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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수수께끼 > 가짜 고구려 불상...정말인가? 가짜인가? (3)

 앞면은 <금동계미명 삼존불>과 같고 뒷면의 명문은 <연가7년명 금동여래입상>의 명문을 그대로 배꼈다는 북한의 불상이 정말 가짜인가? 어떻게 동 시대에 제작된것이 아님에도 명문은 똑 같을까? 배꼈다고 하는 명문의 내용은 무엇인가? 등등에 대해서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우선 아래의 그림 두개를 보시기 바랍니다. 아래 그림은 <연가7년명 금동여래입상>의 전면과 광배 뒷면의 사진입니다.



 

 

 

 

 

 

 

 

 

 

 

 

 

이 불상은 1963년도에 경남 의령에서 농부에 의해 발견이 된 불상으로 신라의 영토였던 지역에서 발견이 되어 아직도 논란이 많은 불상인데 뒷면의 명문에 의하여 고구려의 불상으로 여겨지고 있습니다. 이 불상은 정영호 선생에 의하여 수습되었는데 당시 이 불상이 안치된 장소는 절터나 무덤이 아니라 임시로 무너져 내리지 않을 정도의 돌 함을 쌓고 그 속에 넣어져 있었다고 하는데, 정영호 선생은 이 불상이 북한군의 호지불로 후퇴 당시에 임시로 숨겨 둔 것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장충식 선생은 이 불상의 크기가 16.2cm에 달하는 것으로 보아 호지불로 소지하고 다니기에는 너무 크고 무겁기에 정영호 선생의 북한군 호지불설을 반박하고 있습니다. 신라 영토에서 발견된 것은 다소 의아하지만 경주의 호우총(壺우塚)에서 광개토대왕의 무덤에 사용되던 청동호우가 발견된 사례도 있어 다른 각도로 생각을 해 볼 수 있다는 이유입니다. 이 불상은 발견후 광배 부분에 손상을 입어 사진에서 보시는 바와같이 동강난 것을 접합을 했습니다.  장충식 선생은 만약 호신불로 소지하고 다녔다면 금을 입힌 불상의 어느 귀퉁이는 마모가 되었을텐데 전혀 그런 흔적이 없다는 것입니다.

 또 한가지는 이 불상의 제작연대에 대한 논란입니다. 延嘉는 고구려의 연호로 己未年인데 539년부터 60갑자의 차이를 학자마다 보이고 있어 539년, 599년, 479년, 419년으로 보는가 하면 심지어는 시대를 아주 낮춰서 고려 광종시대인 959년으로 편년을 잡는 학자도 있는것 처럼 편년에 대한 정확한 결론도 아직 마무리 되지 않은 상태이지만 전반적인 의견은 539년으로 보는 경향이 강합니다. 불상의 세부 표현기법이나 양식을 논하는것은 조금 어렵기에 생략을 하고 바로 명문에 대해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광배의 뒷면에는 47자의 명문이 음각되어 있습니다. 명문은 모두 해독이 가능한데 명문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延嘉七年在己未高麗國樂良

東寺主敬第子僧演師徒十十十十人共

造賢劫千佛流布第十十九因現義

比丘法潁所供養

연가 7년 기미년에

고려 낙랑 동사라는 절의 주지이며

부처님을 공경하는 제자 승연을 비롯한

사도 40명이 현겁 천불을 만들어 유포한

 29번째 인현의불을

비구인 법영이 공양한다

 

  이 명문은 국내에서도 단 두글자를 놓고 의견이 분분한 입장이며 최근에는 불교의 경전인 <현겁경>에 나온 내용을 주장하여 비교적 타당성을 인정하는 추세인데, 문제는 오역한 명문을 북한의 유물에 그대로 사용하였다는 것입니다. 쉽게 말하자면 컨닝을 하였는데 다시 고친것을 모르고 틀린 답을 그대로 적어낸것과 같다는 것이지요.

 그럼...문제가 되는 내용을 다시 한번 자세히 살펴 보도록 하겠습니다. 이 불상을 발견한 후에 학자들은 명문을 해독하는 과정에서 위의 파란 밑줄친 내용을 다르게 해석을 하였습니다. 

因現義 이라고 해석된 부분을 回現歲佛로 해석하였던 것인데 이 명문에는 붉은 표시를 한 "歲"와 回現歲佛에서의 "歲"는 비슷하게 새겨져 있지만 분명한 차이가 있습니다. 따라서 '回現歲佛' '回現義佛' 해독하는것이 타당하다 할것입니다.  회현세불이란 의미는 억지로 해석하자면 다시 태어나는 부처라는 의미가 되는데 그런 의미로 사용될 경우의 새로운 세상이란 의미는 '現世'가 맞는 말입니다. 그러다보니 回現義佛이란 한자는 <현겁경(賢劫經)>에서 말하는 因現義는 것을 밝혀내게 된 것입니다.

좌측 사진에 나타난 '回'자는 '因'의 고어로 판단이 되는 것이며 이는 불교의 경전에 나타난 "제29인현의불"과 같은 내용으로 가운데 들어있는 'ㅁ'이 바깥의 'ㅁ'좌측에 붙은 글자라는 것입니다. 고어라는 것도 경전의 내용과 일치하기에 알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북한 유물인 <연가7년명 금동일광삼존불>에는 모두 46자의 명문을 담고 있는데 47자의 <연가7년명 금동여래입상>에서 '主'자가 빠졌고 마흔을 뜻하는 "十十十十"대신 "此"로 음각되어 있는 것입니다.

 똑 같은 명문이 서로 다른 불상에 새겨진다는 것이 있을 수 없는 일이며, 특히 잘못 판독되었던 부분을 그대로 배끼는 실수를 북한 유물에 저질렀던 것입니다. 주최측에서도 이 문제에 대하여 북한의 유물에 새겨진 명문은 후대에 새겨진 것이라는데는 어느 정도 동의를 하는 편이지만 유물 자체는 고구려 유물이라고 하고 있습니다. 북한은 이 유물이 평양의 고구려 왕궁터에서 발굴이 되었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한번 짚고 넘어가야할 부분이 있습니다. 지금 좌측의 명문 확대사진에서는 분명히 "回(회)"로 읽어야 될 한자입니다만, 문헌자료에 해당하는 불교의 경전인 <현겁경>이 있었기에 회가 아니라 "因(인)"이라는 것을 밝힐 수 있었습니다. 미술사학에서는 이렇게 문헌자료와 실물자료의 일치를 매우 중요하게 여기고 있습니다.

<에필로그>

 한솔동의보감에서 열렸던 전시회에 출품된 북한의 유물은 어떤 경로로 우리 나라에 들어와 전시가 되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북한에서는 국보급 유물로 알려져 있습니다. 제 개인적인 생각입니다만, 주최측에서 주장하는것과 마찬가지로 유물 자체는 비교적 나이가 들은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북한에서는 이 유물에 대한 명확한 출처를 밝힐 수 없었기에 똑 같은 명문을 새긴것이 아닌가 합니다. 그러나 정확한 이유는 어디에 있는지...먼 훗 날 알 수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또 한가지...저도 <연가7년명 금동여래입상>의 명문에 대한 구구한 논란이 될 때 "回"로 이해를 했었습니다. 그러나 학자들의 꾸준한 노력으로 관련 문헌을 찾아내고 그러므로써 명문에 대한 올바른 판독이 가능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연가7년명 금동여래입상>의 정확한 출토 경위에 대한 연구가 지속되어야 할것이며 중국의 불상의 형태에 대한 연구로 제작년대가 언제인지도 명확하게 밝혀져야 할것입니다. 현재까지의 연구결과로는 539년이 아닌가 하는 의견이 비교적 많은데 이에 대한 지속적인 연구가 바로 불상의 탄생이 언제인가를 알 수 있는 길이 될 것입니다.

                                                                                 < 如       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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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수수께끼 > 금동반가사유상.....백제것인가? 신라것인가? (2)

 금동반가사유상이 갖는 아름다움은 무엇일까?  우선은 반가사유상이 나타나게 된 배경을 알아보는것이 중요하다 할것입니다. 한마디로 말하자면 "불교의 메시아"인 미륵보살은 56억 7천만년 후에 나타나 중생을 구제한다는 미래불인 셈입니다. 그리고 '사유'란 고뇌하는 모습이라고 말할 수 있는데 그럼 반가사유상은 과연 어떤 고뇌에 빠져 있는것일까요? 사유상의 출현은 출가하기전의 태자의 신분이었던 '싯다르타'가 인간이 갖는 4가지 고뇌, 즉 生老病死에서 벗어나는 방법을 찾는 고뇌의 모습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4가지 고뇌속에서 번민하던 '싯다르타' 태자는 무엇을 느꼈기에 얼굴에 야릇한 미소를 머금고 있는 것일까요?

 그것도 턱을 괸것도 아니고 손가락 하나가 얼굴과는 닿은듯 만듯 정말로 손가락 전체도 아닌 점으로써 뺨과 닿아있으며, 고개는 약간 숙인채 얼굴에 담고 있는 미소....한마디로 오묘하다고 표현되는 얼굴표현에는 나름대로의 중생 구제의 방법에 대해 수만가지의 말을 뱉어낼것만 같습니다. 즉, 오랜 고뇌의 기간을 거쳐 드디어 중생구제의 방편을 알아냈다는 미소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왼 무릎위에는 한 쪽 발을 올려놓고 있는데 엄지 발가락에 잔뜩 힘을 주어 구부리고 있는 모습입니다. 제가 보기에는 분명 잔뜩 힘을 주고 있읍니다만, 미사려구를 구사하기 좋아하는 학자들은 이 모습이 달리 보이는지 발가락의 구부림이 너무나 자연스럽다고 합니다만, 자연스럽다는 말은 힘을 주지 않았다는 말이지만 그냥 힘을 주지 않고 오른 발을 왼 무릎에 올려놓으면 전혀 지금의 모습은 흉내도 낼 수 없습니다. 결국은 무슨 이유에서인지는 몰라도 발가락에 잔뜩 힘을 주고 있다고 볼 수 있는 것입니다.

 눈은 자세히 보면 입가의 살포시 웃는 모습과 어울리게 지그시 내려깔고 중생을 굽어보듯 하는데 바로 미소와 더불어 이런 눈매가 미륵보살로서의 위엄을 한껏 갖추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이 반가사유상의 미소에 대해 최순우 선생은  "이 반가사유상의 아름다움은 인간이 만들어낼 수 있는 모든 아름다움을 초월한 것이며.......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한아(閑雅 :막을수 없는 아름다움)의 아름다움은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한숨을 내쉬게조차 한다....서양인은 모나리자의 미소를 최고로 여겨 '영원한 미소'라고 예찬하는데 미륵보살반가사유상과 나란히 놓는다면 모나리자의 미소 정도는 당장 안색을 잃을것임에 틀림없다" 고 하였습니다. 아주 점잖게 반가사유상의 미소를 치켜세웠지만 다른말로 이야기 하자면 모나리자도 반가사유상의 미소를 보면 울고 간다는 말 정도로 해석을 하면 될것입니다. 이 반가상의 머리에는 도교사상에서 나온 삼산관이 얹혀있어 간단하게 "삼관미륵"이라고도 불리어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불상의 출처에 대해서 아직까지도 확실하게 알지 못한다는 안타까움이 있는 것입니다.  처음 이 반가사유상이 세상에 나타나게 된 시기는 1912년 입니다. 당시 이왕가박물관(일본인이 1910년의 한일합방 이후에 대한제국의 황제칭호를 깔아뭉개기 위해 조선 임금의 가계를 <왕가(王家)>로 낮춰 부르게 되었습니다)이 이 반가사유상을 입수할때는 중계인이 '경주 근처의 폐사에서 가져왔다'고 하였기에 신라의 작품으로 알았었으나 한일합방 이전부터 우리 나라의 고적을 조사해온 일본인 학자 이네다(稻田)가 '1910년 충청도에서 올라왔다'고 하는 바람에 신라것이냐 백제것이냐를 놓고 헷갈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조선미술사>의 저자인 세키노(關野貞)는 "조산 삼국시대의 조각"에서 두 구의 미륵반가사유상을 고신라의 유물로 단정하여 '후치가미 사다스케가 총독부에 기증한 것으로 출처가 확실하지 않으나 경상도에서 발견한듯 하다'고 기록하여 경상도 출토설에 힘을 실어 주었다. 그후 1915년 바로 이네다의 충청도 출토설이 나오게 되는데 이 때는 그체적인 높이(2자9치7푼)가 제시되어 백제계의 반가사유상으로 인정하기에는 나름대로의 신빙성이 있게 되었습니다.

  우리 나라에는 금동, 석불, 마애불 등 모두 32구의 반가사유상이 있지만 1945년 이후에 우리의 손으로 발굴된것 이외에는 반가사유상이 고구려의 것인지 또는 신라나 백제의 것인지 명확하게 알 수 있는 것이 애석하게도 하나도 없습니다. 그 이유는 대부분의 불상이 고가에 거래되었지만 그 출처에 대한 추궁이나 법적 책임이 두려워 대부분은 오랜 동안을 숨겨 두었다가 내다 바는 악덕 골동품상(거의 일본인)들로 인하여 유물이 갖고 있는 족보가 멸실되어 버렸기 때문입니다. 결국은 이네다의 주장대로 이 반가사유상은 충청도 지역에서 올라온 백제계의 반가사유상으로 알려지게 되었고, 돌아가신 김원룡, 최순우 두분은 이 불상이 백제의 작품이라는 확고한 믿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우리 나라에 있는 두 구의 불상이 어디것이냐 하는것에 대한 명확한 결론이 없고 갑론을박 하는데 엉뚱하게도 일본에서 더 애써 원산지를 찾는 작업을 추진하는 일이 발생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일본의 국보 1호로 지정된 목조금동반가사유상 때문입니다. 이 불상은 비록 나무로 만들어졌지만 우리 국보 83호인 '삼관미륵'의 복제품이나 마찬가지로 쏙 빼닮았기 때문입니다. 이 불상은 일본의 고류지(광륭사)에 소장하고 있는데 우리 나라의 불상의 원적이 어디냐에 따라 이 불상의 원적도 덩달아 원적 변경이 불가피하기 때문입니다.그런데 일본에 있는 이 목조반가사유상에 대해서는 "한반도에서 전래된 것이다" 또는 "한반도 사람이 건너가서 만든 것이다", "일본에서 만들었다(대부분의 일본학자 주장)"는 등 여러가지 주장이 있는데 주로 우리 학자들은 위의 두 가지 학설을 추종하고 일본의 학자는 자존심 때문인지 자기네 조상이 만들었다고 합니다. 아래 그림은 목조반가사유상이 있는 고류지에 있는 또 다른 반가사유상입니다.


이 반가사유상은 국보 1호로 지정된 반가사유상보다 후대인 7세기 말엽부터 8세기 중반의 비조시대의 작품으로 알려지고 있는데 똑 같이 일본 국보로 지정이 되어 있지만 언뜻 보아도 똑같은 목제임에도 국보 1호보다 상당히 조형미가 떨어지는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 불상은 아마도 국보 1호를 본뜬 불상이 아닐까 생각되는데 조각 기법이나 제작기법이 국보 1호에 훨씬 미치지 못하는것을 사진으로도 알 수 있을 정도 입니다. 그러다보니 이 불상은 당연히 한반도에서 전래되었다거나 한반도의 불상을 모방한 불상이라는 말 조차 꺼내지 못하고 일본의 비조시대의 제작품으로 인정을 하고 만것입니다.

 그런데, 국보 83호인 금동미륵반가사유상이 백제계의 불상이라는데 이의를 제기한 학자가 동국대학교의 황수영 박사였습니다. 황수영 박사는 1959년 이 불상의 출처에 대해  원래 이 불상이 경상도 지방에서 출토되었다는 세키노의 발언을 주목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 불상이 이왕가박물관에 판매시 거래된 금액은 당시 어마어마한 금액이었던 2900원이었는데 중간의 악덕 상인들이 자신도 다른 사람으로 부터 구입을 했기에 원산지는 알 수 없는것 처럼 했기에 지금까지도 어디에서 출토가 되었는지 잘 모르게 되었지만, 최초에 이 불상에 대해 언급한 세키노의 말 처럼 "경상도"지방에서 출토되었다면 신라 땅 어디에선가 이 불상이 있던 자리가 있었을 것이라는 생각으로 경상도 신라땅을 수소문하여 이 불상이 정말로 신라의 옛 절터에서 나왔는지를 찾아보기로 한것입니다.

 황수영 박사는 제자인 정영호박사(현 단국대 박물관장)와 더불어 경주지역에서 수소문한 결과 드디어 원래 이 불상이 있었던 절을 찾게 되었습니다. 국보 83호인 금동미륵반가사유상은 옷칠이 된 위에 회분을 칠하였는데, 대부분의 목불이나 금동불은 칠을 하기전에 옷칠을 하는데 원 소유주는 옷칠 위에 다른 칠을 하지 않고 회분을 칠했던 것을 근거로 하여 수소문을 하였던 것입니다. 이 불상이 세간의 이목을 받게되자 경주 오릉 근처에 있던 불상이었다는 소문이 떠돌게 되었고 이소문을 접한 두 사람은 1964년 경주 남산의 산방谷에 있는 산방사라는 절의 할머니가 당시 4원(또는40원)이라는 거금을 주고 판매를 하였다는 사실과 원래 미륵반가사유상이 있던 위치를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두 사람은 수차례 방문하여 노보살에게 사실 여부를 확인하여 분명 신라의 불상이라는 것을 확신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러면, 왜? 아직도 이 불상의 족보에 대한 논란이 계속될까요? 한동안은 <미술사학>에 이 문제에 관한 연구 논문이 게제되고 맞느니 틀리느니에 대한 갑론을박이 있었지만, 원래 그 장소에 있는것을 본적도 없을뿐만 아니라 단지 노보살(이 노보살은 그후 사망하였음)의 증언에 의존한다는 것은 학문적으로 타당성을 입증하기에는 매우 부족한 입장이었고,  불상의 양식이나 형식의 정확한 연구가 진행되지 않은 상태에서 신라계다 백제계다를 말한다는것 자체가 무리였기 때문입니다. 결국은 신라계라는 확신을 가진 황수영 박사, 정영호 박사측은 신라의 불상으로 보고 있으며, 김원룡박사, 최순우 선생 등의 계열은 백제계의 불상으로 보는 것이며 두 학설간에 뚜렷한 물증이 없기 때문에 위대한 모나리자의 미소가 울고가게 할만한 이 위대한 공예품은 그저 <삼국시대>의 작품으로 전해지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다보니 출처가 애매모호한 반가사유상에 대한 연구는 지지부진하고 이에 대한 연구 논문이나 발표논문은 찾기가 힘든 지경이 되어버리고 만것입니다.

 그런데, 최근 몇년 사이에 이 불상은 우리 나라에는 부지기수로 많아져서 미처 제대로된 연구가 나오기도 전에 온통 사찰에 범람을 하고 있습니다. 이는 용화사상을 주로 하여 미륵불을 주존으로 모시는  법성종계열에서 중국으로부터 대량으로 미륵반가사유상을 수입을 해 왔기 때문인데, 우리의 금동미륵반가사유상과는 매우 흡사하지만 전문가의 눈이 아니라면 쉽게 구분하기 어려울 정도의 정교한 불상이 중국에서 대량으로 만들어져 우리 나라에 유입이 되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도 땅 속에 묻어두고 거름을 주거나 화학 성분을 부어 1~2년을 묻었다가 마치도 오래된 금동불에 녹이 슬은 모습으로 수입이 되고있는 것입니다. 어떻게 중국인들은 이런 모조품을 만들어 우리 나라에 수출할 생각을 다 하게 되었는지 기가막힐 따름이지만 이런 문제는 제가 직접 중국을 방문하여 확인을 해볼 요량이며, 그 불상이 단순하게 비슷하게 만든것이 아니라 매우 정교하게 만들어졌음은 궁금한 일이 아닐수 없습니다.

다음에는 이런 불상에 대한 에피소드를 겻들인 말씀을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 如       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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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수수께끼 > 금동반가사유상.....백제것인가? 신라것인가?

금동반가사유상....그 힘없는 미소를 머금은 금동반가사유상은 보는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기에 충분합니다. 이런 반가사유상은 비슷한것이 우리 나라의 국립박물관에 2개, 그리고 일본의 국보 1호로 지정된 일본 고류지(廣隆寺)에 있는 목조반가사유상 등 현재까지 알려진것은 모두 3개 입니다. 그런데 3개의 반가사유상이 모두 제각각의 특징을 가지고 있는데 그것은 먼저 유사한 형태이면서도 결코 같은것이 아니라는 점이며, 두번째는 3개 모두의 정확한 출처를 알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이런 문제는 양식적 특성으로도 유사한 형태의 불상이 나타나지 않는 관계로 다른 불상과 비견하여 결정하기 어려운 입장으로 문헌이나 출처를 근거로 하여 어느시대의 조성물인가를 판단해야 하지만 그 마저도 일관성이 없어 지금은 그저 삼국시대의 반가사유상이라고 명기하여 이 불상의 출처로 인한 갑론을박을 애써 피하고자 하고 있습니다.



 

 

 

 

 

 

 

 

 

 

 

 

 

 

 위의 사진은 국립박물관에 보관중인 국보 제 78호(좌)와 국보 제 83호(우)로 지정된 <미륵보살반가사유상>입니다. 좌측 불상의 높이는 83.2cm,우측 불상은 93.5cm로 우측 불상이 10cm가량 높이가 높습니다. 이 두개의 비슷한 반가사유상을 자세히 눈여겨 보신다면 똑같은것 같으면서도 매우 다름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이번 이야기는 이 두 불상의 미술사학적 고찰과 아울러 출처에 관한 문헌과 관계자의 증언, 그리고 일본 국보 1호로 지정된 목조반가사유상에 관하여 각각의 특성을 설명하므로써 어느 시대의 불상으로 판단을 해야하는지에 대해 이 글을 읽으시는 분들의 나름대로의 기준을 설정하실 수 있도록 해 보겠습니다.

 과연 백제의 불상인가? 또는 관계자들의 증언에 의하여 신라불상으로 봐야 하는가? 일본의 불상을 일본인들은 비조시대의 불상으로 바득바득 우기고 있는데 과연 그들이 주장하듯 정말 일본 불상일까?  아니라면 우리의 두 개의 불상과 매우 비슷한 양식이어서 우리것인데 일본으로 건너갔던가, 또는 적어도 일본으로 건너간 우리 나라 사람이 제작한 것인가? 에 대한 고찰을 해 보는것도 바람직할것 같습니다. 이러한 문제는 우리와 일본 사이에 문화교류의 커다란 쟁점이 되고 있는 실정으로 아직도 결판이 나지 않은 상태입니다. 또 한편으로는 각각의 불상이 갖는 미적 감상기준은 어디에 있는가를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웃옷을 입은 단정한 불상과 웃옷도 훌러덩 벗어버린 불상....과연 이 불상은 어느시대의 불상일까요?  앞으로 2차례에 걸쳐서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 如       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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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수수께끼 > 여주 신륵사 다층석탑에 관한 몇 가지 의문들....(1).

  여주의 남한강을 끼고 신륵사라는 고찰이 있습니다.  이 절을 처음 건립한 시기는 신라의 진평왕 때 원효대사가 창건했다는 이야기도 있으나  이것을 뒷받침 할만한 유물이나 유적은 물론이고 문헌자료도 없습니다. 그러나 고려 우왕(禑王)2년인 1376년에 나옹(懶翁)선사가 이 절에서 입적하면서 절의 이름이 널리 알려지게 되었습니다조선조에 이르러서는 경기도 광주의 대모산(지금 남한산성의 송파쪽)에 있던 世宗의 묘를 여주로 이장하면서 왕실에서는 신륵사를 원찰(願刹)로 삼고 절 이름도 報恩寺로 바꾸고, 전각이나 건물을 새로 꾸몄습니다. 현재 신륵사 경내에는 고려말부터 조선시대에 걸쳐 조성된 많은 유물이 있으며 특히 이곳에서 입적한 보제존자(普濟尊者) 나옹선사의 부도를 비롯한 유물과 대리석으로 만들어진 다층석탑이 있으며, 강변에는 돌을 벽돌처럼 다듬어 세운 전탑등 다수의 유물이 남아 있습니다.  신륵사의 유물중 다층석탑의 건립연대에 대한 의문점을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이미 말씀을 드렸지만 학문에서 형성되는 학파라는 개념은 한 스승 밑에서 배우는 입장에서 공감대를 형성하고 있다는 것인데, 이 탑은 30여년전에 필자의 스승이 조사를 하여 그 조사 결과가 오늘날까지 정설로 받아들여져 내려오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저는 이 탑을 조사하면서 제 스승과는 다른 견해를 갖게 되었습니다.  이 탑의 조성연대를 조선시대로 보고 있지만 저는 건립 시기가 조선시대 이전의 고려말, 또는 그 이전으로 보는 것입니다. 조선시대에 건립된 탑은 우리 나라에 있는 1300여기의 탑중 20여기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삼국시대나 고려시대와는 달리조선은 억불정책으로 탑이 많이 조성되지 않은것이 이와 관련이 있거나 또는 기왕에 절간이 세워지면서 탑이 세워져 있었기에 새로운 탑의 건립을 염두에 두지 않아서 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신륵사 석탑은 일반적으로 조선시대에 건립된 것으로 알려졌으나 제가 보는 조형수법과 탑을 구성하고 있는 재료, 그리고 탑에 장식된 문양에 나타나는 조각 형식등에 대한 의문점으로 이 탑에 대한 재 조사를 했던 것입니다.  스승의 조사 결과를 제자가 번복하는 일은 학파에 몸 담고 있는 사람으로서는 대단한 모험을 하는 일이지만 몇 가지 이 탑이 갖는 의문점을 기준으로 그 의문에 대한 하나 하나의 조사로 이 탑에 접근을 하기 시작 했습니다.

    신륵사 다층석탑은 대리석으로 만든 탑으로 신라시대나 고려시대의 일반적인 석탑 양식을 따르고 있습니다. 먼저 탑의 아랫부분인 기단부는 2층으로 되어 있고 그 위에 여러 층의 탑신(탑 몸통돌)을 얹은 사각형의 석탑인데 세부 조형을 살펴보면 신라나 고려의 조형수법과는 다른 새로운 양식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특히 기단석에 비룡(飛龍)을 조각하는 경우는 매운 드문 경우로 이것은 신륵사의 창건과 관련된 설화의 내용을 담았는지 모르겠지만 조각 수법이 무척 세련되고 화려하게 장식되어 있어 자칫 무겁게만 보일 수도 있는 탑의 무게를 조각이 덜어주고 있습니다.

 이 탑의 재료는 대리석인데 이 석재는 당시에는 구하기도 힘든 석재인데 왜 대리석으로 조성하게 되었는지에 대한 연구가 필요하며, 과연 이 탑이 보여주고 있는 양식으로 판단할 때 이미 알려진 대로 조선시대의 탑인지..아니라면 언제 조성된 탑인지를 정확하게 알아 볼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이 탑은 3m에 불과한 비교적 작은 석탑이지만 기단부 부터 탑의 몸돌인 탑신부에 이르기 까지 각 층의 돌은 모두 1개의 돌로 만들어져 있습니다. 이렇게 작은 석탑의 각 부재를 1개의 돌로 만들게 된것은 대리석이라는 재료를 구하기가 어려워서 탑을 크게 만들 수 없는데 기인한 것이 아닌가 합니다. 이 탑은 일반적인 석탑의 전형을 그대로 따랐지만 각 부재에 있어서는 그 세부 감각을 전혀 달리하고 있는데 이 또한 재료가 대리석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기단부는 지대석 윗면에 단엽으로 복련문양을 조각하고 그 위에 2층으로 된 기단으로 구성되었는데 아랫층 기단 갑석의 윗면과 윗층 기단 갑석 아랫면에도 연화문(蓮花紋)을 장식하였습니다.  위의 사진에 나타난 용의 문양이나 우측 사진인 기단에 나타난 문양의 조각은 매우 섬세하며 화려하게 조각되어 있습니다.  .                                                          <신륵사 다층석탑의 상하층 기단>

탑의 몸돌인 탑신부는 현재는 8층 탑신부 까지 남아 있지만, 몇 군데 옥개석의 체감율이 맞지 않아 원래의 정확한 탑이 몇 층이었는지를 추정하기는 쉽지가 않으며 탑의 맨 윗부분인 상륜부는 현재는 철제로 된 찰주(刹柱)만 남아 있고 다른 부재는 하나도 남아있지 않은 상태입니다.

   이와같이 모든 점을 살펴보면 신륵사 다층석탑은 지대석 윗면에 연꽃문양을 조각하여 화사한 지대를 이루고 있는데,  기단부에 연화문을 장식한 예는 많지만 이 탑 처럼 지대석에 연화문을 장식한 경우는 흔한 일이 아닙니다.  기단부에 있어서는 면석의 각 우주(귀퉁이 돌)에 화문(花紋)을 모각한 것이라든가, 기단 상층 깁석을 기단 하층 갑석의 하반부형(下半部形)으로 만들어서 조금이라도 무거운 느낌을 줄이고자 하는 점은 이 탑에서 주목할만한 형식이라고 하겠습니다.

   특히 지대석에 용과 구름, 파도 문양을 조각한 수법은 주로 스님의 무덤인 부도(浮屠)에 조각되는 수법인데 특이하게도 이 탑에서는 신라시대나 고려시대에는 없던 문양의 특성을 보이고 있는 것입니다.

   ** (2)편에서는 이 탑이 갖는 5가지의 의문점을 제시하고, 그 의문점을 하나 하나 풀어가도록   

         하겠습니다.

                                                                    < 如       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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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수수께끼 > 신라의 조각과 회화에 반영된 신라인의 美意識....(1)

 신라인의 미의식을 논하기 위해서는 우선 삼국시대의 신라 미술품과 통일 신라시대의 미술품을 접할 수 있어야 하나, 우리가 접하기에는 그 수가 너무 적다고 보겠습니다. 그러나 현존하는 신라인의 미술품으로도 당시 성행했던 신라인의 문화를 엿볼 수 있음은 그나마 다행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삼국 중 가장 늦게 불교를 받아들인 신라의 문화는 정치적 안정을 이루는 통일신라 이후에는 더욱 융성한 불교를 바탕으로 고구려, 백제의 문화를 융합하면서 발전을 해 왔으며, 특히 당나라 문화의 유입을 통하여 독창적인 신라인만의 문화를 만들 수 있었습니다.

 신라사람들에게 있어 의식의 정신적 지주 역할을 하였던 불교를 바탕으로 불교 문화는 여러 가지 교리적 해석과 더불어 다양하고 풍부한 표현방법과 더불어 세련된 기술에 의한 양식으로 발전하여 정착하게 되었습니다. 특히 불상을 중심으로 한 조각 작품들은 아름다움에 관심을 두면서도 균형과 조화를 이루는 세련미를 갖추게 되었는데, 이런 발전을 통해 이루어진 신라의 예술에 담긴 신라인의 미의식을 간단하게나마 조각과 회화를 통해 알아보겠습니다.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예술의 발전에 있어서 그 내용의 완전한 이해와 새로운 의식의 변화가 있어야 표현이나 기술적 발전에 의한 숙달된 기법이 발전을 하게 되는데, 신라는 불교라는 정신적 바탕위에 새로운 형태로서의 문화의 발전을 가져 왔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는 불교를 국교로 숭배하며 일반 국민은 물론이고 지도층의 의식에 불교가 커다란 작용을 하였기에 일체가 되어 이룰 수 있었던 결정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불교가 하나의 숭배적인 종교로 정신적 지주의 형태를 갖게 되므로써 그에 따라 불상 등 불교 중심의 문화가 발전하는것은 당연한 일이라 하겠습니다. 즉, 불교라는 종교에 대한 열성이 고조되고 깊은 신앙심이 팽배함에 따라 이를 바탕으로 한 문화적 소산물로서 예술의 꽃을 피우게 되는것이 신라 문화의 특성이라 하겠습니다.

 이러한 신라의 예술을 조각과 회화로 나누어 설명을 하겠습니다. 먼저 조각을 살펴보면 새로운 종교의 수용 초기에는 그 종교의 이념에 따른 철저한 수행이나 정신적, 탈속적(脫俗的)인 요소가 강조됨에 따라 종교로서의 대상은 상징적으로 예배되는 경향이 강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것은 인간 본위의 구체적 형상으로 재현할 수 있어야 하는데 이러한것은 단기간에 이루어 지는 것이 아니라 얼마간의 시일을 필요로 하게 됩니다. 따라서 신앙심의 절정에 이르면 그 정신적 전통을 이어받아 예술은 가장 아름다움의 극치로 펼쳐진다고 할 것입니다. 신라의 조각은 바로 이러한 불교의 정신적인 바탕 위에 이룩된 하나의 결정체이며 신앙심이 깊어짐에 따라 불상 표현의 원칙이 세워지고 이러한 신라인의 불상 표현에 대한 미의식의 변화는 삼국시대 불상의 인간적인 표현에서 조금 더 위엄이 서리고 자비로운, 즉 인간과는 구별되는 신앙의 대상으로서의 조형의식을 갖추게 되는 것입니다.

 그 하나의 예로 경주 九黃洞의 삼층석탑에서 발견된 순금製 "아미타여래좌상(阿彌陀如來座像)"은 현실 세계를 떠나서 사색의 경지에 몰입한 부처의 자비스러운 미소를 곁들임으로해서 신라인의 의식이 투영된 불상 표현이 나타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지금까지 불상 표현의 소재를 찾던 상징적인 단계에서 한 단계 올라 조금 더 형이상학적인 불교 교리의 본질적 문제에 접근하여 그 개념을 시각적인 조형물을 통하여 표현하고자 하는 의식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은 특정적인 佛身 표현의 강조나 설명적인 묘사에서 벗어나 인체의 형상을 빌은 조형을 통하여 無量한 法門을 전달하려는 것이라고 하겠으며 이러한 사실적이면서도 이상화된 인체 표현을 빌어 깊은 사색과 法悅의 경지에 이르고 중생을 계도하는 표정에서 정신력의 실체를 모색하고자 했던 것입니다. 이런것으로 판단하면 불교가 신라인의 의식에 깊게 잠재하여 조형물을 만드는 사람이나 그 만들어진 조형물에 예배하는 사람 모두가 공감하는 조형 예술의 세계가 이루어지고 있었음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안압지에서 출토된 "금동여래삼존판불(金銅如來三尊板佛)"이나 "금동여래입상(金銅如來立像)"에서도 마찬가지로 균제(均濟)된 불신의 형태나 정교한 주조기술로 조각의 아름다움을 표현하고 있으며, 이런 조각을 통하여 불법의 실체를 체험하고 구현하려는 신라인의 미의식이 반영된 것이라 볼 수 있습니다. 특히 이러한 미의식은 신라인의 균제와 조화의 예술 표현이 순수한 종교성과 하나로 융합하여 조각 양식의 절정을 이루게 되는데 그 대표적인 예가 바로 석굴암의 본존불과 주변의 불상이라 할 수 있습니다. 석굴암 본존불에 나타난 단순하면서도 정제(淨濟)된 불신의 표현과 형태는 중생이 갖는 고뇌의 속박에서 벗어나 무아의 경지에 이른 숭고한 얼굴 표정으로 존엄무비(尊嚴無比)한 종교 조각으로서의 면모를 보여주고 있는데 이러한 조형예술은 단시간내에 이루어 진것이 아니라 오랜 기간 연마된 조형기술의 뒷받침속에 신앙과 결부되어 이루어졌다 할 것입니다.

    *  다음글은 회화에 나타난 미의식에 대해 말씀 드리겠습니다.

                                 <如        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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