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이 동물원
켄 리우 지음, 장성주 옮김 / 황금가지 / 201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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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마스 때는 SF 소설같은 장르 소설 한 권 읽는게 역시 꿀맛이다.

이번에 읽은 것은 휴고, 네뷸러 상 등을 석권한 중국계 미국인 작가 켄 리우의 단편 작품집이다.  

대륙의 작가인 류츠신의 충격적인 SF 소설 '삼체'를 영어로 번역하여, 그 또한 아시아 작가 최초로 휴고상을 타게끔 해 준 일등 공신.


켄 리우는 미국 국적이고 하버드 대학에서 영문학을 전공했지만, 중국에서 출생한 이래 정서적으로 동아시아 문화를 잘 보존하고 있는 것 같다.  영미권 독자를 대상으로 쓴 작품들이지만, 같은 동아시아 문화권에 있는 우리들 시각에서 공감할 수 있는 내용과 주제들이 풍부하다.  솔직히 테드 창과 비교해서 SF 로 분류되는 것에 대해서는 좀 회의적인 생각이 들지만, 전반적으로 따뜻함이 느껴지는 작품들이다.  이런 작품들, 나는 너무 좋다.


종이 동물원 - 2012년 휴고, 네뷸러, 세계 환상 문학상까지 모두 석권한 문제의 작품이다.  읽는 내내 돌아가신 내 어머니가 자꾸 생각나서 가슴이 아렸다.  단편이지만 많은 주제를 담고 있다.  모성애, 효심, 인종 차별, 문화혁명의 광기까지.  종이 접기로 만든 동물들이 살아 움직인다는 설정에서는 판타지로 분류될 수도 있겠지만, 순수 문학으로 봐도 무리가 없는 완성도 높은 작품이었다. 

그리고 동물원을 뜻하는 영어 단어가 zoo 말고도 menagerie 도 있다는 걸 처음 알았다. 

원래 유럽 귀족들이 자기 부와 권력을 과시하기 위해 집에다 마련했던 동물원을 menagerie 라고 칭했고 (귀하고 화려한 것들을 모아놓는다는 의미의 어원에서 비롯), zoo 라는 단어는 20세기 들어서서 대중들에게 공개하는 동물원을 뜻하는 단어로 쓰이게 되었다.

제목인 '종이 동물원'은 아마도 테네시 윌리엄즈의 희곡 '유리 동물원(The Glass Menagerie)'를 차용한 듯.


천생연분 - 인공지능을 다룬 것인데, 얼마전에 본 영화 '업그레이드'가 연상되기도 했다.  구글과 포털들 모바일 디바이스에 코를 박고 사는 젊은 세대들을 보면 이 단편이 그리는 내용이 전혀 허황되지는 않은 듯.


즐거운 사냥을 하길 - 구미호를 잡는 퇴마 액션물로 시작했으나, 문명화되는 과정에서 어느새 모든 요기가 사라진다.  그리고 스팀 펑크로 변하는 기막힌 전개.  이건 영화화하면 딱 좋은 소재다. 상당한 매력이 넘치는 단편.


상태 변화 ​- 이건 좀.. 그냥 그랬다.

파자점술사 - 한자를 모르면 이해하기 힘든 단편인데, 영어권 독자들이 얼마나 이해했을지 궁금하다.

그리고 타이완 사람들도 우리 나라 못지 않은 시련기를 겪었다는 것도 알게 되고.


고급 지적 생물종의 책 만들기 습성

- 초반 이 대목에서 감탄했다: '모든 생물종은 대를 이어 지혜를 전수하는 나름의 독특한 방법이 있다. 사유를 눈에 보이는 것, 만질 수 있는 것, 거스리지 못할 시간의 파도에 맞서는 방파제처럼 잠시나마 동결된 것으로 만드는 방법 말이다.  모두가 책을 만든다.'

이탈로 칼비노의 걸작인 '우주만화'의 영향을 받은 듯한 단편이다.


시뮬라크럼

'종이동물원'과 더불어 내 가슴을 가장 아프게 했던 단편이다.

딸 아이 키우는 아빠들만이 공감할 수 있는 작품.

이제는 아름다운 여인으로 자라난 내 딸이지만, 내 꿈 속에서 가끔 나타나는 내 딸의 모습은 아직도 일곱살 때 모습 그대로이다. 


레귤러

이 단편집 초반부의 따뜻한 작품들과는 전혀 다른 분위기의 스릴러.  같은 작가가 맞나 할 정도로 박진감 넘치는 작품이다.  이것도 영화화하면 괜찮을 듯.


상급 독자를 위한 비교 인지 그림책

역시 이탈로 칼비노의 '우주만화' 풍의 단편.  테드 창의 영향도 살짝 느껴진다.


파(波)

레이 커즈와일의 그 유명한 저서 '특이점이 온다(Singularity is near)'가 연상되는 작품이었다.

인류가 결국 특이점에 다다르면 그 이후에 어떻게 전개될 것인가를 소설적 상상력을 사용하여 제대로 기술하였다.  결국 우주가 된다는 것.  이런 식의 결말은 참 마음에 든다. 


모노노아와레 

2012년 3관왕에 이어 2013년 휴고상 2연패를 달성한 작품.  이 단편집에서 조금 이질적인 작품이다. 

이 단편만 읽으면 작가가 일본 빠인 것으로 오해하기 쉽다. 그러나 이어지는 '태평양 횡단 터널 약사'와 '...다큐멘터리' 까지 읽으면 그런 오해는 불식된다. 


태평양 횡단 터널 약사(略史)

일본이 제국주의 시대 때 태평양 전쟁을 일으키지 않고 외교적 수완과 터널 횡단 공사로 번영을 했고, 그 바람에 세계 공황이 해결되었으며, 독일 나치는 아예 발흥을 하지 못했고 제2차 세계대전도 일어나지 않았다는 대체 역사물이다.  그러나 조선인 일본군 성노예와 강제 징용 등이 또 다른 형태로 있었다는 것.  작가가 무엇을 말하려 했는지 후반부에 가서야 알게 된다. 

앞선 '모노노아와레'에서는 질서를 지키고 남에게 폐를 안 끼치며 이타적이기까지 한 일본인 개개인을 그렸다면, 이 단편에서는 그런 일본인들이 전체주의라는 집단이 되었을 대 어떤 짓을 저지르는지를 보여주고 있다.

이 작가는 일본인들에 대한 이해도 매우 깊은 듯 하다.


송사와 원숭이 왕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주인공은 평소 환영 속에서 제천대성 손오공과 끊임없이 대화를 나눈다.  

이 작품을 꿰뚫는 사건은 청나라 건국 전후에 양주성을 함락하면서 자행된 대학살이다.

이를 생생히 기술한 책이 금서가 되고, 이를 찾아서 은폐하려는 정부와, 이를 지켜서 후세에 전하려는 이들과의 쫓고 쫓김에 주인공이 말려드는 이야기다. 

읽어 보면 우리 나라의 비극적인 1980년 현대사와도 중첩이 된다.

매우 강렬했던 작품이었다. 


역사에 종지부를 찍은 사람들 : 동북아시아 현대사에 관한 다큐멘터리

이 단편집의 피날레를 장식하는 묵직한 작품으로, 2차대전 당시 일본 731 부대의 참상을 과거 시간 여행을 통하여 목격한 유족들의 증언과 실제 인체 실험에 참여했던 퇴역 군의관의 증언, 그리고 이를 부정하는 일본인들과 정치인들, 무관심한 중국인들, 일본 편을 드는 미국 정치인들 등의 증언들이 다큐멘터리 형식으로 기술된다. 사과하지 않는 일본.  우리나라 뿐 아니라 중국에서도 반드시 해결해야할 과거사임을 알 수 있다.  


아, 모처럼 맛 보는 즐거운 독서였다. 

켄 리우는 같은 중국계 미국인으로서 앞서 언급했던 테드 창과의 비교가 불가피할 것 같다.  

테드 창은 인간미가 넘치면서도, 과학 이론은 정통적으로 철저하게 녹여내고 있어서 비교적 하드 SF 로 분류되는 반면에 켄 리우는 테드보다는 좀 더 문과적이고 좀 더 판타지에 가깝다.  쉽게 말해서 테드 창보다는 켄 리우가 좀 더 쉽게 읽힌다. 

둘 다 따뜻하다는 면에서 공통점이 있지만 말이다. 

앞으로 켄 리우의 작품들이 더 번역되어 출간된다고 한다.

특히 '초한지'의 SF 판타지 버전인 '민들레 왕조기'가 가장 기대된다.

테드 창, 켄 리우, 류츠신, 그리고 여기서 소개하지 않은 마보융.. 중국인 작가들의 약진이 유달리 두드러지는 요즘이다.   중국 국력의 신장과도 무관하지는 않은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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