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한글만세, 주시경과 그의 제자들 - 조선어학회, 47년간의 말모이 투쟁기
이상각 지음 / 유리창 / 2013년 9월
평점 :
"보아라. 지금 강도 일본이 우리 강토를 침략했으니 앞으로 한민족의 근본을 무너뜨리려 할 것이다. 그중에 가장 중요한 것이 문화요, 그 문화를 지탱하는 것이 언어다. 그러므로 저들은 제일 먼저 우리 말글을 빼앗으려 할 것이다."
"선생님, 어떻게 해야 우리 말글을 지켜낼 수 있을까요?"
"말모이를 만들어야지. 그래야 뒷날 어떤 일이 생겨 우리 말글을 쓰지 못하더라도 되살릴 수 있는 힘이 된다. 이것은 혼자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너희가 힘을 합쳐 시간이 얼마나 걸리든 어떤 희생이 따르든 해내야 하는 일이다. 지금부터라도 전국 방방곡곡에 산재한 우리말 어휘를 모으는 것이 급선무다."(56~57쪽, 주시경과 제자들의 대화)
우리말과 글. 어렸을 적부터 너무나 당연한 생활의 일부였기에, 오히려 그 고마움을 절실하게 느끼지 못하는 존재. 마치 공기처럼 항상 우리와 함께 있고 우리를 살 수 있게 해 주지만, 그 소중함을 우리는 쉽게 잊고 산다.
책장을 넘기면서 처음으로 진지하게, '만약 일제시대에 우리말이 사라졌다면 어떻게 되었을까'라는 생각을 했던 때를 떠올렸다. 페루를 여행했을 때, 잉카 인디오 출신의 한 가이드를 만났던 때였다. 그는 스페인어가 짧은 나를 위해 유창한 영어로 마추픽추에 대해 설명해 주었다. 나는 그가 스페인어와 영어 둘 다를 훌륭하게 구사하는 것을 칭찬했는데, 그는 고맙다고 말한 뒤 잠시 슬픈 얼굴을 했다. 그리고 나직이 말했다. 열심히 독학한 외국어로 가이드 일을 해서 생계를 이어가는 것은 기쁘지만, 날이 갈수록 어린 시절에 배운 자기 부족 언어를 잊어간다고, 점점 그 언어를 아는 사람들이 사라져가고 있다고... 한 언어가 사라지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그 어떤 책에서 읽었던 것보다 더 많은 것을 이야기하던 그의 얼굴을, 슬픈 눈을 생각했다. 아마 잊을 수 없을 것이다.
우리의 말과 글을 말살시키려는 일제의 침탈이 노골화되는 상황에서, 민족적으로 우리 말글을 보전하기 위해서 우리말 사전 편찬은 시급한 과제였다. 그때까지 우리는 한글이 세계에서 으뜸가는 소리글이라는 자부심이 있을 뿐, 그 말글을 담은 사전 한 권 마련하지 못한 처지였다. 하지만 주시경이 제자들에게 말했듯, 너무나 오랜 시간과 너무나 많은 희생이 필요한 일이었다. 무려 47년간의 피나는 투쟁의 역사... 모진 고문을 받아 불구의 몸이 되고, 형무소에서 추위와 굶주림에 시달리다 목숨을 잃기도 했던 그분들의 희생이 없었다면 우리의 말과 글은 역사 뒤편으로 사라졌을지도 모른다.
조선어학회의 중심인물들, 그리고 그들을 지원한 사람들까지 '대일본제국의 치안유지법'을 어겼다는 이유로 악랄하고 잔혹한 고문을 받았던 이야기를 읽으면서 괴로웠다(미리 마음의 각오를 했지만 별 소용이 없었다). 어떻게 견뎠을까. 어떤 마음으로 그 고통들을 이겨냈을까. 계속되는 모진 고문으로 몸과 마음이 지칠대로 지쳐서, 좁디좁은 감옥에서 구부리고 앉아 견디면서, 이은상이 지은 시 'ㄹ자'는 그래서 더욱 마음속에 스민다.
평생을 배우고도
미처 다 못 배워
인제사 여기 와서
ㄹ자를 배웁니다.
ㄹ자 받침 든 세 글자.
자꾸 읽어봅니다.
제 '말' 지켜라.
제 '글' 지켜라.
제 '얼' 붙안고
차마 놓지 못하다가
끌려와
ㄹ자깥이
꼬부리고 앉았소. (216쪽, <홍원 옥중에서>)
이 책을 읽기 전에는 '조선어학회사건'에 대해서 제대로 알고 있지 못했다. 아니, 부끄럽지만 알려고 한 적도 없었다. 그냥, 한글을 연구하던 학술단체를 일제가 조작하여 체포했던 사건 정도로만 암기하고 있었다(주입식 교육의 부작용이다). 우리 말과 글을 지켜야 겨레가 살고, 겨레가 살면 언젠가 독립을 쟁취할수 있다는 굳은 믿음으로 일제의 탄압에 맞선 '독립 투쟁'이라는 것을, 이제라도 알게 되어서 정말 다행이다.
우리가 오늘날 이렇게 자유롭게 우리말과 글을 쓰는 것은 그냥 얻어진 결과가 아니라는 것을, 가슴으로 기억하게 해 준 책. 그분들의 희생에 부끄럽지 않도록, 우리의 말과 글을 소중히 여기고 사랑하는 마음을 키워가고 싶다.
"말을 바르고 옳게 하고, 글을 바르고 옳게 써서 우리의 정신이 다 하나가 되어 우리나라를 튼튼하게 하여 우리나라의 빛이 널리 퍼지면 우리는 다 같이 그때에 우리가 우리의 할 바를 한 것을 기뻐하고 즐거워할 것이다."(292쪽, <표준 조선말사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