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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로의 기적 - 죽음과 삶의 최전선, 그 뜨거운 감동스토리
캐릴 스턴 지음, 정윤희 옮김 / 한국경제신문 / 2013년 12월
평점 :
절판
'누군가에게 도움을 줄 수 있다는 것은 선택의 문제가 아니다. 오히려 특권을 안고 태어났다고 봐야 한다. 우리는 특정한 환경을 선택해서 이 세상에 태어날 수 없다. 지독한 가난, 허름한 수용소촌, 더욱이 잔혹한 행위가 일상적으로 벌어지는 곳에서 태어나고 싶은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그런 곳에서 태어나지 않았다는 자체가 특권을 타고났다는 얘기다. 그런데도 왜 그렇게 많은 사람이 이토록 고통받는 이들을 외면한 채 자기 삶을 사는 데만 급급한 걸까?'(72쪽)
책 날개 안쪽의 저자의 사진을 가만히 들여다본다. 아이들과 함께 손을 번쩍 들고서 환하게 웃고 있는 얼굴. 유니세프 미국기금 회장이자 CEO로서, 지난 7년간 굶주림, 가난, 질병으로 죽어가는 아이들과 함께 재난현장을 누빈 인물이라고 해서 뭔가 굉장한 열혈여성(?) 같은 이미지가 아닐까 했는데, 웬걸 세 아이의 엄마이기도 한 이 여성은 뭔가 평범하고(물론 절대 평범하진 않다!) 푸근하고 넉넉해보이는, 그런 느낌이어서 친근감이 들었다.
60년대 뉴욕 북부의 전형적인 중산층 집안에서 태어난 저자는 어렸을 때부터 벌레를 유독 무서워했다고 한다. 그래서 구호 현장에 투입된 후에도 처음에는 작은 벌레 한 마리만 나타나도 울상이 되어 덜덜 떨었다고...(벌레를 무서워해도 현장에 나갈 수 있다는 위안을 얻었다^^;) 낙타를 말뚝에 묶어놓는 곳을 보고 주차비 같은 것을 내야 하냐고 뜬금없이 물어 초조한 상황에 처해있던 일행에게 웃음을 주기도 하고, 유니세프의 홍보대사인 유명인들과 만날 기회가 주어질 때마다 아이처럼 방방 뛰며 "내가 이 사람을 직접 만나게 되다니!"라고 외치고 싶어 참기 힘들었다고 털어놓는 발랄한 캐릴 아줌마.
수단의 다르푸르 수용소에서 끔찍한 상황을 접하고 넋을 놓고 있다가, 아들이 수학 숙제를 도와달라고 건 전화를 받았을 때의 비현실적인 느낌에 대한 이야기도 기억에 남는다. 그 장면을 머릿속으로 그려본다. 학살과 강간으로 얼룩진 곳에서 살아남은 이들이 힘겹게 삶을 일구고 있는 곳에서, 지독한 몸냄새와 임시 변소의 지린내를 맡으면서, 저자는 휴대폰을 들고 지구 반대편에 있는 아들의 숙제를 도와준다. 그때 수용소 바닥에 앉아있는 저자의 무릎 위로 작은 소년 하나가 폴짝 올라왔고, 아들과 통화하면서 꼬마를 다정하게 껴안아 준다. 자신이 지금 있는 곳과 지구 반대편의 풍족한 자신의 집. 똑같이 귀한 생명으로 태어났으나 너무나 다른 상황에 처해있는 아이들의 모습...
이런 인간적인 면 외에도, 책장을 넘기면서 저자의 겸손함과 사람됨을 느낄 수가 있던 점도 좋았다. 그녀는 말한다. 유니세프의 CEO로서의 자신의 역할은 자기희생적인 것과는 거리가 멀다고, 안락함을 포기하고 안전이 보장되지 않는 위험한 곳에 가라고 강요받지도 않는다고. 그리고 드러나지 않고 묵묵히 노력하는 이들에게 감사를 표하는 것을 잊지 않는다.
'온갖 질병과 폭력적인 사태를 감수하면서 가족과 떨어져 매일같이 고생하는 것은 우리 직원들이다. 나는 그들의 모습을 지켜보는 시간이 대부분이며, 매번 그들의 노고에 경외심을 느낀다. 그때마다 나는 스스로에게 이렇게 묻는다. "내가 할 일에서 최선을 다하고 있는가?"'(73쪽)
각오는 했지만, 이 책을 읽으면서 먹먹해지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주사 한 대면 쉽게 낫는 파상풍 같은 병으로 매일매일 수많은 아이들이 허망하게 죽어간다는 것, 얼마든지 치료할 수 있는 질병임에도 불구하고 하루에 1만 9,000명의 아이들이 목숨을 잃고 있다는 것... 우리들 중 누구도 몰랐던 일이라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수도꼭지를 틀면 언제든지 물이 콸콸 나오는 것이 당연하고, 못 먹어서가 아니라 너무 먹어서 문제가 되는 질병들을 걱정하는 것이 일상이 된 채 살고있는 우리들. 하지만 이 지구의 다른 한쪽에서는 가슴아픈 진실들이 엄연히 존재하고 있다.
우리는 그동안 알면서도 마음이 불편하다는 이유로 애써 외면하려 했던 것이 아닐까. 이 책을 읽고 느낀 내 마음을 저자가 정확하게 드러내준 글귀가 있어 옮겨본다. 부디 이 마음이 내 생활을 핑계로 바래지 않기를, 한 웅큼씩이라도 실천에 옮기며 살 수 있기를.
'지금까지 나는 내가 성장하면서 자연스레 몸에 밴 생활 습관가 내게 주어진 삶의 여건을 숨기거나 부끄러워하거나 미안해한 적이 없다. 나름대로 최선의 노력을 다했기 때문이다...(중락)... 하지만 그 모든 것이 너무나도 과분했던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조금 덜 가져도 충분할텐데, 이것을 많이 부족한 누군가와 나눠 가져도 좋을 텐데...'(81~82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