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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을 이어 말한다 - 잃어버린 말을 되찾고 새로운 물결을 만드는 글쓰기, 말하기, 연대하기
이길보라 지음 / 동아시아 / 2021년 5월
평점 :
이길보라의 <당신을 이어 말한다>는 소수에게 무례한 사회에 일침을 날리면서
소수인 그들 자신을 위해, 또는 자유로운 세상을 위해 목소리를 내는 사람들에게,
‘내가 여기 있어.’, ‘나도 말하고 있어.’ 라고 곁에서 이야기를 건네며
그 다음은 독자인 ‘당신’이 이어줄 것을 기대하고 있는 책이다.
이길보라는 농인 부모를 둔 코다(CODA)이다.
*코다: 농인 부모에게서 태어난 청인. 음성 언어보다 수어를 먼저 익히며, 농인과 청인 문화에 모두 익숙하다.
그녀는 부모의 장애를 향한 사람들의 시선과 사회적 편견들에 둘러싸여 성장하면서 느낀,
소수라는 이유로 다수처럼 누리지 못하는 것들에 대해 생각하고, 질문하고, 이야기한다.
이런 삶의 방식은 여성이라는 정체성에도 같게 적용되어 그녀가 페미니즘과 임신중지에 대해 말하게 하고, 이에 더해 과거 베트남전으로 인해 아직 고통받고 있는 이들을 한 번 더 살펴보도록 했다.
우리가 알아야 하지만 알고 싶지 않아하는 것들. 알고도 모른 척 하는 것들. 이길보라는 이런 것들을 세상에 끄집어내 모른 척 하는 사람들의 마음을 콕콕 찌른다.
그래서 나도 많이 찔렸다. 청인 위주인 세상을 너무 당연하게 여기며 살았구나 하고 반성하게 되었다.
그제 동네를 돌아다니다가 횡단보도 신호를 기다리는 중이었다. 눈 앞 가로등에는 시각장애인을 위한 알림 버튼이 있었는데 가만히 보고 있자니 그 가로등 근처 바닥에는 시각장애인용 보도블럭이 없었다.
노란색의 울퉁불퉁한 보도블럭은 횡단보도의 가운데 쪽에만 짧게 설치되어 있었고, 왼쪽과 오른쪽에 위치한 가로등까지는 이어져 있지 않았다.
그럼 이걸 어떻게 알고 와서 누르지?
다른 사람들이 눌러줘야 하는 걸까?
아무도 도와주지 않으면 어쩌지?
쓸모가 있는 것인지, 없는 것인지 애매한 버튼이었다.
이 버튼이 횡단보도 한 쪽에 놓인지 꽤 오래되었는데 지금에서야 이 생각을 한다는 사실도 참 웃겼다.
P. 186
몇 차례의 문제 제기 끝에 수어통역사가 무대 위에 올라서게 되었다. 그러나 화자 옆이 아닌 무대 구석이었다. 조명이 가까스로 비치는 곳에서 ‘청인에게 불편함을 주지 않는 선’에서만 통역할 수 있었다. 무대에 수어통역사가 등장하자 비로소 청인들은 농인의 존재를 자각했다. 사람들은 박수를 보내며 환호했고 ‘우리는 이런 소수자의 언어를 존중하는 진보적인 사람들’이라는 자부심과 자긍심을 챙겼다.
이 버튼도 그저 누군가의 자부심과, 자긍심을 챙기는 일 중 하나였을까?
여성인권과 관련해서는 ‘이길보라’라는 사람과 같은 시대에 살고 있다는 게 아주 든든했다.
나도 내가 할 수 있는 작은 일을 하고 있지만 가끔은 내가 이런다고 세상이 달라지나, 뭐가 바뀌기는 할까 하는 절망적인 마음이 들 때도 있다. 그런데 나서서 임신중지 경험을 공유하고, 여성을 위해 마이크를 사수하는 저자를 보니 감사한 마음이 들면서 괜히 마음이 벅차오른다.
P. 98
누군가는 당연하게 마이크를 잡았다. 나는 화가 났지만 공손하게 마이크를 뺏었다. 최대한 하고 싶은 말을 한 후 다른 여성 심사위원에게 마이크를 넘겼다. ... ... 언젠가는 심사위원과 같은 일을 하기에는 아직 어리다고, 경험이 부족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제는 할 수 있을 때 더 많이 해야 한다고 믿는다. 내가 잘나서가 아니라 ‘나’를 대변하지 못하는 누군가가 무언가를 결정하도록 두면 안 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너무 당차고 멋진 언어가 많은데 소개하자니 글이 너무 길어질 것 같아 다 담지 못하는 게 안타깝다.
사회가 비장애인으로 규정한 다수가 아니라 진정한 의미의 모두가 자유롭고 평등한 날을 바라는 그녀의 이야기 덕에 나는 한 번 더 생각하고 행동할 힘을 얻었다.
또 혼자가 아니라고 외쳐준 덕에 용기를 얻고 마음을 굳게 다졌다.
나와 비슷한 마음을 느끼고 있을 2030 여성들, 또 자라나는 10대 여성들에게 든든함을 주고, 연대할 수 있도록 하는 책이 될 거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