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 빛 미스터리, 더 Mystery The 5
이누이 루카 지음, 추지나 옮김 / 레드박스 / 2014년 2월
평점 :
절판


이누이 루카 <여름 빛>이란 책 표지를 보는 순간 떠오르는 책이 있다. 2012년에 출판사 프라하에서 먼저 출간된 <혈안>이다. <혈안>은 일본 거장 미스터리 작가 9인의 단편을 모은 모음집으로, 표지에는 무수한 눈알들을 비추고 있는 커다란 붉은 색 눈이 핏기 없는 표지 위에 덩그러니 그려져 있다. <여름 빛>의 표지의 파란 눈 역시 무언가를 비추고 있다. 냉소적인 눈빛을 보며 이누이 루카가 어떤 '호러'를 썼을지 궁금해졌다. 

<여름 빛>은 1부 눈 입 귀, 2부 이 귀 코 두 부분으로 구성된다. 눈 입 귀 파트엔 「여름 빛」, 「쏙독새의 아침」, 「백 개의 불꽃」, 이 귀 코 파트에는 「이」, 「Out of This World」, 「바람, 레몬, 겨울의 끝」이라는 단편이 각각 실려있다. 

「여름 빛」은 전쟁으로 인해 가족과 떨어져 친척집에 얹혀 지내는 소년 데쓰히코의 이야기다. 동네에는 얼굴 한쪽의 반점 때문에 저주 받은 아이 취급을 받는 다카시라는 소년이 있다. 데쓰히코는 다카시의 한쪽 눈이 때때로 푸른 불빛을 발하는 걸 발견한다. 그러다 둘은 동네 사람들의 핍박을 받는 암담한 현실에서 벗어나기 위해 무작정 기차에 오른다. 이들의 행선지에 어떤 미래가 예견되어 있는지 예감하는 다카시의 모습을 그려낸 작가의 필력이 압권이다.

「쏙독새의 아침」은 요양차 어느 의원의 저택에서 하숙하게 된 대학생 이시쿠로의 이야기다. 이시쿠로는 저택에서 늘 마스크로 입을 가리는 아리따운 소녀 '아키코'를 보고 반하게 되지만, 의원 구와타 부부에겐 소녀가 보이지 않는 듯하다. 저택에선 이따금 쏙독새의 괴상한 울음소리가 울려퍼진다.

「백 개의 불꽃」은 어여쁜 동생 마치를 질투하는 못 생긴 언니 기미의 이야기다. 기미의 귀 앞엔 작지만 움푹 파인 구멍이 있고, 기미는 이것이 '액운'의 관상이라 생각한다. 기미는 액운을 미운 동생 마치에게 넘기기 위해 외딴 동굴에서 백 일 동안 양초를 한 개씩 태우는 의식을 한다. 백 개의 양초가 다 탄 날, 마치에게 화마가 덮친다.

「이」에선 두 건장한 남자가 생선 전골을 맛있게 끓여먹는다. 구마노미치는 먹으면서 자신의 오른팔을 잃어야 했던 사건에 대해 남일 이야기 하듯이 털어놓기 시작한다. 어느 축제에서 금붕어 낚시를 통해 잡아온 금붕어가 화근이었다고 한다. 전골을 요리하는 뜨겁게 김 서린 주방의 분위기와 식욕, 괴생물과의 사투 장면에 대한 묘사가 매우 실감난다.

「Out of This World」엔 마술사 아버지의 탈출 마술 실패로 인해 몸에 화상을 입은 소년 다쿠가 등장한다. 다쿠는 아버지의 실패 이후 전학온 시골 마을에서 소년 마코토, 아키히코와 우정을 쌓아간다. 다쿠는 귀에서 또로롱 하는 방울 소리를 내고 공중부양을 하는 기묘한 능력을 갖고 있었다. 아버지는 다쿠를 학대하는 듯하지만 다쿠는 아버지에게 마술을 배우던 즐거운 시절을 그리워하고 있다. 여름 방학. 다쿠는 파일럿이 되고 싶은 다쿠에게 자신처럼 하늘을 나는 경험을 선사한다. 

「바람, 레몬, 겨울의 끝」에서 노인 요양 보호사로 일하는 아야코는 '냄새'로 사람의 감정을 읽는다. 죽음을 앞둔 중년 여성 하쓰에에게서 나는 레몬 향기는 어린시절을 떠올리게 한다. 아버지와 함께 인신매매 업에 종사할 수 밖에 없게 된 열다섯 소녀 시절의 일이다. 그 때 장기 매매 거래가 성사되기 전까지 자기 집에서 감시 해야 했던 외국인 소녀 '츠마'와의 일이었다. 츠마에게선 죽음의 냄새가 아니라 풀과 레몬의 향기가 끊임없이 났다. 아야코는 하쓰에를 통해 츠마에게서 나던 냄새의 수수께끼를 알게 된다. 


1부는 고전 시대를 배경으로 하고 있어 에도 기담으로 유명한 미야베 미유키 여사를 연상시킨다. 그런데 2부는 현대를 배경으로 사람들의 어두운 일상 또한 흥미롭게 그려내고 있다. 각 부가 얼굴을 이루는 요소를 소재로 상상력을 발휘하고 있는 것도 독특한 구성이다. 무엇보다 모든 작품에서 이누이 루카의 뛰어난 감정 묘사력에 감탄하게 된다. 작가는 소년소녀, 성인 남녀 등 다양한 대상의 인간 심리를 깊게 이해하고 있다. 특히 각 인물이 처하게 되는 기기묘묘한 상황 설정 또한 고전적이면서도 참신한 결말을 보여준다. 소년의 성장 과정을 그린 듯한 「여름 빛」이 순간 사회소설로 변하는 대목은 소름이 돋는다. 고저택에 사는 유령소녀는 서양 유령저택 소설을 떠올리게 한다. 저주 의식과 자매의 비극이란 소재는 동화를 연상시킨다. 괴생물과 기묘한 식욕 탓에 드러나는 그로테스크한 인간 본성은 아야츠지 유키토의 「안구기담」과 비교해도 손색이 없다. 마술사같은 인생을 사는 불행한 소년의 이야기는 어린시절에 대한 신비롭고 어렴풋한 향수를 자극한다. 인신매매 범행에 가담한 소녀 시절의 기억을 불현듯 떠올리게 한 소재가 '냄새'였다는 설정도 얼굴 요소를 소재로 한다는 전체적인 책 구성에 있어서 위화감이 없이 작품에 잘 녹아들고 있다. 이런 흥미로운 구성들 안에서 애처롭고 안타까운 감정들이 스르르 녹아내리고 있는 것이 이 작가의 특징인가보다. 일종의 치유 효과를 주기까지 한다. 이누이 루카에게 "강림"이란 탄사를 보낸 건 과한 처사는 아니었을 거다. 다만 '여왕'이라는 단어는 잘 모르겠다. 호러 분야에 첫 등장한 사람에게 바로 여왕의 자리를 내주는 건 너무 파격적인 대우는 아닐런지. 이후에 나온 작품들도 호러 자체보다는 환상 소설 장르에 속하기 때문에 '호러 여왕'이란 별명이 이누이 루카에게 정착되기는 쉽지 않아 보인다. 

이누이 루카의 2010년 나오키 상 후보작 <그 날로 돌아가고 싶어>가 2015년 말에 국내에 출간되었다. 기세를 몰아 같은 시기에 <숲에 소원을 빌어요>라는 작품도 번역 출간되었다. 시간을 여행하고 추억을 되찾고 기원을 하는 등 환상적인 내용들을 담고 있다고 한다. 왠지 히가시노 케이고의 <나미야 잡화점의 기적>을 연상시키고 있어, 어서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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