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출처 : mooni > 파도는 해변에 부서졌다.
파도 버지니아 울프 전집 6
버지니아 울프 지음, 박희진 옮김 / 솔출판사 / 2004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파도>는 1937년도 출간되었다. 그녀가 자살하기 4년전 출간되었으니, 말년의 소설이다.

소설은 해가 뜨고 지기까지의 시간들을 태양과 파도가 사물에 어우러지는 정경으로 묘사하는 장을 등장인물들의 어린 시절부터 노년까지, 내면의 과정을 기록하는 장면들을 엇갈려 배치했다. 해가 뜨고 지는 짧은 하루가 등장인물들의 유년에서 노년까지의 긴 인생과 멋진 조화를 이룬다. 자연의 하루, 한순간들과 인물들의 전 인생을 매치시킨 것은 정말 감탄이 나오게 한다. 아름답다. 정말이다. 꾹꾹 눌러 줄을 치거나, 누군가에게 큰 소리로 들려주고 싶을만한 문장들로 이루어졌다. (하지만 그러진 않을 것이다.)

버지니아 울프는 하찮고 사소한, 소소한 일상들 속에 녹아있는 거대한 사회의 구조나 권력의 궤도를 적어낼 줄 안다. 떨어지는 사과에서 만유인력을 끌어내는 뉴튼(이건 새빨간 날조라고 하지만)의 이야기처럼, 울프의 경우에는 사람들이 행하는 사소한 동작들, 그들의 작은 욕망들 속에 그것들을 그것이게 하는 거대한 힘의 작동을 보여준다.

사과와 만유인력의 비유가 멋진 것은 사과가 작기 때문이다. 사과는 단지 정해진 대로 낙하할 뿐, 낙하의 궤도를 연구하거나 거기에 저항하거나 하지 않는다. 그것은 완전히 복종한다. 그 굴복은 너무나 완벽해서 사과 자신의 의지나 희망으로 낙하하는 것처럼, 자유롭게, 아무렇게나 떨어지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그건 사과의 의지는 아니다. 사과엔 의지같은 건 없다. 그것은 흐르는대로 중력에 맡겨질 뿐이다. 또 만유인력의 법칙(지구의 모든 사물에 통하는 힘)도 낙하하는 사과라든지 그와 비슷한 작은, 힘없이 낙하하는 사물들을 통해서 온전히 드러난다. (건물이나 사람들은 일견 중력을 무시하고 위로 치솟지 않는가. 결국 무너지고 쓰러지지만)

작은 것은 큰 것을, 큰 것은 작은 것을 서로 포괄하여 드러낸다. 그래서 하찮은 것을 하찮은 형태 그대로 보는 것은 정말 어렵다. 그렇게 작은 것조차 바꿀 수 없다는 결정적 패배감을 갖게 하고, 사물의 진로에 대한 운명적 수동성과 무기력감을 느끼게 하거니와 작은 것에는 간섭하고 싶어지니까 말이다. 이렇게 저렇게 바꾸고, 마음대로 휘둘러 볼 수 있을 것같다. 많은 소설의 영웅들이 그러한 욕망에서 태어난다. 인간을 하찮게 두지 않으려고 하는, (인간은 하찮다.) 욕구가 진짜 하찮은 소설을 만들어낸다. (나는 하찮은 소설들을 좋아한다. 사랑한다고 해도 좋다.) 이 소설은 하찮지 않다. (하찮지 않은 점이 나를 정말로 질리게 했지만.) 그런데도 단순히 좋은 소설이다 하고 만족스러운 기분이 되지 못하는 것은, 동감할 수 없었기 때문이 아니라 동감하기 싫어서였다.

 

규모의 면에서라고 하면, 이건 십만의 군대가 진격하는 영화보다 크다. 군대도, 쉴새없이 돌아가는 공장도, 세계 정복의 음모를 꾸미는 독재자도 없고, 심지어 코카콜라도 나오지 않는데도, 그리고 무엇보다 주인공들은 그런 것에 전혀 관심이 없는 듯 보이지만, 그래도 여기엔 진짜 제국주의가 있으니까. 19세기와 20세기. 기계문명, 세계의 질서, 원하든 원하지 않았든 글로벌한 지구촌을 창안하고자 한. 서양, 백인, 그 시작을 내디딘 영국인, 부르주아계층의 남자 혹은 여자들. ('―들'이다. 그들은 무리짓는다.) 말이다.

버나드, 수잔같은 단독명사로 불리는 주인공의 이름들은 서로에게 거의 불리지 않는다. (누가 누구래도 상관없다.) 학교를 다니고, 사소한 연애를 하고, 서로 각자가 되어, 엇갈리고, 다르게 살아가지만, 그 한떼의 소소한 인간들. 그들의 살고자 하는 욕망들이야말로 제국주의의 결과물이고, 원천이고 그렇다.

 

소설 속에 등장하는 여러 인물들은 퍼시발이란 친구에 대한 기억으로 묶여 있는데(묶였다고 해도 소통한다는 뜻은 아니다. 그들은 각자 감상을 가질 뿐이다), 그는 인도에서 낙마하여 죽었다. 퍼시발이 죽고 난 후에도 물론 그들의 삶은 진행된다. 예컨대, 주된 화자인 버나드는 나는 누구냐, 이야기는 있느냐 하고 되풀이해서 물으며, 로마행 티켓을 사거나 아프리카로 향하는 배를 타고 대꾸하지 않는 상대를 향해 이야기를 하거나 한다. (인도에서 낙마하는 아더왕의 기사와 로마에의 회귀와 아프리카로 가는 배에서 혼자 말하는 백인 남자의 풍경. 이걸 제국주의 외에 달리 뭐라고 부를 수 있을까?) 

 

소설에서 버나드가 겪는 정체성의 위기. 나는 누구인가? 하고 반복되는 질문이 거슬린다. 어디에도 고착하지 못하고, 계속해서 새롭게 자신을 정의하고자 하는 그 끝을 모르게 탐욕스러운 자의식, 무엇에도 굴복하지 않으려고 하는 끈덕진(이 소설의 마지막은 죽음에 맞서고자 하는 버나드의 의식이다), 타자없는 자의식이 지겹다. 그들은 규정받고, 비교되고, 제어되길 거부한다. 신에게도 인간에게서도 이름을 부여받기를 거절하고, (그러니 자신이 누구인지 모를밖에) 로마의 본을 떠서 인도에서 아프리카까지 마구 돌아다닌다. 타자를 전부 자신처럼 만들고, 자신은 자신이 누구인지 모르겠다는, 이야기 없는 이야기를 크게 떠들어댄다.

아프리카로 향하는 배 안에서 자신의 이야기만을 늘어놓는 그들(버나드, 혼자이면서 여럿의 자아를 가진, 그래도 언제나 동일한  축을 이루는)은 타인을 인정하지 않는다. 타인이라기 보다는 타(他), 그 자체를 인정치 않는다고 해야 옳다. 이 소설에선 파도와 햇살까지도 인간(백인 부르주아 계층의 남자로서 보편자인 인간, man, 버나드)에 합치하고, 인도인도 아프리카인도 나오지 않는다. 인간과 세계는, 버나드와 버나드의 다른 이름인 친구들뿐이다.

 

어떤 의미로 보면, 이건 미친 독재자의 노골적인 침략보다 더 심하다. 군대는 적어도 적을 가정한다. 정권은 바뀌고, 독재자는 몰락하기도 한다. 그러나 버나드와 버나드의 친구들에겐 오직 자신들뿐이고, 그들은 계속해서 이야기를 찾고, 자신을 찾으며, 뭉실뭉실 태어나 삶을 이어간다. 더구나 그들에게는 악의도, 살의도 없다. 그들에게 인도인이란 진흙탕에서 구르다 멈춘 수레바퀴를 돌려주는 퍼시발을 하느님처럼 존경하는(이건 소설 속의 표현이다) 역할로만 잠깐 등장할 뿐이다. 아니면 아프리카 행 배에서 대꾸 없이 듣는 무정형의 상대이거나. 애초에 형태를 온전히 갖춘 사람조차 아니다. 그들에 대해선 음모를 꾸미거나 학대할 의지조차도 없다. 버나드와 그 친구들은 용사도, 악당도 아니며, 그저 흐르는대로 사는 사람들이다.

 

거의 선량하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 자동차를 몰고, 직업을 갖고, 집을 갖고, 자유와 평등(백인과 흑인과 아프리카인과 일본인과 한국인과 남자와 여자, 어른과 아이, 아이슈타인과 무뇌아와 빌게이츠와 동냥하는 거지가 모두 똑같은 자유를 누리는 인간이다)을 믿고, 냉장고와 가스렌지와 세탁기, 드라이기를 쓰고, 결혼을 하고. 패션잡지에서 입어야 할 옷을 선택하고, 돈을 벌어 휴가를 가고, 인터넷을 쓰고, 골프를 치고, 관광여행으로 세계를 다니고, 나중엔 연금으로 양로원에서 사는. 이를테면, 석유에너지를 쓰는 부르주아 중산층의 생활. 헐리웃 영화 속에 나오는 시민적 삶, 그 정도는 되야 사람사는 것이라고 믿어지는 서구적 중산층의 삶을 유지하는 것 말이다. 그러한 삶의 질서를 위해 군대와 병원, 학교와 교도소가 작동한다.

그걸 위해 정치가들은 분주하고, 전쟁에 반대한다는 명분으로 군대가 전세계에 퍼져 지구촌의 세계화를 이루어낸다. 무역이 이루어질 수 있도록 도로가 깔리고, 공장들이 돌아간다. 그래서 칠레의 포도와 캘리포니아의 오렌지가 같은 진열대에 놓이고, 코카콜라 자판기가 어디에나 설치되어 있고, 유럽에선 삼성의 휴대폰이 팔리고, 일본 애니나 헐리웃 영화가 극장이 있는 나라 어디에나 걸린다. 1937년도에 지구 반대편에서 출간된, 늙은 영국 작가의 문장을 이해시킬, 변환 가능한 단어가, 21세기 초엽, 극동이라 불리우는 한반도의 남쪽에 횡행하게 되어, 번역되어 팔리고, 그걸 사서 읽게 되기도 하고. (우리는 모두 똑같은 인간이 되려고 한다.)

심지어 버나드가 이야기가 있는가? 하고 되풀이하는 것에 공감이 되려고 한다. 사물과 사람을 엮어줄, 그래서 이렇게 저렇게 되었고, 결말을 맞이하는 진짜 이야기가 어딘가에 있는 걸까?

 

죽어버린 퍼시벌을 추억하는 버나드와 친구들처럼, 삼일절과 현충일이면 경건하게 묵념을 하던 학교 시절의 자신을 생각해 낼 수 있다.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는 엄숙한 말들이 머리 위를 스칠 때, 차렷 자세를 유지한 채로 나는 침을 삼켜도 좋을까 하는 생각을 하며, 운동장의 땅바닥을 기어다니는 개미들이나, 얌전히 모두어진 내 손등이나 발끝을 보고 있거나 했다.

그때는 삼국지나 수호전같은 것들을 좋아라 읽곤 했었다. 또 단군신화라든지 말이다. 국민교육 헌장도 외우고, 군인아저씨들에게 위문편지도 쓰고, 읽지는 않았지만, 그 무렵의 신문들엔 대통령을 단군에 비견하는 기사들이 실리곤 했다.

퍼시발의 낙마에 대한 소식처럼, 나는 갑자기 내 머리 위를 스쳐지나던 그 모든 영광된 이야기들의 종말을 맞이했다. 왕과 충성스런 신하가 힘을 합해 무지한 백성들을 위해 태평천국을 만드는 이야기같은 건 없다. 현실엔 누군가의 살이 타거나, 뼈가 부러지거나 할 때 나는 단말마의 비명이나 넘쳐흐르는 더운 피, 뜯겨나간 살점따위들이 난무하는 소요와 일련의 사태들이 있다.

그래도 물론, 세상은 돌아간다.

내가 태어나기 전에 월남으로 한국군이 갔듯이 자이툰 부대는 사막으로 갔다.

 

 

자살충동은 자신과 동일시되는 대상에 대한 살의를 바꿔 자신에게로 향한 공격 충동(이런 식의 정의가 맞는지 모르겠다)라고 프로이드의 글에서 본 것같다. 나는 가끔 자살은 자신과 동일시되는 대상들에 완전히 합치하고자 하는 희생 제의같은 거라고도 생각한다.

의미란 신체를 헌신하거나 죽여서만이 이루어지니까 말이다. 어떤 틈새를 메울 필요성이 항상 느껴진다. 무언가를 위해 자신을 완전히 바치고 싶은 충동과 모든 것을 자신에게 바쳐 자신만을 영구히 보존하고자 하는 충동을 채워줄 행위들을 실천하고 싶은 욕망이 상존한다. 이를테면 주머니에 돌을 집어넣고 호수 속으로 걸어 들어간다거나 하면, 그 욕망은 충족되는 것일까?

자아가 무로 돌아가면, 평안하고, 만족스러울까? 자신이 써내고 있던 시대를 살해하고 싶었던 것일까, 아니면 거기에 보다 완벽하게 동의하고 싶었던 것일까? 그러나 물론, 버지니아 울프의 자살은 이런 이유가 아닐지도 모른다. 죽음은 여러 가지고, 또 대개는 이유도 의미도 없으니까.

 

오래 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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