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스트코로나' 시대의 삶을 향한 제언이 앞다투어 출간되는 경주에 '위험한 철학자' 슬라보예 지젝이 참가했다. 코로나 사태에 대한 철학적 사유가 담긴 책, 우리가 지닌 '철학'의 총체적인 변화를 촉구하는 책으로는 처음인 듯하다. 한번 곱씹어볼 만한 흥미로운 단상을 여럿 포함하고 있다. (부담 없는 분량이 좋다.) 특히 마지막 장 <사마라에서의 약속>에서 "진정한 전복적 잠재성"을 내재한 '집합체assemblage 개념'이라는 렌즈로 정치사회를 분석하는 대목은 과학기술학에 관심이 있는 독자라면 흥미로울 것이다. 


결국 지젝이 강조하는 것은 여느 과학기술학자와 마찬가지로 인간의 행위성뿐 아니라 온갖 비인간(예컨대 코로나19 바이러스)의 행위성까지도 인정해야 하며, 비인간의 행위로 인해 인간-비인간의 전체 네트워크가 예측할 수 없는 방향으로 변화하기도 한다는 '탈인간적' 관점이다. 


비인간의 행위성을 논의할 때 주로 인용되는 학자는 (지젝도 인용했듯이) 브뤼노 라투르다. 라투르 또한 비인간이 인간에 의해 변형될 뿐만 아니라 동시에 비인간이 인간을 변화시키기도 한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라투르의 저작 『프랑스의 파스퇴르화』를 생각해보자(Latour, 1988). 백신이 더욱 많은 행위자들과 연결되어 그 실재성이 증가함에 따라, 연결된 행위자들('행위소' 또는 '행위 주체')도 변화했다. 파스퇴르의 실험실은 농업 이해관계의 중심이 되었으며, 수의사들은 파스퇴르의 과학을 장려함으로써 지위를 향상하려 했다. 농부들은 백신을 사용하여 양과 소의 수명을 늘림으로써 큰 이득을 취했다. "'실험실이 있는 곳은 어디이고 사회가 있는 곳은 어디인지'를 얘기하는 것은 불가능하다."(Latour, 1983: 60) 요컨대 사실과 실재는 "인간-비인간의 연합"으로 정의되는 "집합체"(collective) 속에서 인간과 비인간 사이의 복잡한 연결을 통해 구성되는 것이다(Latour, 2018[1999]: 481). 


라투르는 이러한 실재 구성 과정을 『판도라의 희망』에서 '명제-접언 모델'로 모델화했다. 모든 행위소―즉, 파스퇴르, 젖산균, 실험실 등―, 그리고 실험실에서 구현된 특정한 인공적인 조건들은 "명제"(propositions)이며, 서로 "접언"(articulation)되는 관계 속에서 서로가 서로의 의미를 변형시킨다(Latour, 2018[1999]: 227-31). 젖산균은 파스퇴르에 의해 실험실의 수많은 인공적 조건, 아카데미의 동료와 접언됨으로써 실체가 되고, 파스퇴르는 실험실을 통해 젖산균과 접언됨으로써 젖산균을 처음으로 '발견'한 인물이 되었다. 


비인간의 행위성은 파스퇴르, 실험실, 농업 시스템을 변화시키는 데서 그치지 않는다. 보다 일반적인 논의가 가능하다. 집합체의 연결망 속에서 인간과 사회처럼 자연도 계속해서 변화하기 때문에, 즉 역사를 가지기 때문에 그것들로 이루어진 집합체 또한 지속적으로 변화한다. 인간과 비인간이 서로에게 뒤얽히며 집합체를 변화시키는 것이다. 인간과 비인간은 갈수록 더 많이 혼합되어, "이제는 행성 전체가 정치, 법, 그리고 ··· 도덕성을 만들어내는 데까지 가담한다고 할 수 있을 정도"가 되었다. 라투르는 이런 의미에서 우리는 비인간들을 정당한 "사회적 행위자"로 보아야 하며, 그들을 포함한 정치적 제도를 발명하고 구현해야 한다고 주장한다(ibid., 334-5). 바로 집합체를 인간-비인간의 "질서정연한 전체"인 "코스모폴리틱스"(cosmopolitics)로 이끌고 갈 정치적 제도 말이다(ibid., 49, 335). 지젝이 "맹목적으로 스스로를 분화하고 변이할 뿐인 그 멍청한 바이러스들"이라 표현한 코로나19 바이러스도 코스모폴리틱스의 일원임은 물론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떤 정치의 정의를 확립하여야 하는가? 우리는 우리의 정치체를 어떻게 코스모폴리틱스로 이끌 수 있는가? 우선 라투르는 소피스트, 특히 칼리클레스에 대한 플라 톤의 부정적인 논평이 담긴 대화편 『고르기아스』로부터, 오늘날 전문가 중심의 정치체 때문에 잊힌 "정치에 적합한 적정 조건들의 세부 항목"을 이끌어낸다(ibid., 375). 첫 번째 세부 항목은 "정치적 연설이 공적인 것이며 연구나 실험실의 침묵하는 고립 속에서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이다(ibid., 375). 많은 수의 사람들 앞에서 연설해야 하며 그들의 이해관계에 주의를 기울여 특정한 합의를 도출하는 것이 바로 정치의 본분이다. 


두 번째 항목은 "정치적 추론(political reason)이 전문가의 지식의 대상이 될 수 없다는 것"이다(ibid., 378). 정치는 특정 지식에만 의존하여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전체 정치체 그 자체"를 주목함으로써 이루어지는 것이다. 정치는 전문가의 의견만으로는 굴러갈 수 없으며, 많은 이해당사자 사이에서 조화와 공존을 모색하는 과정이 필수적이다. 


마지막 항목은 "정치적 이성(political reason)은 가혹한 긴급 조건 속에서 많은 사람들에 의해 선택된 중요한 문제를 다룰 뿐 아니라, 원인과 결과에 대한 그 어떤 종류의 옛 지식에도 의존할 수 없다"는 것이다(ibid., 381). 정치는 대체로 긴급하고 많은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치는 중요한 문제를 다루며 늘 어느 정도의 불확실성을 수반하기 때문에 모든 경우에 적용할 수 있는 정치 매뉴얼이란 있을 수 없다. "[시민들의 수가] 너무 많고, 문제는 너무 중요하며, 시간은 너무 적"은 것이 바로 "정치체의 정상적인 상태"이다(ibid., 346). 라투르가 이러한 문제의식을 발전시켜 과학과 민주주의를 어떻게 결합할 수 있을지에 대 해 고민한 결과가 바로 지젝이 인용한 "사물의 정치"(politics of nature)이다. 라투르가 제안한 사물의 정치의 '헌법'에서는 우선 어떠한 인간과 비인간이 현재 다루고 있는 사안과 유관한지 답해야 하며, 그 뒤 각 행위자들의 의미와 중요성을 검토하여 어떤 문제를 우선적으로 고려해야 하는지 논의한다. 모든 논의 과정에서 비인간과 (그러니까 비인간의 행위성을 충분히 고려하여) 다양한 분야의 인간들이 시민의 합의를 이끌어 낼 때 불확실한 위험의 문제를 극복할 수 있다는 것이 라투르의 '사물의 정치'이다. 이처럼 라투르의 사물의 정치에서는 인간과 대등하게 비인간이 함께 고려되며, 이는 전문 과학기술자만 비인간의 대변자가 될 자격을 갖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함축한다(현재환, 홍성욱, 2012: 59). 


라투르가 제시한 이런 틀 속에서 우리는 다음과 같이 묻는다. "코로나바이러스 팬데믹이 왜 지금 벌어지고 있을까? 냉전 이후 세계 정치경제 질서 형성에 가장 큰 축을 담당한 글로벌화와 이로 인한 지구온난화의 심화, 인간 식생활의 변화가 어떤 관계가 있는 것은 아닐까?"(박범순, 2020: 295) "'시민참여형' 또는 '시민주도형' 방역은 필요한가? 필요하다면 어떻게 실현해야 하는가?"(김창엽, 2020: 81-93) 


만일 수많은 전문가들이 경고하듯이 (지금까지 늘 그랬듯) 앞으로 바이러스와 공존해야 한다면, 따라서 그를 사물의 정치를 구현할 "사물의 의회"에 앉힐 수밖에 없다면, 지젝이 제안한 몇몇 '현실적인 공산주의적' 조치들이 필요할 것이다. "공산주의라고 부르든, 페터 슬로터다이크의 말대로 바이러스 공격에 집단적으로 조직된 면역 체계라는 뜻으로 공면역주의Co-immunism라고 부르든 핵심은 마찬가지다."(171-2) 


우리는 마침내 바이러스까지 사물의 의회로 끌어안을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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