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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지문의 소설 속 인생 - 치열하게 살고, 장렬하게 죽은 명작 속의 인생들
서지문 지음 / 이다미디어 / 2013년 8월
평점 :
절판
우리는 왜 소설을 읽는 것일까? 작가가 창조한 누군가의 인생, 그 촘촘한 씨줄과 날줄을 들여다보며 우리가 마음속에 길어 올리는 것들은 무엇일까.
영국의 18~20세기는 오늘날 서구를 만든 근대화의 과정인 동시에, 그 근대화의 부작용에 대응하는 기나긴 몸부림의 시기였다. 그 시기 영국에서 태어난 20편의 소설들이 우리에게 주는 다채로운 의미들을, 상세하고 친절하게 설명해주는 강의를 듣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오만과 편견>, <제인 에어>, <폭풍의 언덕>, <위대한 유산>, <1984년>같이 친근한 제목들도 눈에 띄고, <클러리사 할로>, <톰 존스>, <트리스트럼 샌디>, <허영의 시장>같이 생소한 소설들도 많다. 예전에 읽어본 소설들은 ‘이렇게 볼 수도 있구나’하고 새로운 눈으로 보게 되고, 아직 접해보지 못한 소설들은 든든한 안내자 덕분에 읽어보고 싶어진다.
예전에 <더버빌가의 테스>를 읽었을 때, 나는 결혼해서 첫날밤에 자신의 과거를 고백하고 버림을 받는 테스가 답답해서 죽을 지경이기만 했다(하긴 그땐 고등학생이었던가). 그러나 미혼모는 모조리 타락한 여자였던 19세기 영국에서, 하디는 테스의 이야기에 ‘순결한 여인’이라는 부제를 달았다는 것만으로도 엄청난 물의를 일으켰다고 한다. 또한 미혼모의 몸인 테스가 사생아에게 세례를 행하는 모습에서 여신과 같은 기품과 위엄이 넘쳤다는 묘사는 교회의 권위에 대한 발칙한 도전이라는 맹비난을 받아야 했다. 사회의 기존 질서를 무너뜨리고 윤리와 도덕을 파괴하는 음란한 작가라는 비난에 시달리다 못해 하디는 소설 쓰기를 그만두기까지 했다니... 한 시대의 소설을 올곧게 이해하기 위해서 그 시대적 배경, 사회적 상황을 이해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새삼 깨닫는다.
‘시대마다 동시대인들의 가장 절실한 관심사를 다루면서 인간 의식의 지평을 넓히고 내면을 풍부하게 했’(62쪽)던 소설에서 우리는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즐거움을 맛보고, 또 공감과 위안을 얻기도 한다. 이 책을 읽는 동안 여러 장면들이 떠올랐다. 19세의 메리 셸리는 자신에게 닥친 공포와 비애를 프랑켄슈타인의 흉측한 괴물에게 투여하며 불행한 삶을 견뎌낸다. 요크셔 지방 황무지의 목사관에서 서로에게만 의지하며 살았던 브론테 자매들은, 제인 에어와 히스클리프의 이야기를 통해 자신들의 막막한 삶을 승화시킨다. 여성의 고등 교육과 사회 진출이 봉쇄되어 있던 사회에서 독학으로 여러 언어와 학문을 공부했던 조지 엘리엇은, 남다른 지식욕과 감수성을 가진 소녀 매기가 세상의 오해와 박해 속에서 죽음으로 자신의 결백을 증명하게 한다. 우리의 삶은 한 번 뿐이지만, 이런 훌륭한 문학작품들 덕분에 우리는 다른 시대, 다른 세상을 치열하게 살아냈던 삶들과 이렇게 만날 수 있다. 그들의 삶이 나에게 울림을 줄 때마다 한 뼘씩 자란다. 가슴이 벅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