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루조당 파효 서루조당 시리즈
교고쿠 나츠히코 지음, 김소연 옮김 / 손안의책 / 2015년 4월
평점 :
절판


1. 책이란 무엇인가? - Open reading frame.
: 내가 생각하는 책의 개념은 일종의 open reading frame 이다.
지난 몇 년간 두 차례에 걸쳐 편집위원장으로서 교과서 출간을 주도하였는데,
매번 출판기념 행사때마다 경과 보고 presentation 의 첫 슬라이드는 항상 genome> mRNA> translation 의 모식도였다.
좀 엉뚱한 감이 있는 비유이긴 했지만, 내가 생각하는 책의 개념에 대해 이만한 비유 소재가 없기 때문이었고..
책이라는 걸 단순히 활자들이 모여있는 집합체라고만 생각하는 사람들은 없을 것이다.
책의 저자(들)의 뇌 속에 있는 것들이 일종의 digitization 과정을 거쳐서 종이로 분사된 것이라는게 더 정확한 표현일 것이다.
이것이 그냥 안 읽히면 그대로 죽는 것일 뿐이고,
누군가가 읽어서 그 digital 정보를 자신의 뇌 속에서 재현하면 그 지식은 유령처럼 되 살아나는 것이다.
문제는 어떻게 읽고 받아들이고 실행하느냐인데,
읽는 사람에 따라 되살아나는 유령은 제각각일 것이다.
open reading frame 또한 그러하지 않은가? 단순한 목판 같은 것이 아닌, 일종의 가변성을 품고 있는 것.
반드시 genome 에 각인되어 있는 그대로 되살려내기만 하는 것이 아니며, 자칫 잘못 읽으면 엉뚱한 translation 이 일어날 것이기 때문이다.

2. 교고쿠나츠히코의 책에 대한 개념이 이렇게 일치하다니!
: 난 '우부메의 여름' 이래 교고쿠 나츠히코의 포로가 되어 왔다. 그런데, 여지껏 나온 그의 작품들이 반드시 흥미진진한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장광설과 지나치게 현학적인 내용들 때문에 사실 지루한 작품들이 더 많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작품들을 너무나 사랑한다.
재미없고 지루한데, 왜 그러지? 하는 의문이 계속 들긴 했다.
이번 '서루조당 파효'의 첫번째 에피소드를 읽다가 드디어 그 이유를 알았다.
나와 똑같은 생각을 하는 사람이었던 것이었다.
소위 말해서 코드가 맞았던 것이다.
정말 책을 사랑하시는 분들은 서루조당 파효의 첫번째 에피소드에 나오는 서점 주인의 궤변성 장광설을 꼭 음미해 보시기 바란다.
유령에 비유되는 책들과 무덤에 비유되는 서점..

3. 교고쿠 나츠히코는 이 작품을 빌어 자기가 하고 싶었던 얘기를 실컷 하고 있다.
사실 교고쿠나츠히코라는 이름과 으스스한 표지, 딱 두개만 보고 괜찮은 괴담 추리소설일 것이라는 선입견으로 구입했는데, 그건 아니었고..
역시나 쉽게 읽히는 작품은 아니나, 장시간 조금씩 음미하면서 읽어볼 가치가 높은 작품이다.

4. 안타깝게도... 메이지 전후의 일본 문화에 대한 사전 지식이 없으면 100% 즐기기는 어려울 것 같다.
매 에피소드마다 나오는 실존 인물들 중, 아는 사람은 나쓰메 소세키 밖에 없으니 말이다.
그래도 읽는 재미에 영향을 끼치진 않지만..
그나저나 그 시기 일본의 문화 contents 의 양과 질은 정말 놀라울 따름이다.
같은 시기 우리나라는.. 천주교 박해로 아까운 인재들이 수도 없이 살해되고, 쓰레기들만 지배층으로 남았지..
아.. 또 열 받는다.

5. 서루조당 서점 주인은 영락없는 교고쿠도 시리즈의 안락의자 탐정 주인공인 추젠지 아키히코의 판박이다.
장광설에 놀라운 연역적 추리 능력, 고양이를 키우는 것, 미스테리한 분위기 등등..
아니.. 시대상으로 보면 그의 조상 격.
아닌게 아니라 마지막 여섯번째 에피소드에는 아예 추젠지 아키히코의 조부쯤 되는 분이 등장한다.
추젠지 아키히코가 우편 사고를 무서워 하는 건 두번째 에피소드에 나오는 환상 문학가의 성향과도 일치한다.
이래저래 아는 사람만 아는, 교고쿠도 시리즈 팬 서비스 차원? 뭐, 몰라도 되는 거지만, 기존 팬 입장에선 매우 재미있는 장치이다.

7. 역시 그의 소설은 만만치 않다. 이번에도 읽기가 참 고통스러웠어요...
고통스럽지만 즐거운 읽기.. 독자들을 약간 변태로 만드는 교고쿠 나츠히코.. 쳇..

8. 책 뒷 날개를 보니 교고쿠도 시리즈 '도불의 연회' 출간이 임박한 것 같다.
교고쿠도 시리즈 중에 best of best 라고 하니 기대해 보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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