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서기담
시부사와 다쓰히코 지음, 임명수 옮김 / 어문학사 / 2015년 12월
평점 :
절판


 

 

 

아주 어려서 초등학교 중저학년일 무렵에 서점에 가면 꼭 페이지를 펴보게 되는 마성의 책이 있었다. 요지경 박물관 시리즈 "아니 어떻게 세상에 이런 일이"다. 세계 곳곳에서 실제로 있었다고 하는 기이한 일들을 실물 사진을 일일히 곁들여 소개 하고 있었다. 손가락이 6개인 남자, 심심치 않게 목격되는 UFO와 외계인 사체, 사람의 발 같이 생긴 걸 달고 있는 대왕 조개, 다양한 괴 생명체, 매연 연기가 악마의 얼굴을 정확히 묘사한 일, 자기 장례식 장에 참석한 유령의 사진 등등. 일부 사진은 꽤 그로테스크한 것들이었기 때문에 당시 어린이였던 나는 겁이 나지만 너무 궁금해서 책 페이지를 살금 살금 들춰봐야 했다. 지금 생각하면 얼토당토 하지 않은 허무맹랑한 글들도 과장되어서 쓰여져 있지 않았을까 싶다. 

어문학사에서 「동서기담」이란 책이 나왔단 소식을 들었을 때, 나의 두근거림은 말로 표현하지를 못하겠다. "기담" 이란 글자는 기담과 괴담에 대한 기호가 어릴 적 부터 형성된 거라고 스스로에게 특수한 성질을 부여하게 만든다. 그런 해석은 자꾸 나를 기담에 이끌리게 만든다. 

그러나 출간된 책 표지를 인터넷에서 본 순간 솔직히 실망했다는 게 사실이다.

 

 

 

도안, 그리고 특히 동서기담이란 글씨체 모든 게 너무 옛스러웠다. 왜인지 「동서기담」도 항간에 떠도는 뜬소문들만 잔뜩 늘어놓는 게 아닐까 하고 먼저 우려하게 됐다. 그럴리가.... 어문학사가 그럴리가 없어 라고 생각하면서도.

게다가 이어서 어문학사 블로그에 올라오는 「동서기담」의 맛보기 글, 즉 본문 발췌글들은 내 우려에 쐐기를 박는 듯 했다. 그냥 재미로 읽는 기담이 짤막하니 실려 있는 것 같이 보였다. 

그러다 도서관에 「동서기담」이 신간 입고된 걸 우연히 발견했다. 그리고 실물을 읽어보니, 내 이전 생각은 완전히 나의 오해였다는 걸 알게 되어 한편으론 안심이다. 어문학사는 이 책을 펴내면서 "본 서에 실린 동서고금의 기담은 아쿠타가와 류노스케 등의 문인의 작품에도 차용되어...." 라고 하고 있었는데, 나는 처음엔 이게 단지 책 홍보를 위해 덧붙인 말일 거라 생각했건만 전혀 그렇지가 않았다. 이 책은 수많은 고문서나 고전 문학 작품들에 모티프를 준 기담을 찾아내고, 기이한 현상이 전 세계 곳곳에서 다수 목격된 사례가 있다는 걸 보여준다. 특히 나 개인의 평소 취향에 따르면, 역시 본문에서 아쿠타가와 류노스케, 이즈미 교카, 야나기타 구니오, 고다 로한의 작품 속에서 괴담을 찾아내고, 그것이 어떻게 작품 창작에 영감을 줬는지 기록하고 있는 부분이 인상적이었다.  

 

 

"이것을 읽다보면 고이즈미 야쿠모의 「괴담」에 나오는 '무지나'가 떠오른다."
(두 번의 쇼크. 페이지 142.
「호러국가 일본」이란 평서에서도 고이즈미 야쿠모, 즉 라프카디오 헌의 작품 「괴담」에 같은 일로 인한 쇼크가 두 번 반복되는 기법이 사용되고 있다는 해설이 있다.)

 

 

 

"이즈미 교카의 「초미궁」에 나오는 아키야 아쿠자에몬이라는 마술사는 스스로 '인간이 눈 깜짝할 사이를 세계로 만든다.' 고 공약한다."
(덴구에게 잡혀간 소년, 페이지 173)

 

 
"자살한 작가 아쿠타가와 류노스케는 이 현상에 적지 않은 흥미와 관심이 있었는데, 그는 자신도 같은 경험을 했다고 
믿고 있었다." 
(자기상 환시, 페이지 51)

 

 

"요시무라 히로토라는 의사가 쓴 「이즈미교카, 예술과 병리」라는 책은 이러한 현상을 의학적으로 설명하고 있으며, 내용 또한 흥미롭다." 
(자기상 환시, 페이지 53)

 

 

인상깊었던 다른 부분은 신화에 대한 기록에서도 SF적인 요소를 찾을 수 있다고 지적한 부분이다. 허무맹랑 뜬소문 기담 모음집일 거라 예측만 했던 책 속에 기담을 과학적 시선으로 해석하려 한 시도가 담겨 있었던 거다. 


이렇게 「동서기담」의 본문을 실제 읽고나니, 역사 후기에 실린 다음의 문장이 이 책에 대한 평가를 가감없이 적절히 표현한 문장이란 생각이 들었다. 

"또한 본 역서가 문학, 박물학, 민속학, 심리학, 역사학 등의 연구에 있어 보조적 자료로 
충분한 가치가 있음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역자 후기)


 

이런 민속학적 가치가 충분한 책이, 우리나라에서도 나왔으면 좋겠다. 민속학에 대한 관심은 단연 일본이 우리나라에 비해 훨씬 크다. 대학 동아리 학생들도 민속 동아리를 만들어 풍물을 연구하기도 한다. 아마 한국에서 이런 책이 나온다면 보다 한국 문학 작품 속에 담인 기이한 이야기들에 매료될 수 있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추가로, 저자 시부사와 다쓰히코는 본문에서 주로 18-19세기 고문서를 출처로 하면서 다양한 이야기를 시공간을 종횡무진하며 펼친다. 이건 시부사와가 이미 1987에 사망한 작가이기 때문인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에 담긴 기담들에 대한 그의 논조는 비논리적이거나 미신처럼 들리지 않는다. 오히려 옛날 사람치곤 시대를 앞서서 과학적으로 서술하고 있다고 느껴졌다. 

저자의 모습에 「교고쿠도 시리즈」의 고서점 주인의 모습을 겹쳐 보는 것도 어쩔 수 없는 내 특성이었다. 교고쿠도처럼 이 책에 담긴 많은 기담을 모두 기억해낼 수 있는 능력이 있다면,  그런 사람이 보는 세계는 어떤 느낌인 걸까 하고 궁금해졌다. 

 

(책에 실린 피투성이 산모의 유령인 우부메의 삽화. 페이지 99. 
만일 시부사와가 교고쿠 나쓰히코 작품 「우부메의 여름」이 출간된 1994 년 이후까지 살아 이 책을 집필했다면, 우부메 이야기를 하면서 교고쿠를 언급했을지도 모르겠다. 「동서기담」에선   「곤자쿠모노가타리」라는 옛 문헌에 실린 우부메 이야기가 소개되고 있다.)


기담이 없는 일상은 너무 평범하고 단조롭다. 기담이나 괴담을 논리적으로 해석해내고 말겠다는 과학적 사고가 자극 되는 한편, 정말 제대로 된 기담은 그 자체로 흥미로워 내 일상을 재미있게 해준다. 전혀 얼토당토하지 않은 기담. 해설이 실린 기담. 「동서기담」은 오노 후유미 「잔예」 에 이어서, 인상 깊은 작품으로 기억에 남았다. 몰라봐서 내가 미안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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