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방 주인
레지 드 사 모레이라 지음, 이희정 옮김 / 예담 / 2014년 3월
평점 :
절판


책이 갖는 신비성과 그 책을 다루는 북 마스터인 책방 주인이란 얼마나 멋진지. 생각만 해도 책쟁이의 어떤 로망을 불러일으키는데. 그런 낭만을 꿈꾸고 레지 드 사 모레이라의 「책방 주인」을 폈다가 기대했던 것과 다른 것을 읽고 말았다. 원래는 「어디에나 있고 어디에도 없는 책방에서 자신이 읽어본 책만 파는 책방 주인」이란 긴 제목의 책인데. 이 제목에서 나는 손님의 사연에 맞춰 적절한 책을 추천하고 인생에서의 교훈을 일깨워주는 인자한 책방 주인이 나올 거라 기대했건만. 「책방 주인」에 나오는 중년의 책방 주인이야말로 오히려 따스한 치료가 필요한 인간이 아닌가 싶다.

자격지심이나 큰 상실감을 비뚤어진 우월 의식으로 포장하고서는 다른 사람에 대한 무례를 드러내는 옹졸한 인간상을 여러 작품에서 보게 된다. 등장인물들은 그게 병이라는 걸 직시하지 못하고 현실에서 도피해 '고상한' 집착 대상을 만든다. 책방 주인에게 있어 책이 그런 대상인 듯하다. 이성과의 친밀한 관계가 결핍되어 있기 때문에 과도하게 책에 대한 애정을 쌓고 그 안에서만 안정을 얻는다. 그런데 사실 그가 직시 하지 않다 뿐이지, 책은 애증의 대상일 수 밖에 없다. 책 읽다가 나체의 여인의 환상을 보며 욕정을 느낀 후에는 또 다시 맹렬하게 책에 열중하려는 증상을 보인다. 책은 그에게 있어서 도피처인 동시에 실은 벗어나고 싶은 도착 대상일지도 모른다. 책에 대한 그의 애정이 순수해 보이는 부분들도 있다. 하지만 밀폐 공간 에서 계속 손님 드나드는 '뿌득뿌득'하는 문 소리에 신경쓰는 그의 심정이란 어떤 걸까. 그야말로 누군가에게 책을 추천하기엔 결핍된 부분이 너무 큰 인간이다.

이 책은 여러가지 함축된 의미를 간결한 묘사 속에 숨겨 놓고 마치 철학적인 질문과 사색을 하게 만드는 게 프랑스 소설의 특징이라는 선입견을 남긴다. 읽던 책의 한 페이지를 찢어 형제 누이들에게 편지를 보내는 책방 주인의 이상심리는 무얼 의미하는 걸까. 그의 과거 속 세 여인들은 누구며, 그녀들의 '마지막 페이지 집착증'은 무얼 의미하는가. 저승사자를 연상시키는 낫을 든 검은 손님. 끊임없이 책방을 찾아오는 여호와의 증인. 성적인 매력을 풍기는 꽃집 여주인. 고풍스러운 남작부인들은 누구인지. 꼭 생 텍쥐베리의 「어린왕자」에서 특정 대상을 단적으로 드러내는 인물들이 생각난다만. 대체 이 괴상한 손님들의 의미하는 바가 뭔지 쉽게 캐치되지 않는다. 이미 의미를 찾을 필요조차 없을지도 모른다. 평론가 샤를 단치의 글을 읽고 알게 되었지. 이 시대 명작가들 중 일부는 문장 속에 자기만 알아볼 수 있을 법한 비밀과 환상을 숨겨놓고는 명작 행세를 한다. 그렇다면 아마 나는 프랑스 소설에는 익숙해지지 않을 거야. 프랑스 작가들 중 일부는 일부러 퍼즐과 수수께끼를 만들어놓고 자기 세계를 이해할 뮤즈가 나타나기를, 그리고 그런 사람들만이 자기와 함께할 가치가 있다고 믿는게 아닐까. 나에게 이런 류의 소설은 엠마뉘엘 베르네임이 마지막이었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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