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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수수께끼 > 알라딘 '마이페이퍼'의 결정적 오류...

  알라딘의 접속은 그나마 상당히 나아진것 같습니다. 물론 중간에 글을 써서 올리려면 서버오류라고도 가끔 나오지만 처음 개선작업 후보다는 상당히 접속도 용이해진것은 사실입니다.

  다른 님들의 서재를 돌아다니면서 님들이 올리신 글들이 03:24 등등 새벽에 올리신 글들이 많아서 늦은 시간에도 알라딘의 미로를 열심히 헤매고 다니시는 분들이 많다는 생각을 했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제가 다른님의 페이퍼에 댓글을 달고 퇴근하여 재접속을 하고 보니 오후 3시경에 올린글이 오늘 03시경에 올린글로 나타나더군요. 그러다보니 나중에 글을 올리신분들도 먼저 올리신 분들보다 시간상으로는 늦게 올린 모양새가 되어 있었습니다.

  어떻게 하루를 24시간 개념으로 하지 않고 오전 오후의 개념으로 한 모양인데, 그렇다면 오전 오후에 관한 표시도 am 또는 pm으로 표시를 해 줘야함에도 그런 작업이 미처 따라가지 못해서인지 정오 이후에 글을 올리신분들의 작업 시간은 모두 새벽에 글을 올리신 것으로 착각을 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저도 처음에는 엄청난 알라디너가 남들이 다 잠드는 시간에도 알라디너로서의 왕성한 활동을 하는것으로 착각을 했으니 말입니다.

  이 문제도 알라딘 측에서 알고 있으리라 생각하고 그냥 넘어가야 할것 같습니다. 어차피 아직도 시스템이 안정화가 되지 않은 상태이니 이런 내용은 알라딘측에서 인지하고 있으리라 판단되지만, 게시 시간에 대한 문제는 자칫 잘못하면 상황이 전도되는 오해를 불러 일으킬 수 있으니 여러님들께서는 이 점을 유념하셔서 페이퍼나 리뷰...그리고 댓글의 작성싯점을 판단하셔야 할것 같습니다.

                                                                                < 如        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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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수수께끼 > 미운 오리에서 황태자로 등극...축구 이동국 선수

 이번 바레인과의 평가전에서 첫 골은 "이동국"선수의 발에서 나왔습니다. 한동안 이동국은 월드컵 대표선수에서도 탈락되는 아픔을 지닌 비운의 축구선수였고, 히딩크 감독의 눈밖에 난 미운 오리새끼였습니다. 그가 입대할 당시에는 국가대표 상비군이었습니다. 운동선수가 군에 입대를 하면 국가대표에 선발이 되어 있는 경우에는 훈련소에는 잠시만 들렀다가 바로 훈련에 소집이 되도록 되어 있어 작년 3월에 군에 입대후 7월까지 논산훈련소에서 잠시 머물다가 바로 대표팀에 합류했었는데 최종 명단에 끼지 못하고 말았습니다. 히딩크 이후에 열심히 하여 대표팀에서 불러주기만을 학수고대 했었는데 불행하게 발등뼈를 다치게 되었던 것입니다.

 발등이 다 나은 다음인 작년 11월 이동국은 논산훈련소에 입소하였고 금년 1월초에 이제야 제대로 된 군인으로 우화를 한 셈입니다. 운동선수들은 국익이 우선되는 경우에는 먼저 대표팀의 소임을 마치고 훈련소는 나중에 가서 훈련을 마치게 되는데 이동국이 바로 이런 경우에 해당이 되는 셈입니다. 그런 이동국이 이번 본프레레 감독의 황태자로 일찌감치 새로 감독을 맡은 본프레레의 눈에 띄인 것인데 훈련소에 다녀오기 전의 이동국과 훈련소를 다녀온 이동국은 많이 달라져 있었습니다. 뛰어다니며 운동장을 휘젓는 모습도 훈련소 입소전의 상대 골문에서 어슬렁거리다 찬스가 나면 골을 날리는 그런 모습이 아니라 수비에도 저극적으로 가담하는...이제는 팀을 위한 행동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사실, 이동국의 경기 모습을 보노라면 천부적인 선수구나!...라는 감탄사를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만큼 이동국 선수의 축구에 대한 감각은 뛰어났습니다. 올림픽팀의 조재진도 상무가 발굴한 보배였지만 이동국 선수는 버림받은 보석이었던 셈입니다. 이 두 선수 이외에도 많은 선수가 있지만 이들이 버틴 상무는 용병이 한 명도 없이 프로축구의 중위권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동국 선수는 한 때는 많은 여성팬을 몰고 다니는 귀공자였습니다. 생긴것은 얼마나 잘 생겼나요? 키도 크지만 얼굴은 탤런트 못지 않게 잘 생겼으니 그의 경기하는 모습을 보기 위한 여성팬은 늘 바글바글 하답니다. 그러나 제 입장에서는 이동국도 한 사람의 건장한 국방의무를 짊어진 장정일 따름이며 달리 보이지 않습니다. 그런 이동국 선수가 가까이 있다는 것을 알게된 제 딸이 이동국 선수의 싸인을 받아달라고 해서 몇 장 받아다 준적이 있었습니다만, 제 개인적으로는 운동 선수에 대한 커다란 매력을 느끼지 못하는 편이기에 누가 운동을 잘하기에 그 선수만을 유달리 아낀다거나 편애하지는 않습니다.

 이동국 선수는 그의 게으름 만큼이나 사생활이 문란했었습니다. 바로 이런 점이 운동 선수로서 갖추어야할 가장 선행되는 덕목을 위반했다고 판단한 히딩크는 과감하게 이동국 선수를 잘라버린 것입니다. 그래서 다른 선수와는 달리 병역 혜택을 받지 못하고 군 입대를 해야 했던 이동국 선수는 입대 초반에는 그의 의지처럼 열심히 하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었습니다. 대표 상비군에 들어가서도 히딩크가 떠났기에 잘만 하면 주전 자리를 꿰찰수 있었으련만 예의 그 게으름이 그를 더 이상의 선수로 만들어 주지 못했고, 최종 엔트리에 그의 이름은 들어있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훈련소를 마치고 다시 복귀한 이동국 선수는 분명 달라져 있었습니다. "군대가면 사람된다"는 말과 "군대가서 사람 버렸다는 말"이 공존한다지만  이동국 선수는 사람이 아닌 축구선수로 거듭 태어 난 것입니다. 급기야 그는 지난 6월 29일 국가대표로 소집이 되었고 연이어 부동의 공격수로 좋은 활약을 보이고 있는 것입니다. 이제 그에게서는 황태자의 모습은 보기 어렵습니다. 군복을 입은 한사람의 군인으로서 거대한 국방조직의 일원으로서의 착실한 생활을 하는 것입니다. 제가 보기에는 과거의 끈기없는 이동국 선수가 아니기에 대표팀에서 오랫동안 장수할 것 같습니다. 적어도 본프레레 감독이 제대로 보았고, 그가 지금 감독의 사랑을 한 몸에 가득 받는 황태자일지라도 이제 더 이상 그에게서 거만함을 찾아보기는 어려울것 같습니다.

 이동국선수가 국내에서 열심히 활동하는 동안 광주 상무팀은 자매도시인 중국의 광주시가 주최하는 4개국 초청 국제축구대회에서 우승을 하였습니다. 결승전은 광주시팀(중국의 꽝쪼우)과 치루었는데 2:0이라는 스코어를 기록하였습니다. 이제 이동국 선수는 당분간은 소속팀인 상무팀에서의 활동은 어려울것 같고 그만큼 상무팀의 전력은 공격의 핵이 빠졌으니 꾸려나가기 힘들겠지만 국가를 위한 대표팀 발탁은 개인의 영광이며 상무팀의 경사이기에 나머지 선수들로 빈 공백을 메워 나가야 할것입니다.

 모처럼 제 2의 축구인생을 시작하는 이동국 선수...모두가 바라던 국가 대표팀의 주 공격수로서 감독의 총애를 받는다는 이유로 "황태자"라는 별명을 얻었으니 최선을 다해서 올림픽에서도 좋은 결과가 나오기를 기대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 如       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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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수수께끼 > 먹물 들이기.....알라딘에서 못 찾는 책


 < 註 : 알라딘에서 이 책을 찾았지만 알라딘에는 없는 책인것 같습니다. 원래 "마이리뷰"에 올리려고 하였는데 알라딘에서의 검색이 불가능하여 이곳에 옮깁니다.>

 중이 된다는 것은 '텅 빈 절집'을 채우는 일이랍니다. 출가하는 것은 마음을 '텅텅 비우기 위함'이니 당연히 '텅 빈' 절집을 찾는 것일겝니다. 이 책은 이렇게 '텅 빈' 빈 자리에 살그머니 들어 앉아 빈 곳을 채우는 삶을 살아가는 스님들의 마음이 담겨있는 책입니다.

 '먹물들이기' 또는 '중물들이기'란 인간으로 태어나서 또 다른 빈 공간을 찾는 스님되는 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마음을 비워야 득도를 하기에 어쩌면 이 책은 명경지수 같은 맑은 마음이 담긴 거울같은 이야기로 가득찼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책의 표지에서도 알 수 있듯이 책의 표지를 장식하는 것들은 상단 1/4에 지나지 않습니다. 물론, 이 책이 해인사 승가대학에서 편집을 했기에 의도적으로 '빈 공간', 또는 '텅 텅 빈자리'임을 애써 강조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이 책속의 빈 공간에는 모두 64편의 수필과 시가 담겨 있습니다. 그리고 가끔 몇 장을 넘기다 보면 사찰의 여러 모습이 흑백사진으로 담겨 있습니다. 그런데, 그 사진 마저도 엄숙합니다. 아마도 수행승의 힘든 모습이 느껴지는 사진이기에 그렇게 가슴속에 와 닿는것이 아닐까요?

 왜? 험난하다면 험난하고, 재미있다면 재미 있는 인간 세상을 떠나 '텅 텅 빈 공간'에 안주하려고 할까요? 아니, 안주가 아니라 새로운 고행의 삶을 새롭게 시작하려 할까요?  그리고 미지의 세계에 첫 발을 내딛는 그들의 마음은 어떤 설레임과 기대감으로 가득 차 있을까요?  부처님의 가르침에 충실할것을 맹세하는 상강례를 치루고 간경을 하는 스님들의 마음속은 정말 거울 처럼 맑은 마음일까요?

 그러나 스님들은 그렇지 않음을 이야기 합니다. 인간이기에...인간의 굴레를 쉬이 벗어나지 못하기에 겪는 종교적, 정신적 갈등을 살짜기 속삭이고 있습니다. 안거에 들어가 면벽수도하는 기간이 얼마나 고되고 힘들었으면 부처님 몰래 손가락 셈으로 해제일을 꼽았겠을까요? 그리고는 그런 행위의 약싹빠름에 스스로를 질책합니다. 그들은 '텅 빈 공간'에 속세의 욕심으로 가득한 마음속을 '텅 텅 비우기'위해서 이곳에 왔음에 어리석은 스스로의 짧은 생각에 웃음 짓는지도 모릅니다.

  젊은 그들이기에 만남도 있고 이별도 있습니다.  애써 수많은 얼굴들을 지우려 한다해도 다 지울수는 없습니다. 인간 세상의 연결고리는 그렇게도 모질고 끈질긴 모양입니다. 그런 와중에 고뇌하고 번뇌하며 '먹물들이기'를 게을리 하지 않는 스님들의 마음이 고스란히 담겨 있습니다. 오죽 마음을 씻기를 바랐으면 절간을 건너는 다리 조차도 마음을 씻는다는 뜻의 '洗心橋'라고 했을까요?

 산문을 들어서고 깨달음을 얻는다는 마음이 설 때면 그들은 산문을 나섭니다. 산문을 들어 선 모든 사람들이 깨달음의 길을 떠나지는 않습니다. 그중에는 많은 사람들이 '먹물들이기'를 마치지 못하고 산문을 나서고야 맙니다. 그만큼 '먹물들이기'는 힘든 일입니다. 이런 '먹물들이기'의 과정도 간간히 들려 줍니다. 늘 산중에만 있기에 그들은 자연을 품을 줄 알게 됩니다. 그 속에는 소나무도 있고, 올챙이도 있고, 참새도 있고, 다람쥐나 청설모도 있습니다. '먹물들이는 사람'들에게는 이들 모두가 친구이며 동반자인 셈입니다. 이들은 인생 전부를 진리를 탐구하는것에 투자하는 일종의 투기꾼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런 투기꾼이 속내를 살그머니 들어내고 있습니다.

 제대로 된 '먹물들이기'를 마치면 눈 마저도 투명합니다. 늘 맑기에 거짓으로 사물을 보지 못하며 가식을 부릴 수 없다는 스님의 말씀처럼 이 책 속에서는 가식을 찾을 수 없을지도 모릅니다. 이들은 이 책을 출간하며 글이 성글다(서투르다)고 했지만 투명한 마음으로 쓴 글이기에 그 성금마저도 찾아볼 수 없는것 같습니다. 지금 이 시간에도 '먹물들이기'에 열중하고 있는 산중 사찰의 스님네들에게서 어서 빨리 커다란 솥 속에서 김이 모락거리며 먹물이 제대로 들기를 기원해 봅니다.

                                                                            < 如      村 >

     * 이 책은 해인사 승가대학 수다라편집실에서 편집하고 부흥기획 출판부에서 1994년에 초판을 발행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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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수수께끼 > 가짜 고구려 불상...정말인가? 가짜인가? (3)

 앞면은 <금동계미명 삼존불>과 같고 뒷면의 명문은 <연가7년명 금동여래입상>의 명문을 그대로 배꼈다는 북한의 불상이 정말 가짜인가? 어떻게 동 시대에 제작된것이 아님에도 명문은 똑 같을까? 배꼈다고 하는 명문의 내용은 무엇인가? 등등에 대해서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우선 아래의 그림 두개를 보시기 바랍니다. 아래 그림은 <연가7년명 금동여래입상>의 전면과 광배 뒷면의 사진입니다.



 

 

 

 

 

 

 

 

 

 

 

 

 

이 불상은 1963년도에 경남 의령에서 농부에 의해 발견이 된 불상으로 신라의 영토였던 지역에서 발견이 되어 아직도 논란이 많은 불상인데 뒷면의 명문에 의하여 고구려의 불상으로 여겨지고 있습니다. 이 불상은 정영호 선생에 의하여 수습되었는데 당시 이 불상이 안치된 장소는 절터나 무덤이 아니라 임시로 무너져 내리지 않을 정도의 돌 함을 쌓고 그 속에 넣어져 있었다고 하는데, 정영호 선생은 이 불상이 북한군의 호지불로 후퇴 당시에 임시로 숨겨 둔 것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장충식 선생은 이 불상의 크기가 16.2cm에 달하는 것으로 보아 호지불로 소지하고 다니기에는 너무 크고 무겁기에 정영호 선생의 북한군 호지불설을 반박하고 있습니다. 신라 영토에서 발견된 것은 다소 의아하지만 경주의 호우총(壺우塚)에서 광개토대왕의 무덤에 사용되던 청동호우가 발견된 사례도 있어 다른 각도로 생각을 해 볼 수 있다는 이유입니다. 이 불상은 발견후 광배 부분에 손상을 입어 사진에서 보시는 바와같이 동강난 것을 접합을 했습니다.  장충식 선생은 만약 호신불로 소지하고 다녔다면 금을 입힌 불상의 어느 귀퉁이는 마모가 되었을텐데 전혀 그런 흔적이 없다는 것입니다.

 또 한가지는 이 불상의 제작연대에 대한 논란입니다. 延嘉는 고구려의 연호로 己未年인데 539년부터 60갑자의 차이를 학자마다 보이고 있어 539년, 599년, 479년, 419년으로 보는가 하면 심지어는 시대를 아주 낮춰서 고려 광종시대인 959년으로 편년을 잡는 학자도 있는것 처럼 편년에 대한 정확한 결론도 아직 마무리 되지 않은 상태이지만 전반적인 의견은 539년으로 보는 경향이 강합니다. 불상의 세부 표현기법이나 양식을 논하는것은 조금 어렵기에 생략을 하고 바로 명문에 대해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광배의 뒷면에는 47자의 명문이 음각되어 있습니다. 명문은 모두 해독이 가능한데 명문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延嘉七年在己未高麗國樂良

東寺主敬第子僧演師徒十十十十人共

造賢劫千佛流布第十十九因現義

比丘法潁所供養

연가 7년 기미년에

고려 낙랑 동사라는 절의 주지이며

부처님을 공경하는 제자 승연을 비롯한

사도 40명이 현겁 천불을 만들어 유포한

 29번째 인현의불을

비구인 법영이 공양한다

 

  이 명문은 국내에서도 단 두글자를 놓고 의견이 분분한 입장이며 최근에는 불교의 경전인 <현겁경>에 나온 내용을 주장하여 비교적 타당성을 인정하는 추세인데, 문제는 오역한 명문을 북한의 유물에 그대로 사용하였다는 것입니다. 쉽게 말하자면 컨닝을 하였는데 다시 고친것을 모르고 틀린 답을 그대로 적어낸것과 같다는 것이지요.

 그럼...문제가 되는 내용을 다시 한번 자세히 살펴 보도록 하겠습니다. 이 불상을 발견한 후에 학자들은 명문을 해독하는 과정에서 위의 파란 밑줄친 내용을 다르게 해석을 하였습니다. 

因現義 이라고 해석된 부분을 回現歲佛로 해석하였던 것인데 이 명문에는 붉은 표시를 한 "歲"와 回現歲佛에서의 "歲"는 비슷하게 새겨져 있지만 분명한 차이가 있습니다. 따라서 '回現歲佛' '回現義佛' 해독하는것이 타당하다 할것입니다.  회현세불이란 의미는 억지로 해석하자면 다시 태어나는 부처라는 의미가 되는데 그런 의미로 사용될 경우의 새로운 세상이란 의미는 '現世'가 맞는 말입니다. 그러다보니 回現義佛이란 한자는 <현겁경(賢劫經)>에서 말하는 因現義는 것을 밝혀내게 된 것입니다.

좌측 사진에 나타난 '回'자는 '因'의 고어로 판단이 되는 것이며 이는 불교의 경전에 나타난 "제29인현의불"과 같은 내용으로 가운데 들어있는 'ㅁ'이 바깥의 'ㅁ'좌측에 붙은 글자라는 것입니다. 고어라는 것도 경전의 내용과 일치하기에 알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북한 유물인 <연가7년명 금동일광삼존불>에는 모두 46자의 명문을 담고 있는데 47자의 <연가7년명 금동여래입상>에서 '主'자가 빠졌고 마흔을 뜻하는 "十十十十"대신 "此"로 음각되어 있는 것입니다.

 똑 같은 명문이 서로 다른 불상에 새겨진다는 것이 있을 수 없는 일이며, 특히 잘못 판독되었던 부분을 그대로 배끼는 실수를 북한 유물에 저질렀던 것입니다. 주최측에서도 이 문제에 대하여 북한의 유물에 새겨진 명문은 후대에 새겨진 것이라는데는 어느 정도 동의를 하는 편이지만 유물 자체는 고구려 유물이라고 하고 있습니다. 북한은 이 유물이 평양의 고구려 왕궁터에서 발굴이 되었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한번 짚고 넘어가야할 부분이 있습니다. 지금 좌측의 명문 확대사진에서는 분명히 "回(회)"로 읽어야 될 한자입니다만, 문헌자료에 해당하는 불교의 경전인 <현겁경>이 있었기에 회가 아니라 "因(인)"이라는 것을 밝힐 수 있었습니다. 미술사학에서는 이렇게 문헌자료와 실물자료의 일치를 매우 중요하게 여기고 있습니다.

<에필로그>

 한솔동의보감에서 열렸던 전시회에 출품된 북한의 유물은 어떤 경로로 우리 나라에 들어와 전시가 되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북한에서는 국보급 유물로 알려져 있습니다. 제 개인적인 생각입니다만, 주최측에서 주장하는것과 마찬가지로 유물 자체는 비교적 나이가 들은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북한에서는 이 유물에 대한 명확한 출처를 밝힐 수 없었기에 똑 같은 명문을 새긴것이 아닌가 합니다. 그러나 정확한 이유는 어디에 있는지...먼 훗 날 알 수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또 한가지...저도 <연가7년명 금동여래입상>의 명문에 대한 구구한 논란이 될 때 "回"로 이해를 했었습니다. 그러나 학자들의 꾸준한 노력으로 관련 문헌을 찾아내고 그러므로써 명문에 대한 올바른 판독이 가능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연가7년명 금동여래입상>의 정확한 출토 경위에 대한 연구가 지속되어야 할것이며 중국의 불상의 형태에 대한 연구로 제작년대가 언제인지도 명확하게 밝혀져야 할것입니다. 현재까지의 연구결과로는 539년이 아닌가 하는 의견이 비교적 많은데 이에 대한 지속적인 연구가 바로 불상의 탄생이 언제인가를 알 수 있는 길이 될 것입니다.

                                                                                 < 如       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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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수수께끼 > 금동반가사유상.....백제것인가? 신라것인가? (2)

 금동반가사유상이 갖는 아름다움은 무엇일까?  우선은 반가사유상이 나타나게 된 배경을 알아보는것이 중요하다 할것입니다. 한마디로 말하자면 "불교의 메시아"인 미륵보살은 56억 7천만년 후에 나타나 중생을 구제한다는 미래불인 셈입니다. 그리고 '사유'란 고뇌하는 모습이라고 말할 수 있는데 그럼 반가사유상은 과연 어떤 고뇌에 빠져 있는것일까요? 사유상의 출현은 출가하기전의 태자의 신분이었던 '싯다르타'가 인간이 갖는 4가지 고뇌, 즉 生老病死에서 벗어나는 방법을 찾는 고뇌의 모습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4가지 고뇌속에서 번민하던 '싯다르타' 태자는 무엇을 느꼈기에 얼굴에 야릇한 미소를 머금고 있는 것일까요?

 그것도 턱을 괸것도 아니고 손가락 하나가 얼굴과는 닿은듯 만듯 정말로 손가락 전체도 아닌 점으로써 뺨과 닿아있으며, 고개는 약간 숙인채 얼굴에 담고 있는 미소....한마디로 오묘하다고 표현되는 얼굴표현에는 나름대로의 중생 구제의 방법에 대해 수만가지의 말을 뱉어낼것만 같습니다. 즉, 오랜 고뇌의 기간을 거쳐 드디어 중생구제의 방편을 알아냈다는 미소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왼 무릎위에는 한 쪽 발을 올려놓고 있는데 엄지 발가락에 잔뜩 힘을 주어 구부리고 있는 모습입니다. 제가 보기에는 분명 잔뜩 힘을 주고 있읍니다만, 미사려구를 구사하기 좋아하는 학자들은 이 모습이 달리 보이는지 발가락의 구부림이 너무나 자연스럽다고 합니다만, 자연스럽다는 말은 힘을 주지 않았다는 말이지만 그냥 힘을 주지 않고 오른 발을 왼 무릎에 올려놓으면 전혀 지금의 모습은 흉내도 낼 수 없습니다. 결국은 무슨 이유에서인지는 몰라도 발가락에 잔뜩 힘을 주고 있다고 볼 수 있는 것입니다.

 눈은 자세히 보면 입가의 살포시 웃는 모습과 어울리게 지그시 내려깔고 중생을 굽어보듯 하는데 바로 미소와 더불어 이런 눈매가 미륵보살로서의 위엄을 한껏 갖추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이 반가사유상의 미소에 대해 최순우 선생은  "이 반가사유상의 아름다움은 인간이 만들어낼 수 있는 모든 아름다움을 초월한 것이며.......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한아(閑雅 :막을수 없는 아름다움)의 아름다움은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한숨을 내쉬게조차 한다....서양인은 모나리자의 미소를 최고로 여겨 '영원한 미소'라고 예찬하는데 미륵보살반가사유상과 나란히 놓는다면 모나리자의 미소 정도는 당장 안색을 잃을것임에 틀림없다" 고 하였습니다. 아주 점잖게 반가사유상의 미소를 치켜세웠지만 다른말로 이야기 하자면 모나리자도 반가사유상의 미소를 보면 울고 간다는 말 정도로 해석을 하면 될것입니다. 이 반가상의 머리에는 도교사상에서 나온 삼산관이 얹혀있어 간단하게 "삼관미륵"이라고도 불리어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불상의 출처에 대해서 아직까지도 확실하게 알지 못한다는 안타까움이 있는 것입니다.  처음 이 반가사유상이 세상에 나타나게 된 시기는 1912년 입니다. 당시 이왕가박물관(일본인이 1910년의 한일합방 이후에 대한제국의 황제칭호를 깔아뭉개기 위해 조선 임금의 가계를 <왕가(王家)>로 낮춰 부르게 되었습니다)이 이 반가사유상을 입수할때는 중계인이 '경주 근처의 폐사에서 가져왔다'고 하였기에 신라의 작품으로 알았었으나 한일합방 이전부터 우리 나라의 고적을 조사해온 일본인 학자 이네다(稻田)가 '1910년 충청도에서 올라왔다'고 하는 바람에 신라것이냐 백제것이냐를 놓고 헷갈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조선미술사>의 저자인 세키노(關野貞)는 "조산 삼국시대의 조각"에서 두 구의 미륵반가사유상을 고신라의 유물로 단정하여 '후치가미 사다스케가 총독부에 기증한 것으로 출처가 확실하지 않으나 경상도에서 발견한듯 하다'고 기록하여 경상도 출토설에 힘을 실어 주었다. 그후 1915년 바로 이네다의 충청도 출토설이 나오게 되는데 이 때는 그체적인 높이(2자9치7푼)가 제시되어 백제계의 반가사유상으로 인정하기에는 나름대로의 신빙성이 있게 되었습니다.

  우리 나라에는 금동, 석불, 마애불 등 모두 32구의 반가사유상이 있지만 1945년 이후에 우리의 손으로 발굴된것 이외에는 반가사유상이 고구려의 것인지 또는 신라나 백제의 것인지 명확하게 알 수 있는 것이 애석하게도 하나도 없습니다. 그 이유는 대부분의 불상이 고가에 거래되었지만 그 출처에 대한 추궁이나 법적 책임이 두려워 대부분은 오랜 동안을 숨겨 두었다가 내다 바는 악덕 골동품상(거의 일본인)들로 인하여 유물이 갖고 있는 족보가 멸실되어 버렸기 때문입니다. 결국은 이네다의 주장대로 이 반가사유상은 충청도 지역에서 올라온 백제계의 반가사유상으로 알려지게 되었고, 돌아가신 김원룡, 최순우 두분은 이 불상이 백제의 작품이라는 확고한 믿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우리 나라에 있는 두 구의 불상이 어디것이냐 하는것에 대한 명확한 결론이 없고 갑론을박 하는데 엉뚱하게도 일본에서 더 애써 원산지를 찾는 작업을 추진하는 일이 발생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일본의 국보 1호로 지정된 목조금동반가사유상 때문입니다. 이 불상은 비록 나무로 만들어졌지만 우리 국보 83호인 '삼관미륵'의 복제품이나 마찬가지로 쏙 빼닮았기 때문입니다. 이 불상은 일본의 고류지(광륭사)에 소장하고 있는데 우리 나라의 불상의 원적이 어디냐에 따라 이 불상의 원적도 덩달아 원적 변경이 불가피하기 때문입니다.그런데 일본에 있는 이 목조반가사유상에 대해서는 "한반도에서 전래된 것이다" 또는 "한반도 사람이 건너가서 만든 것이다", "일본에서 만들었다(대부분의 일본학자 주장)"는 등 여러가지 주장이 있는데 주로 우리 학자들은 위의 두 가지 학설을 추종하고 일본의 학자는 자존심 때문인지 자기네 조상이 만들었다고 합니다. 아래 그림은 목조반가사유상이 있는 고류지에 있는 또 다른 반가사유상입니다.


이 반가사유상은 국보 1호로 지정된 반가사유상보다 후대인 7세기 말엽부터 8세기 중반의 비조시대의 작품으로 알려지고 있는데 똑 같이 일본 국보로 지정이 되어 있지만 언뜻 보아도 똑같은 목제임에도 국보 1호보다 상당히 조형미가 떨어지는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 불상은 아마도 국보 1호를 본뜬 불상이 아닐까 생각되는데 조각 기법이나 제작기법이 국보 1호에 훨씬 미치지 못하는것을 사진으로도 알 수 있을 정도 입니다. 그러다보니 이 불상은 당연히 한반도에서 전래되었다거나 한반도의 불상을 모방한 불상이라는 말 조차 꺼내지 못하고 일본의 비조시대의 제작품으로 인정을 하고 만것입니다.

 그런데, 국보 83호인 금동미륵반가사유상이 백제계의 불상이라는데 이의를 제기한 학자가 동국대학교의 황수영 박사였습니다. 황수영 박사는 1959년 이 불상의 출처에 대해  원래 이 불상이 경상도 지방에서 출토되었다는 세키노의 발언을 주목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 불상이 이왕가박물관에 판매시 거래된 금액은 당시 어마어마한 금액이었던 2900원이었는데 중간의 악덕 상인들이 자신도 다른 사람으로 부터 구입을 했기에 원산지는 알 수 없는것 처럼 했기에 지금까지도 어디에서 출토가 되었는지 잘 모르게 되었지만, 최초에 이 불상에 대해 언급한 세키노의 말 처럼 "경상도"지방에서 출토되었다면 신라 땅 어디에선가 이 불상이 있던 자리가 있었을 것이라는 생각으로 경상도 신라땅을 수소문하여 이 불상이 정말로 신라의 옛 절터에서 나왔는지를 찾아보기로 한것입니다.

 황수영 박사는 제자인 정영호박사(현 단국대 박물관장)와 더불어 경주지역에서 수소문한 결과 드디어 원래 이 불상이 있었던 절을 찾게 되었습니다. 국보 83호인 금동미륵반가사유상은 옷칠이 된 위에 회분을 칠하였는데, 대부분의 목불이나 금동불은 칠을 하기전에 옷칠을 하는데 원 소유주는 옷칠 위에 다른 칠을 하지 않고 회분을 칠했던 것을 근거로 하여 수소문을 하였던 것입니다. 이 불상이 세간의 이목을 받게되자 경주 오릉 근처에 있던 불상이었다는 소문이 떠돌게 되었고 이소문을 접한 두 사람은 1964년 경주 남산의 산방谷에 있는 산방사라는 절의 할머니가 당시 4원(또는40원)이라는 거금을 주고 판매를 하였다는 사실과 원래 미륵반가사유상이 있던 위치를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두 사람은 수차례 방문하여 노보살에게 사실 여부를 확인하여 분명 신라의 불상이라는 것을 확신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러면, 왜? 아직도 이 불상의 족보에 대한 논란이 계속될까요? 한동안은 <미술사학>에 이 문제에 관한 연구 논문이 게제되고 맞느니 틀리느니에 대한 갑론을박이 있었지만, 원래 그 장소에 있는것을 본적도 없을뿐만 아니라 단지 노보살(이 노보살은 그후 사망하였음)의 증언에 의존한다는 것은 학문적으로 타당성을 입증하기에는 매우 부족한 입장이었고,  불상의 양식이나 형식의 정확한 연구가 진행되지 않은 상태에서 신라계다 백제계다를 말한다는것 자체가 무리였기 때문입니다. 결국은 신라계라는 확신을 가진 황수영 박사, 정영호 박사측은 신라의 불상으로 보고 있으며, 김원룡박사, 최순우 선생 등의 계열은 백제계의 불상으로 보는 것이며 두 학설간에 뚜렷한 물증이 없기 때문에 위대한 모나리자의 미소가 울고가게 할만한 이 위대한 공예품은 그저 <삼국시대>의 작품으로 전해지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다보니 출처가 애매모호한 반가사유상에 대한 연구는 지지부진하고 이에 대한 연구 논문이나 발표논문은 찾기가 힘든 지경이 되어버리고 만것입니다.

 그런데, 최근 몇년 사이에 이 불상은 우리 나라에는 부지기수로 많아져서 미처 제대로된 연구가 나오기도 전에 온통 사찰에 범람을 하고 있습니다. 이는 용화사상을 주로 하여 미륵불을 주존으로 모시는  법성종계열에서 중국으로부터 대량으로 미륵반가사유상을 수입을 해 왔기 때문인데, 우리의 금동미륵반가사유상과는 매우 흡사하지만 전문가의 눈이 아니라면 쉽게 구분하기 어려울 정도의 정교한 불상이 중국에서 대량으로 만들어져 우리 나라에 유입이 되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도 땅 속에 묻어두고 거름을 주거나 화학 성분을 부어 1~2년을 묻었다가 마치도 오래된 금동불에 녹이 슬은 모습으로 수입이 되고있는 것입니다. 어떻게 중국인들은 이런 모조품을 만들어 우리 나라에 수출할 생각을 다 하게 되었는지 기가막힐 따름이지만 이런 문제는 제가 직접 중국을 방문하여 확인을 해볼 요량이며, 그 불상이 단순하게 비슷하게 만든것이 아니라 매우 정교하게 만들어졌음은 궁금한 일이 아닐수 없습니다.

다음에는 이런 불상에 대한 에피소드를 겻들인 말씀을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 如       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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