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머리가 정상이라면
야마시로 아사코 지음, 김은모 옮김 / 작가정신 / 2019년 1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엠브리오 기담> 의 작가 야마시로 아사코 (aka 오쓰이치)의 새 작품이 출가됐다 하여 냅다 관심이 생겼는데.

표지에서만 봐도 잔잔한 일본 단편선인 게 너무 느껴져서 왠지 내 스타일이 아닐 것만 같은 거다.

그래도 <엠브리오 기담>을 재밌게 읽었다는 사람의 호평을 보고 구매를 결정.

읽어 보니 역시나 단편선인 거다.

분위기로 치자면 히가시노 게이고의 <나미야 잡화점의 기적> 같은 신비로운 분위기다.

정통 환상 소설이나 호러 미스테리 소설 같은 느낌은 거의 없다고 봐야 좋다. 잔잔하게 시간 죽이기 위한 이야기를 읽고 싶다면 좋은 소설이겠다.

하지만 <엠브리오 기담>의 엔딩에서 본 것과 같은 여운이 남는 열린 결말도 없고.

여러개의 이야기가 절정에 이으러 떡밥 회수 되는 그러한 구성도 없다.

정말 짧고 흔한 구성의 이야기들이다.

그래도 곤드레만드레SF 와 같이 과학 미스테리 단편이 실려 있는 것은 환영할 일이다.

시간 여행을 주제로 하여 긴박한 느낌을 조성하는 것은 현재 미스테리 소설들이 지향해야 할 방향과 일치한다.

다만, 시간 여행을 주제로 한 다른 소설들 보다 더 재미있다곤 느끼지 않았다.

고바야시 야스미의 <장난감 수리공>에 수록된 <술에 취해 비틀거리는 남자>가 훨씬 짜임새도 플롯도 탄탄하다.

(그러고보면 두 작품 모두 '술에 취한 상태'라는 소재가 있는 건 무슨 우연이지... )

알라딘 평점 9/10이던데, 내 체감으론 7.5 정도일까.

모자라지도 차지도 않는 필력과 이야기. 군더더기는 없지만 그렇다고 감동도 여운도 없다.

야마시로 아사코나 오쓰이치의 이름이 아까운 작품이다.

----------------------------------------------------------------------------------------

<스포일러 주의 - 결말 다 있음>

세상에서 가장 짧은 소설

부부에게 어느 날 부터 중년 남성 귀신이 보이기 시작한다. 남편은 기겁하는 반면 아내는 탐정 처럼 이 귀신에게 숨겨진 사연을 찾아내고자 한다.

둘은 결국 인터넷 블로그를 이용하여 귀신 몽타주를 배포하고, 남자를 안다는 제보를 받아 이들을 찾아가는데.

결론(스포)은 부부가 식사 했던 식당에서 남자는 살해당했고, 그 살해 도구였던 '얼린 생선'에 남자의 혼이 묻어와 생선을 먹었던 부부에게 빙의가 된 것이었다. 살해를 저지른 식당 종업원이 잡히면서 사건 마무리. 귀신도 부부의 신체 구성성분이 자연 분해(?) 됨에 따라 사라지게 된다.

머리 없는 닭, 밤을 헤매다

열두살 친한 친구인 후코와 '나'. 후코는 이모가 머리를 친 닭이 머리 없이도 살아있는 걸 보고 갸륵히 여겨 이를 소중히 돌보고 키우는데. 후코는 이 이모에게도 괴롭힘을 당하고 있다. 이후 후코가 실종되고, '나' 는 후코를 찾기 위해 후코의 집에 갔다가 욕실에 있는 도끼자루를 보고 이모가 후코를 살해했음을 안다. 후코의 시체는 후코가 아끼던 머리 없는 닭에 의해 발견이 되는데. 어떻게 된 것이냐 하면 후코가 닭을 숨겨 다니는 봉지에 숨 구멍을 뚫어 놓았고, 이모는 이 봉지에 후코의 토막 시체를 넣고 유기 하려 하였는데, 숨구멍을 통해 후코의 피가 떨어진 것이 단서가 되어 경찰이 후코의 유기 장소를 발견할 수 있었다... 라고 하는 것. 결국 후코의 머리는 발견이 되지 않은 채 끝이 난다.

곤드레만드레 SF

동기에게 수소문 하여 '나'의 연락처를 알아내 찾아온 후배 N은 자신이 과학 소설을 써보려 한다고 한다. 술에 곤드레만드레 취하면 시간에 대한 감각이 혼탁해져 시간 개념을 잃고 현재에서 벗어난 미래에 도달하는 것 처럼 느끼게 된다. 술에서 깨면 시간 개념도 돌아오고, 미래에서 본 것들까지 기억나 현실과 미래가 뒤죽 박죽으로 보인다. '나'는 N에게 이 주제를 이용해 어떻게 소설을 쓸지 제안 해 준다 - 즉 미래를 본 사람이 경마권을 구매해 부자가 된다는 내용.

후배 N은 나중에 실제로 부자가 되어 나타난다. 알고 보니 N의 여자친구가 실제로 그런 능력을 갖고 있고, 소설을 쓴단 건 핑계였으며, 어떻게 이 능력을 써먹을지 조언을 구하려 했단 것이다. 후배 N은 '나'에게 보답을 하고 싶어하는데. 어느 날 N은 '나'에게 여자친구가 N이 피 흘리며 죽는 미래를 봤다고 하며 허둥지둥 전화를 한다. '나'는 여자친구가 본 것과 같은 미래를 최대한 피하기 위해 집에서 나와 도망갈 것을 권하지만. 결국 N이 죽었다고 하는 경찰의 연락을 받는다. 나중에 '나'가 여자친구에게 자초지종을 듣길, 그건 N이 아니라 N과 매우 비슷하게 생긴 N의 동기 (이 친구가 N에게 '나'의 연락처를 준 인물이기도 하다)였고 N이 그를 집에 설득 시켜 데려와 식칼로 살해 한 후, 곤드레 만드레 취한 여자친구에게 이를 보게 하여 'N이 죽는 미래'를 뒤틀었다 (애초에 여자친구가 본 게 N인지 살해당한 동기인지 알 수도 없지만. 그렇게 미래는 만들어졌다). '나'와 여자친구는 사실 시간이 혼탁해지는 능력은 여자에게 있는 게 아니라 늘 칵테일을 제조해오던 N 본인에게 있던 건 아닐까 하고 의아해 하고 끝이 난다.

이불 속의 우주

소설가 '나'는 슬럼프에 빠진 동료 소설가 T가 십여년 슬럼프에서 벗어나 다시 좋은 작품을 출간한 비결을 궁금해하여 그를 식사에 초대한다. T는 이혼 후 중고장터에서 이부자리를 구매 하였는데, 이 이불안에 들어가면 오감으로 느낄 수 있는 환상세계가 펼쳐진다는 것. 여기서의 경험을 토대로 소설을 쓰니 슬럼프가 극복되었다는 것이다. 몇번의 만남을 거듭하며 '나'는 점차 현실 세계에서 동떨어져 환상 세계에 집착하는 T에게 위화감을 느끼고 경고를 해야 하는 건 아닌가 하는데. 결국 T는 환상 세계에서 만난 인간인지 귀신인지 모를 여자를 따라 창작 도구를 챙겨 떠났고, 행방불명이 된다. 이 난리 통에 이부자리는 누가 처리 했는지 어디론가 또 사라진다.

아이의 얼굴

학창시절 친했던 여자친구 3명이 모두 자신들의 아이를 살해한 죄로 잡힌다. 아이를 가져 결혼을 준비중이던 주인공인 가오루에게 그들 중 한명인 유키에가 편지를 보낸다. 예전에 학창시절 왕따를 시켰던 이쿠타메 요리코가 저주라도 걸었는지, 자신들의 아이 얼굴 모습이 요리코와 같이 보였고 이 때문에 공포를 느껴 아이를 살해 했단 고백이었다. 직접적으로 괴롭히진 않았어도 무리 중 하나였던 가오루에게도 같은 일이 일어나지 않을까 경고 하기 위해 편지를 보낸 것이다. 요리코는 학창시절 괴롭힘을 이기지 못해 자살 했었다. 남편의 도움으로 공포를 이겨내며 가오루는 아이를 낳았는데 아이의 얼굴이 요리코와 점점 비슷해져 간다. 아이를 낳은지 몇주가 안되어서 가오루는 벌써 아이가 두려워 지기 시작 하지만. 결국 아이를 죽이지 않고 받아들이는 선택을 한다. 아이가 교통사고로 하마터면 죽을 뻔 했을 때 가오루가 몸을 던져 구해낸 것. 이 사건을 통해 가오루도 요리코를 딸로 받아들일 수 있게 되고, 요리코를 닮은 딸도 의미심장하게 가오루를 받아들이는 표정을 짓는다.

무전기

지진사고로 어린 아들과 아내를 잃은 '나'. 이후 짐을 정리 하다가 아들이 갖고 놀던 무전기를 발견하는데. 이 무전기가 매체가 되어 밤이면 죽은 아들이 무전기를 통해 말을 걸어왔고, '나'는 아들과 남몰래 대화하며 그리움을 삭혀간다.

몇년이 흘러 남자는 직장 동료와 결혼을 결심하는데. 화재가 나서 집이 불타고 아들과의 유일한 연락처였던 무전기도 불타게 된다. 이걸 계기로 남자는 과거의 아픔을 딛고 일어나 새 삶을 살아가기로 다짐한다.

이후 재혼한 여자와의 사이에서 딸이 태어나고, 그 딸은 무럭 무럭 자라는데 죽은 아들은 여전히 같은 나이에 머물러 있었던것을 안타깝게 여긴다. 어느 날 딸이 어디선가 찾았다며 불타 버린 무전기를 갖고 와서는 '내가 어릴 때 여기서 무슨 소리가 난 것 같았는데. 찌찌통이라고' 하며, 고장난 무전기가 화재 이후에도 소리를 냈던 것을 암시한다.

내 머리가 정상이라면

주인공 '나'는 이혼한 남편이 인파 속에서 자신의 딸과 동반 자살 (교통사고)을 한 트라우마를 갖고 있다. 이후 계속 피폐하게 살다가, 어느 골목에서 '엄마'하고 부르는 환청을 듣는다. 사람들, 특히 '나'의 가족은 주인공이 심신미약으로 정신이 이상해진 거라 생각하지만. 경찰의 만류에도 무릎쓰고 '엄마' 소리가 나는 골목 건물로 들어가는데, 연결된 욕실 안에는 부모의 학대로 방치된 아이가 욕탕 안에 묶여 죽어가고 있었다. 이후 구조된 이 아이와 마음의 상처를 치유하기 위해 함께 시간을 보내며 그 '엄마' 하는 소리는 왜 나한테만 들렸을까 하고 의아애한다.

아이들아, 잘 자요

학생들과 함께 대형 여객선에 탔던 '안나'는 여객선이 난파 당하는 바람에 아이들 앞에서 죽게 되고.

눈을 뜨니 천상이다. 안나의 영혼 인수, 수습 절차가 꼬인 것을 발견한 담당 천사 이사벨이 안나의 영혼을 밀접히 조사하고.

알고 보니 안나는 지상에서 살기로 한 '추락 천사'의 후손이었기 때문에 인간이 아니었고, 그래서 일반적인 영혼 수습 절차를 거치지 않았던 것.

안나는 특별히 이사벨과 같이 인간의 영혼을 수습하고 그들의 기억을 영화로 만들어 신에게 상납하는 천사로의 삶을 살 수 있는 기회를 얻는다.

안나는 난파된 여객선에 가 아이들의 영혼을 수습하고. 이후에도 천사고 일하면서 많은 이들의 기억을 보며 안타까워한다.

인간의 삶이 신의 영화라고 하는 관점을 매우 가볍게, 그냥 마음씨 착하고 여린 안나의 위기감 없는 시선으로 그려낸 작품.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