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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된 희망, 사회주의
마이클 해링턴 지음, 김경락 옮김, 김민웅 감수 / 메디치미디어 / 2014년 3월
평점 :
절판
"나는 불치병에 걸렸다는 사실을 통보받은 날부터 곧장 책을 쓰기 시작했다. 사회주의 활동가로 살아오면서 끊임없이 고민했던 주제가 있었기 때문이다. 의사들은 나에게 책을 쓸 동안을 버틸 수 있다고 말해주었다."(11쪽, 서문에서)
불치병에 걸렸다는 사실을 어느날 갑자기 통보받는다면? 어렸을 때부터(그때는 제법 심각했다-_-;) 가끔 상상했던 일이다. 보통은 그럴때, 자기에게만 왜 이런 일이 닥쳤는지를 비관하거나 그렇게 되지 않나? 하지만 사회주의 운동가이자 저술가 마이클 해링턴은 단 하루도 허비하지 않고 '곧장' 책을 쓰기 시작했다고 한다. 이 책 <오래된 희망, 사회주의>는 그의 유작이다. 책장을 넘기면서, 암 투병의 고통스러운 과정에서 한 자 한 자 써내려갔을 그의 모습을 떠올렸다. 무엇이, 어떤 힘이 생명의 불이 꺼져가는 그에게 끝까지 이 책을 쓰게 했을까? 자신이 눈을 감은 이후의 세상이 좀 더 나아지기를, 변화가 일어나기를 갈망하는 마음이 그렇게 혼신의 힘을 다하게 만들었으리라.
그가 사회주의 활동가로서 살아오면서 끊임없이 고민했던 주제는 무엇인가. 그것은 세계 자본주의 체제의 모순이 더 숨길 수 없이 곳곳에서 드러나는 이 시대에, 사회주의가 만들어낼 수 있는 희망에 대한 것이다. '여전히 자유와 정의를 이뤄내기 위한 희망' 말이다. 냉전체제가 몰락하고 구소련이 무너지면서 사회주의는 그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 것이 아니다. 우리가 그 실패에서 배울 것이 무엇인지를, 그 실패의 경험에서 진정한 사회주의의 내용과 가치가 무엇인지를 찾아내야 한다는 것.
처음에는 좀 어렵다고 생각했는데, 읽다보니 술술 잘 흡수된다. 가슴이 뜨거워진다. 저자 마이클 해링턴이 실무와 이론 모두에 단단히 뿌리를 내리고 있는 인물이기 때문일 것이다. 정치 사상가로서 논리적이고 정교한 분석과, 활동가로서 현장에서 치열하게 고민한 흔적이 함께 녹아있는 글이라고 느꼈다.
사회주의 운동가이면서, 저자는 예리한 비판의 칼날을 먼저 사회주의 자체에 들이댄다. 사회주의가 왜 20세기에 실패할 수 밖에 없었는지를 근본적으로 해부한다. 마르크스로부터 시작했던 사회주의의 역사를 통찰하며 초기 사회주의가 가졌던 모호함과 오류를, 가짜 사회주의가 난립했던 어두웠던 역사를, 사회주의 사상가들이 예견하지 못했던 부분들과 그 결과들을 샅샅이 드러낸다.
그는 왜 이런 자아비판(?), 아니 사회주의 비판을 했을까. 이것은 역설적으로, 사회주의가 그런 과정을 거쳐왔기 때문에 우리가 딛고 선 이 세계를 어떻게 변화시켜야 하는지, 우리가 그 그림을 그릴 수 있다는 것이다. 이 책을 읽으면서, 뭐랄까 단순한 얘기지만 세상은 절대로, 한번에 급진적으로 바뀌지 않는다는 것을 새삼 깨달았다(급진적으로 확 모든 걸 바꾸려고 하면 꼭 그르치게 된다는 것도^^;). 마치 어린시절에 꿈꿨듯, 어느날 자유와 정의를 이룰 수 있는 어떤 이상적인 체제로 확 바뀌는 일은 없다는 것. 사회주의는 분명히 실패했지만, 우리는 그 실패를 딛고 그 실패를 거름으로 써야 한다는 것. 그것이 마이클 해링턴이 암 투병을 견디면서 이 유고를 남겨 전하고 싶었던 이야기일 것이다.
'지난 백여 년간, 사회주의의 패배와 배신은 사회주의 진영 내부에 존재하는 사회주의에 대한 잘못된 이해에서 비롯됐다. 그렇다면 오늘날의 사회주의는 지금까지의 패배와 배신에서 교훈을 얻을 수 있을까? 만약 교훈을 얻지 못한다면, 사회주의란 인류의 가장 고귀하고 유용하지만 정치적으로는 허상에 불과한 이념이 될 것이다. 또한 그러한 사회주의의 강령은 아마도 조직적인 부자유를 초래할 것이다. 그러나 교훈을 얻는다면, 사회주의는 자유와 연대, 정의를 이룰수 있는 체제가 될 것이다.'(408~409쪽)
이 책을 품고 다녔던 일주일 동안 무척 행복했다. 내내 가슴이 벅찼다. 머릿속에 생각 뭉치들이 흩어지고 뭉치고를 반복하면서, 앞으로의 사회가 어떻게 변화되어야 할지 자유롭게 상상해보기도 하고, '각자의 영역에서 천천히 그러나 결국은 혁명적 변화를 이끌어내자는'(9쪽) 그의 사회주의적 공화주의를 생각하며 내 영역에서 할 수 있는 일이 뭘까를 즐겁게 고민해보기도 했다(내공이 얕아서 서평을 이렇게 헐렁하게 쓴 것이 아쉽기만 하다).
마지막 힘을 짜낸 마이클 해링턴과 성실하게 번역한 역자의 노고, 모두 감사하다. 감수자의 말대로, 마이클 해링턴이 더는 우리 사회에서 낯설지 않기를 바란다. 그리고 그가 마지막까지 치열하게 고민했던 주제를 우리가 함께 고민하고, 새로운 사회의 모습을 마음껏 상상하고, 각자의 영역에서 차차 변화를 일으켜갈 수 있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