쌀의 세계사
사토 요우이치로 지음, 김치영 옮김 / 좋은책만들기 / 2014년 4월
평점 :
절판


처음 배낭여행을 갔을 때, 흔히 '안남미'라 불리는 인디카로 만든 볶음밥을 처음 맛보았던 날을 기억한다. 윤기 자르르 흐르는 찰친 밥 대신, 길쭉하고 퍼석퍼석한 쌀알을 씹을 때 느껴지던 그 생소한 느낌을. "밥알이 풀풀 도망가니까 꼭 잡고 먹어야겠다"라고 농담도 하면서, 내가 그제껏 당연히 쌀의 전부인 것처럼 받아들였던 그 쌀이, 사실 수많은 쌀의 품종 중 하나라는 사실이 새삼스럽게 다가왔었다.

 

이 책의 저자 사토 요우이치로는 유전학 연구자로, 벼 등 작물의 기원과 절차를 연구하는 사람이라고 한다. 그가 아시아 각 지역을 직접 발로 뛰며 벼의 원종인 야셩벼와 오래된 품종을 조사한 현장연구의 기록이 이 책이다.

"현장연구를 계속하는 동안에 벼를 유전학의 대상으로서만이 아니라 각지의 쌀의 종류와 요리의 소재로서도 관심을 갖게 되었다. 요리가 취미여서 각지에서 먹은 것을 기억해 두었다가 귀국한 후에 만들어보기도 했다. 그러는 과정에서 새삼스럽게 깨달은 것은 쌀의 종류와 재배 및 조리방법, 먹는 법이 참으로 다양하다는 것이다."(6쪽)

 

책장을 넘기다보면, 이 현장연구를 하는 동안 저자가 얼마나 행복해했을지를 알 수 있다. 아시아 각 지역의 쌀의 종류와 재배방식, 조리방식의 다양한 모습과 차이를 주의깊게 살펴보고 연구하면서 그가 느꼈던 감동이 내게도 오롯이 전해져온다. 역시 연구자에게 가장 필요한 재능은, 무엇보다 마음 깊은 곳으로부터 경이를 느끼고 감동할 수 있는 능력이라는 생각이 든다.

"약 1만 년 전 평범한 풀 중에서 사람의 손에 의해 선택된 일부 씨가 오늘날 세계 곳곳에서 재배되어 먹고 있는 것이다. 그것도 완전히 다른 방법과 아이디어로 말이다."(7쪽)

 

이렇게, 자신이 연구하는 대상에 진지한 애정을 품은 이의 여정을 좇으면서 나도 덩달아 가슴이 뛰었다. 열대몬순 지역의 삶은 쌀요리, 태국의 볶음밥 카오팟, 라오스의 카오람(대나무통 찹쌀밥), 베트남의 튀긴 떡, 조린 돼지고기가 든 대만의 찹쌀떡, 또 쌀로 만든 다양한 술들... 각국의 다양한 쌀 요리들을 둘러보면서 어떤 맛일까 상상하며 입맛을 다시기도 하고(요리사진이 흑백인 점이 아쉬웠다, 뭐 요리책이 아니긴 하지만~^^;), 여러 종류의 쌀과 쌀로 만든 요리가 그 지역의 풍토와 어떤 연관이 있는지 저자가 풀어내는 이야기에 고개를 끄덕여가며 즐겁게 읽었다.

 

새롭게 알게 된 재미있는 사실도 많다. 나는 이제껏 "온대의 쌀=아밀로스 함량이 적은 쌀"이라고만 생각했었는데, 온대에도 아밀로스 함량이 높은 품종이 재배된 적이 있다고 한다. 즉 재배 품종이 꼭 기후와 관련이 있다고만은 볼 수 없다는 것이다.

일본에도 고대부터 중세에 걸쳐 '토우보시' 또는 '타이토우 고메'라 불리는 인디카의 퍼석퍼석한 쌀이 재배된 시기가 있었다고 한다. 퍼석퍼석한 토우보시는 그다지 맛있지는 않았지만, 물을 많이 넣고 지으면 밥 양이 늘어나 일시적으로 만복감을 느낄 수 있었기에 가난한 농민들이 주로 지었다고 한다. 즉 상대적으로 맛이 없었기 때문에 연공미가 되지 못했지만 가난한 농민들에게는 양식이 되는 귀중한 쌀이었던 셈이다. 하지만 연공을 많이 거두려고 하는 막부와 번의 입장에서는 곤란했으므로(무자비한 것들!) 에도시대에는 재배금지령이 내려지기도 했단다.

"즉 타이토우 고메라는 퍼석퍼석한 쌀을 받아들인 것도, 밀어낸 것도 무두 일본의 식문화가 초래한 것이었던 셈이다. 이렇게 생각하면 퍼석퍼석한 쌀, 찰기가 있는 쌀을 받아들이고 거부하는 것은 기후 등 자연조건이 아니라 다른 요소가 더 크게 작용했다고 볼 수 있다. 결국 식문화를 결정하는 것은 인간의 선택에 달려있는 것이다."(111쪽)

 

그 밖에도 몇몇 에피소드들이 생각난다. 호기심이 왕성하고 뭔가 새로운 것을 발견하면 그냥 지나치는 법이 없는 저자, 라오스 북부의 루앙남타 마을 부근을 조사하고 있을 때 길을 가던 아이들이 길가의 벼이삭을 뽑아내어 쌀알을 비틀어 따서 후루룩 마시는 것을 보았다고 한다. 당장 차를 멈추고 인터뷰하니, 아이들은 수확까지 보름 정도 남은 시기의 찹쌀은 달고 우유향이 난다고 말한다. 역시 연구자답게, 그냥 넘어가는 법이 없다. 쌀알의 주성분은 전분이고 전분은 잎에서 광합성에 의해 만들어지는데(나도 초등학교 때 배운 기억을 열심히 되살려본다^^;), 물에 녹지 않는 전분이 어떻게 잎에서 쌀알로 운반되는지를 궁금해하고 결국 이유를 찾아낸다. 암튼 유숙기라고 불리는 이 시기의 쌀은 아이들뿐 아니라 참새도 제일 좋아한다고 한다(참새도 맛있는 것을 알아본다!).

 

앞으로는 늘 대하는 밥상의 쌀을 좀 더 특별한 눈으로 바라보게 될 것이다. 인류가 재배하고 수확한 쌀을 먹게 된 후 지나온 1만 년의 시간을 떠올리면서... 그동안 쌀은 수없이 그 모습을 유연하게 바꾸면서 전 세계로 퍼지고, 끊임없이 다양한 품종과 문화를 성장시켜왔다는 것을 알게 된 시간이었다.

우리의 주식이면서 우리나라 식량 중 유일하게 자급률이 100% 가까이되는 쌀, 하지만 식생활 습관의 변화로 인해서 쌀 소비량이 많이 줄고 있다는 우려의 목소리가 높다. 밥을 먹는 것보다 더 간편하고 더 특별한 음식을 찾게 되는 풍경이 익숙해졌지만, 그래도 쌀에 대한 애정은 식지 않았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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