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자가 달린다
마크 롤랜즈 지음, 강수희 옮김 / 추수밭(청림출판) / 2013년 8월
평점 :
절판


젊음의 자유는 흘러넘치는 삶의 자유이자 몸이라는 제한된 공간 속에 담아 두기 어려운 힘의 자유이다. 나이가 들면서 이 느낌은 점점 줄어든다. 살아가면서 멈추어야 할 수많은 이유를 너무나 잘 알게 된다...(중략)... 그러나 운이 좋다면, 정말로 운이 좋다면, 그 이유들이 아무리 거칠게 으르렁대도 나를 강제할 수 없음을 언젠가 알게 될 것이다. 바로 그것이 노년의 자유이다.(75~76쪽)

 

달리기의 심장박동을 경험하는 것은 플라톤의 선을 가장 강력하게 경험하는 것이리라.(88쪽)

 

젊음의 자유와 노년의 자유. 모든 달리기는 고유의 심장박동이 있다는 것. 원초적 놀이의 본질을 지니고 있는 달리기. 노화의 의미. 쾌락과 환희와 행복... 중년의 한 철학자가 달리면서 성찰하는 다채로운 주제들이 가슴에 와 닿는다. 그는 지금 마이애미 마라톤 대회의 출발선에 서 있다. 하지만 만반의 준비를 갖추기는 커녕, 종아리 근육 파열 때문에 재활 채료를 거치고 마라톤 대회의 직전 2개월간은 달려보지조차 못한 상태이다.

왜 그는 (누가 봐도 무리로 보이는) 마라톤에 도전장을 내밀었을까? 중년의 나이에 무언가 벅찬 목표를 이루었다는 뿌듯한 성취감을 얻기 위해? 아니다. 그는 '능력 이상의 성취' 가설은 자신에게 설득력이 없다고 한다. 오히려 '내가 달리기에서 가장 먼저 배운 것은 성취의 허무함'(46쪽)이라고 잘라 말한다.

 

그렇다면 달리기가 주는 즐거움, 쾌락 때문일까? 그것도 아닌 것 같다. '내가 막 끝낸 42.195km의 달리기는 쾌락과 아무 상관없다고 자신있게 말할 수 있다.'(263쪽)고 하는 걸 보니. 사실 그가 첫 마라톤을 끝낸 방법은 달리기와 스트레칭을 끝없이 반복하다가 다른 방법이 없을 때는 걷기도 하는 등, 날렵한 마라토너의 이미지와는 거리가 먼 것이었다. 하지만, 그는 '오히려 너무나 깊게, 심지어 혐오스러울 만큼 극도로 행복했다.'(263쪽)고 이어 말한다.

 

그에게 달리기의 목적과 가치는 본질적으로 내재되어 있는 것이다. 물론 그도 처음에는 자신의 달리기에 목적을 갖다붙였다. 자신의 집과 재산을 '세 마리까지 불어난 개과 동물들의 무자비한 턱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서'(115쪽)였다. 늑대 브레닌과 개 니나, 그리고 브레닌의 딸 테스의 파괴본능(?)을 소진시키기 위해서 함께 시작한 달리기였던 것이다.

하지만 그는 개들과 달리면서, 달리기의 심장박동을 경험하고, 온종일 달리던 어린시절을 기억해내고, 여러 사상가들의 생각들과 조우하고, 다채로운 사유를 펼쳐 나간다. 아이들을 언제까지 지켜줄지 확신할 수 없는 아버지의 애틋함, 사랑하는 개와 늑대들을 떠나보낼 때의 가슴아픔이 중간중간에 오버랩된다. 뭐라고 표현해야 하나. 철학자의 냉철한 이성적인 사유, 자신의 삶의 여러 풍경을 기억하고 관조하는 감성, 그리고 종종 등장하는 독특한 비유적 표현과 깨알같은 유머(특히 자신의 노화를 이야기하며 이 모든 것이 공룡 탓이다. 똑똑한 파충류인 공룡의 후손들이 우리와 공생했더라면 나의 부러움을 꽤 샀을 것이라며 투덜대는 대목은 압권이었다^^)까지... 이 모든 스펙트럼을 한 사람이 품고 있는 것이라니 놀랍다. 달리기는 분명 한없이 단순한 움직임인데, 그의 두뇌는 쉼없이 팽팽 돌아가고 있었을 듯.

 

'달리기의 목적과 가치는 그저 달리는 것이다. 달리기는 의미나 목적이 멈추는 삶의 장소 중 하나이다. 따라서 달리기는 삶을 살 만한 가치가 있게 만드는 것들 중 하나이다.'(247쪽)

 

이 책을 읽으며 나도 내 어린시절, 숨이 차오르도록 뜀박질하며 마냥 즐거웠던 날들을 떠올려보았다. 그의 말대로, 그때 나의 달리기의 목적은 '그저 달리는 것'이었다. 그의 표현대로 가장 오래되고, 가장 단순한 놀이인 달리기. 그 순수한 기쁨을 언제부터 잊고 살았는지.

'삶의 초기에 내가 알았지만 성장하여 어른이 되면서 잊기를 강요받았던 것'(19쪽)을 기억해내는 달리기, 그 기억의 문을 열어준 이 책에 감사한다. 끝이 없을 것만 같았던 더위도 이제 물러갈 시간, 가을의 공기가 상쾌하다. 구석에 박아뒀던 운동화 끈을 질끈 동여매고, 오랜만에 마음껏 달려봐야겠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