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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선물
수안 글.그림 / 문이당 / 2014년 3월
평점 :
햇살이 넘실대는 맑은 샘물에 세수를 한 것 같은 느낌을 주는 책. 57년 출가 이후 평생 선 수행과 전각, 그림 그리기, 시 쓰는 일을 해 오셨다는 수안 스님의 담백한 글과 그림을 읽다보니 마음이 절로 맑아지는 것 같다. 출가 전후 스님의 성장 과정, 수행을 하며 겪었던 수많은 일들, 그리고 다양한 사람들과 따스한 인연을 나누었던 이야기들이 담담하게 물 흐르듯이 펼쳐진다.
여러가지 일화들이 마음에 긴 여운을 남긴다.
어머니 회갑이 다가오는데 수행자 주머니에 돈이 있을 리 없고, 뭘 할 수 있을까 궁리하던 스님은 <반야심경> 전문을 써 병풍을 만들기로 하셨단다. 그렇게 열심히 병풍을 만들던 어느 날, 전북 이리역에서 대형 폭발사고가 일어나 수십 명이 죽고 수천 명의 부상자와 이재민이 발생했다는 속보가 날아들었다고 한다. 이재민들을 돕고자 스님은 어머니 회갑을 위해 준비하던 병풍 그림과 몇 가지 그림을 그려 전시장에 내놓았고, 그것이 스님의 첫 전시회가 되었다. 그림들은 모두 놀라운 호응과 함께 팔렸고, 회갑 선물은 자연스럽게 물 건너가게 되었지만 어머니는 무척 만족해하셨다는 이야기.
또 20년째, 새해 첫날마다 스님이 계신 통도사를 찾아온다는 걸인들의 이야기. 스님이 축서암에 머물던 시절, 무척 추운 날 한 명의 걸인이 찾아왔다고 한다. 들어오라고 했지만 말없이 손만 내밀던 그에게 스님은 약간의 밥값을 쥐어주었고, 그렇게 몇 차례 왔다 간 걸인은 해가 바뀐 설날 아침 불쑥 찾아와 무언가를 마루 위에 올려놓고는 꾸벅 절만 하고 떠났다고 한다.
열어보니 양말 두 켤레였다. 며칠 뒤 또 다른 걸인이 내의를 두고 갔단다. '내가 받은 선물 가운데 가장 기분 좋은 선물, 참으로 아름다운 선물이었다'(145쪽)면서 스님은, 그 양말과 내의를 번갈아 만져 보셨다고 한다. 아무것도 가진 것 없는 이들이 모은 그 마음.
'그 날 이후부터 새해마다 연례행사가 되었다. 나는 그들에게 세뱃돈을 주고, 그들은 작은 선물을 주고 간다. 부산에서 버스를 타고 온 그들은 통도사 입구에서 내려 산길을 걸어서 돌라온다. 여간한 정성 없이는 힘든 일이다. 산길을 걸어서 쉬엄쉬엄 암자를 찾아오던 옛날 신자들은 사라진 지 오래, 거지들의 정성은 가히 부처를 닮은 셈이다.'(145~146쪽)
지금 앞에 있는 것을 보지 않고 자꾸 없는 것만 찾아다니는 사람들을 안타까워하시며, 지금, 바로 눈앞의 것을 마음껏 사랑하라고 당부하시는 스님. 내가 딛고 있는 땅, 흙, 거기에서 피어나는 풀, 나무, 꽃들을 살피고 음미하는 삶을 이야기하시는 스님. 당신이 그린 그림의 가장 열렬한 팬을 자처하시며, '어떤 때는 지금 막 그린 동자가 하도 예뻐서 그림을 들고 입을 쪽쪽 맞추기도 한다'(184쪽)는 천진하신 모습을 생각하니 웃음이 난다. 더위가 기승을 부리던 어느 해 여름, 밤바람을 쐬다 두꺼비 한 마리와 눈이 마주쳤는데 껌뻑껌뻑 윙크를 하는 것 같았다며 '윙크하는 달마대사'를 그리시곤 흡족해하시는 모습도 떠오른다. "스님, 니 몇 살이고?"라고 묻는 다섯 살짜리 여자아이와 친구가 되었다고 거리낌 없이 기뻐하시는 모습도. 세상 모든 어린이의 마음이 부처님 마음이라고 했던가. 스님의 일화를 만나다보면 나도 옹졸해진 마음을 벗고 때묻지 않은 아이의 마음으로 돌아가는 것 같다.
스님이 계시는 통도사 문수원에도 봄햇살이 눈부시게 쏟아지고 있을 것이다. 책 표지에 환하게 웃고 계시는 스님의 얼굴을 들여다본다. 참 좋다. 나도 덩달아 웃어본다. 스님의 말씀대로, 어제는 지나갔으니 어제의 먼지를 빨리 털어 내자. 그리고 지금, 바로 눈앞의 것들을 사랑하자. 그로써 내일이 밝아지는 것이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