이미를 대단하다고 여긴다. 자 스포일러. 결국 에이미는 닉과의 보금자리에 무사히 돌아온다. 닉은 에이미에게 말한다.


"에이미. 우리가 사랑에 빠졌을 땐 둘 다 우리 자신이 아니었어. 우리가 원래의 자기 모습으로 돌아갔을 때 우리는 독이었지. 우린 가장 더럽고 추악한 방식으로 서로를 완벽하게 해. 당신은 정말로 나를 사랑하지 않아, 에이미. 좋아한다고도 할 수 없어. 생각해봐, 에이미, 우리가 서로에게 얼마나 나쁜지를."


그것은 에이미가 (소름끼치지만) '친근성'의 전략으로 결혼 생활을 돌이키려 하는 전략과 정반대의 것이다. 이것은 셸리 테일러가 말한 '도망치기 전략'의 일종이 아닌가. '그래, 에이미. 인정해. 난 쿨한 너만을 원했고, 변한 너를 멸시했어. 그건 네가 증명한 것 처럼 내가 빌어먹을 인간이기 때문이지. 그 빌어먹을 인간인 나는 널 행복하게 해줄 수 없단 것 때문에 늘 낙담해왔고 그래서 사랑하길 멈췄어. 난 평범하고, 재미없고, 독선적인 머저리야. 그리고 넌 살인자야. 우린 서로에게 독이야'라고 말하는 듯 하다. 상당히 이성적으로 들린다. 그러나 에이미에게 그것이 이성적으로 들릴리가 없다. 에이미에게는 계속 해서 도망치는 닉이 한심하게 보일 수 밖에 없다. '닉, 넌 좋은 사람이 될 수 있어. 넌 도망치기만을 멈추면 되는 것이야. 넌 다른 쿨한 여자들로는 이제 만족할 수 없을 거야' 하는 그녀의 마음. 닉은 에이미의 이중성을 간파하였지만 에이미를 떠날 수가 없다. 그는 다음과 같이 독백한다. 


"그때 너무나도 이상한 생각이 나의 뇌 뒤쪽에서 앞쪽으로, 술에 취한 것처럼 덜걱거리며 나왔다. 눈앞이 캄캄해졌다. 에이미를 죽이면, 나는 뭐가 되지? 반작용을 할 에이미가 없으면 나는 무엇이 될까? 그녀의 말이 옳았다. 남자로서 나는 그녀를 사랑했을 때 가장 인상적인 사람이었다. 그리고 그녀를 증오했을 때의 내가 그다음으로 나은 사람이었다. 에이미를 만난 지는 겨우 7년밖에 되지 않았지만 나는 그녀가 없는 인생으로 돌아갈 수 없었다. 그녀의 말이 옳았다. "


'에이미가 없는 나는 무엇이지' 라는 질문을 한다고!!? 이것은 그 동안 '자립적이지 않고 의존적'이라고 낙인 찍힌 여성들이 주로 자문하는 것들이었다. 신뢰하고 의지하는 사람들을 떠올리며 ‘그가 없는 나는 누구일까?’ ‘너 없이도 내가 살 수 있을까?’라고 고통스럽게 반추하는 그것 말이다. 그런데 닉이 그 끔찍한 일들을 다 겪고 에이미가 돌아왔을 때 이렇게 자문하고 있다. '쿨한 여자'를 만드는 영화를 많이 본 남성의 대표격인 닉이. 이것은 '쿨하지 않은 여성' 에이미가 혁명을 이끌어낸 것과 같이 보여진다. 에이미는 혁명가다! 미안, 동시에 그녀는 범죄자다. 그래도 한 남자로 하여금 스스로를 돌아보게 했다는 점은 지금 같은 시대에 '혁명적'이라고 하지 않을 수가 없다. 재치있다. 기발하다. 길리안 플린! 그러나 조금은 씁쓸하다, 난 길리언이 남자이길 바랬다. 만약 그랬다면 나는 내가 평소 '무라카미 하루키'가 풍기는 자기혐오의 분위기를 조금은 상상해볼 수 있었을텐데. 그러고 보면 에이미는, 그 수수께끼로 가득 찬 여자는 무라카미 하루키의 몽환적 소설들 같다. 실타래 같은 여자. 그 진수를 알 수 없는 여자. 



그러나 이렇게 자신을 돌아보게 된 닉.  "에이미는 독이지만 나는 그녀가 아예 없는 세상을 상상할 수가 없었다. 에이미가 사라져버리면 나는 무엇이 되겠는가? 내게는 더 이상 흥미로운 선택지가 없었다. 하지만 그녀를 굴복시켜야 했다." 하지만 그 결과는 조금 슬프다. 자신을 돌아보게 한 여성에 대해 닉이 갖는 감정은 경외도 존경도 사랑도 아니다. (뭐라고 해야 할까.) 그는 에이미에게 더욱 더 무참히 부서지게 되는 것을 두려워하며 비위를 맞춰대야 한다. "아내의 심기를 건드리지 않았다고 확신하기 위해 우리가 나눈 대화를 다시 떠올려보는 남자가 되었다. 나는 아내가 나를 테스트할 때를 대비해 그녀의 하루, 그녀가 좋아하는 것과 싫어하는 것을 모두 기록한다. 나는 훌륭한 남편이다. 아내가 나를 죽일까 봐 두려워하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닉은 새로운 국면을 맞이한 가정에 대해 충실한 사람이 될 수 밖에 없는 인간이 된다. 자 스포일러! 바로 좋은 아버지가 되기로 한 것. 어린 시절부터 아버지의 정신적 학대 속에 비뚤어진 마음을 품고 있던 그가, 이제는 자신이 그 아버지의 잔상을 이기고 자신은 정말 더 나은 그 무언가가 되기로 결심하는 과정. 에이미가 자신이 표현한 것 처럼 부모에 의해 '어메이징 에이미'로 억지 소셜 페르소나를 키워왔어야 했다면. 이 모든 걸 통해 에이미는 이번엔 새로운 무언가를 창조했다. 새로운 닉을 완성시켰다. 이전과 전혀 다른 닉! 닉이 스스로를 경멸하게 될 자아상. 게다가 에이미가 아주 영리하게 닉을 자신의 영원한 그 무언가 (남편? 동반자? 적대자? 노예? 혹은?)로 만들어가는 과정(임신)은 스릴러 소설의 정점을 찍는다. 이 일그러진 형태! 


하지만 에이미는 그런 닉을 창조했고, 그가 순순히 좋은 아버지 노릇을 하는 것을 보게 되겠지만. 슬프게도 그것이 '순수한 사랑'에 근거한 것이 아니란 점은 상당히 씁쓸한 일이다. 그 씁쓸함을 잊기 위해서 나는 질문해본다. 만일 닉이 그런 얼간이가 아니었다면, 언제나 에이미의 기분을 맞추는 숭배자(요컨대 소설 속 에이미의 전 동성, 이성친구들 같이)로서 기능해왔다면 에이미가 그에게 집착하는 일이 있었을까. 에이미가 감히 자신의 비위를 거스른 사람들에게 처절한 복수를 해왔던 것과 마찬가지로, 이번엔 닉을 계속 '상냥히 행동하는 남편'으로 기능하게 두는 형벌을 내린 것이 아닌가.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이걸 단순한 사이코패스 계집과 결혼한 남성의 수난기라고 해야 할까. 좀 더 나아가서 보면 이런 일그러진 형태로 밖에 사랑을 하지 못하는 여성과 남성의 역학관계를 그리기 위해 범죄와 미스터리 요소를 조금 추가한 이야기라고 평가할 수 있지 않을까. 그리고 그것은 일반화될 수 있는 현상이 아닐까. 


나는 말하고 있다. 겉보기에 화목하고 아름다워 보이는(소설 속 에이미의 부부 같은 관계) 관계는 비교적 균등한 희생, 헌신, 배려에 기초해 있다고. 그것에 반기를 드는 전통적 남성상과 쿨하지 않은 여자는 실은 온전히 공존할 수가 없다고. 공존하는 방법은 그저 한 쪽이 통제 불가능할 정도로 권력을 몰아 쥐는 것이라고. 그리고 전통적 관계와 다르게 닉과 에이미의 관계에서 그 권력을 쥔 건 에이미다. 닉은 에이미를 두려워하는 것과 동시에 그런 에이미가 없는 자신이 무엇이 될까 이미 혼란스러워진 것이다. '묶여버림'. <나를 찾아줘> 라는 말은 '에이미를 찾아줘'가 아니라 '닉을 찾아줘'가 될 수도 있다 (영제는 Gone Girl 이라 닉에게 적용할 수 없지만). 


닉은 "당신은 매일 아침 당신이 되어야 하니까" 하고 비꼬며 묶여 버린 자신이 보여주는 상냥한 남편상의 근원이 무엇인지 에이미에게 말한다. 그것은 권력을 틀어 쥔 '쿨하지 않은' 에이미이다. 닉! 그 동안 소외되어온 여성, 아내, 어머니의 세계에 온 것을 환영한다! 어쩌면 이것이 무한한 희생과 헌신에 부당함을 느끼는 여성들이 미래에 향유해야 할(하지만 그럴 능력이 없어 닉이 제안한대로 갈라서는 결말을 맞이할 만한) 그런 형태의 관계가 아닌가 상상한다. 전통적 남성우월주의자 남편들이 노예로 기능할 아내를 원해왔듯이, 노예로 기능할 남편을 만나는 것만이 이들, 쿨하지 않은 여성들을 행복하게 할 수 있다. 그것도 '날때부터' 지닌 순종성을 보여주는 남성이 아닌, '당신은 날 이렇게 만드는 여자야' 라고 만족감을 느끼게 해줄 그런 남성 노예들. 자, 내가 너무 멀리갔는가? 그래도 나는 닉과 에이미를 사랑한다. 


에이미의 부모 같은 남녀 관계는 이상적이지만 소설의 주인공은 될 수 없다. 대개의 '스토리'를 가진 남녀는 사실상 공존이 불가능하지만 그래서 강렬한 케미를 갖고 있다. 길리안은 닉의 '질문'을 통해 비공존성 관계에 대해 어쩌면 매우 핵심적일 질문을 던지기라도 하는 듯 하다. 그 동안 많은 부부들의 어느 한 쪽은 생각해보지도 않았고 다른 한쪽만이 끊임없이 자문했을 질문. 그리고 그 질문을 남편인 닉이 하고 있는 것이 좋다. 



"나는 다음의 질문이 세상의 모든 결혼 위에 먹구름처럼 떠 있다고 생각한다. 당신, 무슨 생각 하고 있어? 뭘 느끼고 있어? 당신은 누구지? 우리가 서로에게 무슨 짓을 한 걸까? 앞으로 무슨 짓을 하게 될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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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그녀를 사랑했네 - 개정판
안나 가발다 지음, 이세욱 옮김 / 북로그컴퍼니 / 2016년 12월
평점 :
절판


 

 

남편 아드리앵은 아내 클로에와 자식을 남겨놓고 내연녀와 비행기를 타고 도피한다. 마음이 병든 클로에의 곁에서 시아버지 피에르가 그녀를 달래지만 클로에는 무뚝뚝하고 고집스러운 피에르의 말들을 들을 정도로 추스리지 못한 상태다. 그녀는 남편에 대한 배신감은 물론 삶의 불합리함과 허무함에 대한 분노에 휩싸이고 있다. 남편에 대한 믿음을 당연시 했던 결과가 이 불행의 이유라 믿고, 감정에 솔직했던 자신에 대한 혐오감을 느끼고 있다.


피에르가 자신에게도 인생의 진짜 사랑, ‘내연녀’가 있었음을 고백하기 시작하자 드디어 클로에가 관심을 보인다. 피에르는 아내 쉬잔과 열렬히 사랑을 해서 결혼한 것이 아니라, 떠밀리듯 결혼한 것이었다. 나이 마흔다섯이 돼 만난 서른살의 마틸드라는 여자는 그에게 살아있는 감각을 처음으로 알려준 여자였다. 5년간 밀애가 지속되는 동안 피에르는 두 여자의 마음에 상처를 주고 있다는 사실에 스스로도 지쳐갔으나 마틸드를 떠나보낼 자신이 없었다. '나도 당신처럼 내가 원할 때만 당신을 찾을 거예요' 라고 슬픈 선택을 해버린 마틸드에게 차라리 안도감을 느낄 정도의 능구렁이였다. 피에르는 자신이 얼마나 비겁하게 살았는지, 그래서 어떻게 두 여자의 인생을 망가뜨렸고 자기 인생조차 망쳤는지 클로에에게 말한다. 피에르는 자신의 비열함을 인정하고 마틸드를 택하지 않은 것을 후회하기에 아드리앵에게서 경탄과 아픔을 동시에 느낀다. 아드리앵은 타협이 아니라 원하는 선택을 한 것이다.

피에르는 삶을 엉킨 실타래에 비유한다.


"어떤 실 하나를 잡아당겨야 하는데, 어느 걸 잡아당겨야 할지 모르겠구나. 어디서부터 매듭을 풀어나가야 할지 모르겠어. 아 이런, 이거 되게 복잡하군…….”



그는 '누구에게나 잘못을 저질러야 하는 때가 온다'고 말한다. 그리고 그 때 선택하는 건 자신이다. 마틸드를 선택하지 않은 건 피에르 자신의 인간성을 반영하는지도 모른다. 피에르는 온갖 타협, 수긍을 거치고 잘못을 저지르지 않는 삶에 대해 “얻는 건 비겁자라는 낙오, 아쉬움, 회한 뿐!” 이라고 격앙한다.

남편이 떠나고 남겨진 클로에가 삶에 회한을 느끼는 것을 보며 피에르는 "삶은 우리보다 강하다" 고 말하며 "그래서 매일 더 행복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고 위로한다. 그는 슬픔에 빠진 클로에가 딛고 일어서서 더 찬란한 삶, 누려 마땅한 행복을 느끼길 바란 마음에서 "이 모든게 차라리 잘된 것 같다" 고 당장은 이해되지 않는 말을 한다. 이 고집쟁이 늙은이의 말이 클로에에겐 당신의 아들에 대한 옹호로 밖에 들리지 않는다.


"좋은 게 좋은 거라는 식의 아버님 말씀은 더 이상 견딜 수가 없어요. 인정이 너무 많으셔서 아드님을 그토록 감싸고도시는 아버님을 더 이상 견딜 수가 없다고요."


교차되는 관계 속에 상반되는 결정. 어떻게 해도 결국 실은 엉켜져 있을 뿐이다. 피에르의 말처럼 당길수록 더 엉켜갈 뿐이다. 피에르와 아드리앵의 선택은 달랐으나 그 고통의 정도는 같을 것이고. 아드리앙의 내연녀는 언제든 마틸드 같이 될지 알 수 없는 일이다. 계속 무기력하기를 택한다면 마틸드는 '거짓투성이의 귀부인'인 쉬잔과 같아질지 모른다. 피에르의 형이 상사병에 걸려 전쟁터에 나가 죽은 것도 무시할 수 없다. 사실은 모든 실타래의 근본에는 사랑이라는 불가항력의 현상이 자리 잡고 있는지도 모른다. 마지막에 클로에가 묻는다. "그러고 보면 사랑은 바보같은 짓이에요. 그렇죠? 제대로 되는 법이 없잖아요?"


삶은 우리보다 강하고, 우리 노력은 물거품같지만. 늙은이가 보기에 인생은 '한 번 좌절했다고 포기하기엔' 애틋한 것일지도 모른다. '지나간 것'에 대한 회한은 시간이 지나야 알 수 있는 것이란 말이 하고 싶은 걸까. 마지막에 피에르가 말한 딸과의 일화는 그것을 대변하는지도 모르겠다. 젊은 시절, 피에르의 어린 딸이 아빠와 빵집에 들어가 함께 빵을 사서 나왔다. 길에서 딸 크리스틴이 빵의 꽁다리 부분을 달라고 하지만 피에르는 식사시간에 주겠다며 거절한다. 그러곤 식사시간, 딸의 접시에 꽁다리를 놔주자 딸은 그것을 동생에게 넘겨 버린다. 아까 먹고 싶다고 하지 않았느냐고 묻자 딸이 말한다. "아까는 먹고 싶었어요." 피에르는 클로에가 아닌 부엌의 가구들에게 묻는다. "그 고집스런 딸은 좀 더 행복한 아빠랑 살기를 바라지 않았을까?"


무엇보다도 클로에가 우울한 상태로 내뱉는 심정과, 담담히 그녀를 위로하며 자기 인생을 돌아보는 피에르의 말들이 일종의 '위로의 문구'들로 다가갈 수 있겠단 생각이 들었다. 이 책이 전세계적으로 유명해진 이유가 이것때문이 아닐까. 사실은 작가가 말하고 싶은 건 선택이니 뭐니, 불륜의 옹호니 뭐니 이런 게 아니라 오히려 그런 '문장'들이 가지는 위로의 힘이었는지 모르겠다. 순간순간 어루만질 수 있는 그런 말들 말이다. 절망의 순간에 붙잡고 싶어지는 그런 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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