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년이 온다 - 2024 노벨문학상 수상작가
한강 지음 / 창비 / 201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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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1월 새벽, 용산에서 망루가 불타는영상을 보다가 나도 모르게 불쑥 중얼거렸던 것을 기억한다. 저건 광주잖아. 그러니까 광주는 고립된 것, 힘으로 짓밟힌 것, 훼손된 것, 훼손되지 말았어야 했던 것의 다른 이름이었다.'(207쪽, 에필로그 '눈 덮인 램프' 중에서)

 

작가 한강의 <희랍어 시간>을 만나고 난 후, 한 인터뷰 기사를 읽었던 기억이 난다.  다음엔 인간의 가장 밝고 눈부신 삶에 대한 소설을 쓰고자 했고, 제목까지 지어놓았다고. 하지만 작가는 1년 이상을 뒤척였다. 작가 자신이 가지고 있었던 근원적인 그 무엇, 1980년 광주의 기억을 통과하지 않고서는 삶의 눈부심을 쓰지 못할 거라는 생각과 마주했다. 결국 인간의 가장 밝고 눈부신 면이 아닌, 가장 어둡고 참혹한 면을 들여다보게 하는 이 소설이 세상에 나오게 되었다.

 

1980년 광주. '그 이야기를 들었을 때 나는 열살이었다'로 시작하는 에필로그를 곱씹어 읽는다. 이 소설에서 에필로그는 그냥 에필로그가 아니다. 작가가, 동호를 비롯한 주변 인물들과 그후 남겨진 이들의 내면을 그리게 되기까지의 이야기들이다.

소녀는 태어나 아홉살 까지 살았던 그 도시의 옛집을 기억한다. 열살 되던 해, 소녀는 어른들의 대화에서 이상한 긴장감과 어색하게 이어지던 침묵을 느끼면서 귀를 기울인다. 소녀의 아버지가 기억하는, 국어시간에 작문을 곧잘 쓰던 한 소년의 이야기를 듣는다. 이년 뒤 여름, 누군가를 조문하러 그 도시에 내려갔던 아버지가 구한 사진집을 소녀는 어른들 몰래 펼쳐본다. '마지막 장까지 책장을 넘겨, 총검으로 깊게 내리그어 으깨어진 여자애의 얼굴을 마주한 순간'을 소녀는 기억한다. 자기 안의 연한 부분이 소리없이 깨어지는 것을 느끼며.

 

시간이 흘러 어른이 된 작가는 소년의 흔적을 찾기 위해 광주를 찾는다. 그 소년이 살았던 집, 중학교 학생기록부에서 찾은 그 소년의 사진, 그리고 "아무도 내 동생을 더 이상 모독할 수 없도록 써 달라"는 당부를 남긴 소년의 형을 만난다. 국가권력이라는 이름으로 너무도 허망하게 잃은 목숨, 그리고 그 목숨을 생각하며 남은 삶을 이어가야만 했던 이들을 생각한다. 먹먹하다. 쉽게 말이 나오지 않는다.

 

"그들이 희생자라고 생각했던 것은 내 오해였다. 그들은 희생자가 되지를 원하지 않았기 때문에 거기 남았다. 그 도시의 열흘을 생각하면, 죽음에 가까운 린치를 당하던 사람이 힘을 다해 눈을 뜨는 순간이 떠오른다."(213쪽)

 

작가의 말이 맞다. '그 도시의 열흘', 인간이 인간에게 저질렀던, 가장 끔찍하고 참혹한 시간들을 마주보지 않고서는, 그 시간을 통과하지 않고서는 우리는 삶의 눈부심을 이야기할 수 없다. 그 시간을 외면한채 말하는 삶의 눈부심은 공허할 뿐일 것이다.

 

가슴이 저리도록 문장 하나하나가 슬펐고 또 아름다웠다. 동호, 채 피지도 못하고 스러져야만 했던 한 소년, 쌍꺼풀 없는 반달 모양의 눈이 유순한 그 소년을 생각한다. 이 소설은 1980년 광주에 있었던 수많은 동호들에게 바치는 초혼곡이다. 그들을, 결코 잊지 않겠다는 약속과 함께.

 

"과거를 기억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그 과거를 되풀이한다.”(조지 산타야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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