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사가 너무해
아르토 파실린나 지음, 이미선 옮김 / 솔출판사 / 201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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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핀란드어로 '돌로 세운 요새'라는 뜻의 신기한 이름을 가진 아르토 파실린나. 이 작가의 신선한 상상력이 거침없이 가지를 뻗어나가는 듯한 느낌의 소설, '천사가 너무해'를 재미있게 읽었다.

 

제목이 많은 것을 말해준다. 정말 천사가 해도 너무했다. 이런 트러블 메이커 천사라면, 부디 나한테는 영영 붙지 않기를 간절히 빌고 싶을 정도로.^^;

무슨 일을 하든 자꾸 꼬이고, 좋은 의도로 하려던 일이 항상 원하지 않는 방향으로만 진행되는 '머피의 법칙'의 최대치가 어디까지인지를 우리에게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허점 투성이 수호천사 '술로 아우비넨'. 전직 종교교사로서, 막 수호천사 교육과정을 마친 초보 천사로서 자신의 임무를 훌륭하게 수행하고자 활활 불타는 그의 의욕은 항상 뜻하지 않은 실수와 좌충우돌 사고로 이어지고 만다.

 

그가 그렇게 열심히 보호하려고 한 인간 '아로 코르호넨'(핀란드 이름들의 독특한 느낌이 좋다!). 수호천사가 안 붙어있을 때까지는 꽤 탄탄대로의 삶을 살고 있었던 이 평범한 남자는, 운 나쁘게도 이 의욕만 넘치는 초보천사의 피보호자로 낙점된 덕분에 말 그대로 '하늘이 내린 고난'들을 고스란히 맞게 되는 처지가 된다.

술로 아우비넨의 헌신적인 도움(?) 덕에 아로와 그의 친구가 탄 낡아빠진 영구차는 시속 200킬로미터를 넘게 달리다가 대형사고를 내고, 질주하는 오토바이와 부딪치기도 하는 등 뇌진탕을 세 번이나 경험하게 된다. 이 뿐인가. 피보호자의 창업 자본을 대주고 싶은 기특한 마음으로 아로의 계좌에 입금해 준 거액의 돈 때문에 아로는 한동안 경찰의 조사에 시달리기도 한다. 그리고 피보호자에게 알맞은 짝을 찾아주겠다는 마음으로 연결해 준 여자 때문에 아로는 두 여자의 신경전 사이에 끼이게 되고, 또 그렇게 얽힌 여자관계는 다른 대형사고로 이어지고... 나중에는 집과 가게가 불에 타고 엄청난 열차 사고까지, 그야말로 무시무시한 시트콤 수준의 사고 종합세트들. 많은 일들이 '지옥같이' 잘못되어 간다.

 

하지만 나에게 인상깊이 남은 장면들은 따로 있다. 자신이 좋은 의도로 벌인 일들이 정반대의 결과로 이어질 때마다 애처로울 정도로 풀이 죽고, 마음 아파하고, 때론 그 결과들에 기진맥진하여 눈물을 펑펑 쏟기도 하는 술로 아우비넨의 모습들이다. 영문도 모르고 하늘이 내린 고난 종합세트를 고스란히 받고 있는 아로도 불쌍하지만, 이 야무지지 못하고 요령없는 늙은 수호천사가 하늘을 훨훨 나는 대신 해안가 바위 위로 기어올라가 날개를 땅바닥에 축 늘어뜨린 채 울고있는 장면을 떠올리니 마음이 짠했다(나도 요령이 없고 자주 실수를 저지르는 편이라 공감이 갔는지도^^;).

 

그리고 또 감동적이었던 것은, 이 늙은 수호천사의 엄청난 회복력이랄까 상처 회복력 같은 것, 내면의 강인함과 포기하지 않는 정신이다. 그렇게 날개를 축 늘어뜨리며 울고 자학하고 케리매키(천사 본부)로부터 소환받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에 떨면서도 결코, 체념하거나 포기하지 않는다.

 

'수호천사는 우울한 기분으로 사고 현장의 하늘을 떠돌았다. 모든 것이 너무나 엉망진창으로 보였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좀 더 힘을 내어 더 이상 끔찍한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노력하겠다고 다짐했다.'(201쪽)

 

얼핏 읽으면 평범해보이는 저 마지막 문장. 하지만 한두 번의 실패가 아니라 수십 번의 실패 뒤에 저렇게 평범하게 '좀 더 힘을 내어 더 이상 끔찍한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노력하겠다'고 스스로를 격려하고 다시 일어서기란 얼마나 쉽지 않을 일인가. 하지만 이 늙은 천사는 정말 오뚝이처럼, 마치 체념하는 법을 모르는 사람(천사지만)처럼, 신기할 정도로 매번 툭툭 털고 아무렇지도 않게 다시 일어선다. 그리고 명언을 남긴다.

'대패질을 하면 당연히 대팻밥이 떨어지기 마련인데'(209쪽)

 

그래, 맞다. 열심히 쓱싹쓱싹 대패질을 하면 온전한 재목만 남는 것이 아니라, 수북히 떨어진 대팻밥이 남는 것이 당연하다(작가가 전전한 직업들 중에 벌목 인부와 목수도 있었다는 것이 왜 자꾸 생각나지? 경험에서 우러나온 비유는 역시 와 닿기 마련인 듯...^^). 그런데 우리는, 우리 사회는 대팻밥에 대해서는 한사코 눈을, 마음을 닫으려고 하는 것이 아닐까. 마치 대패질의 결과로 나온 매끈한 재목만이 가치있는 존재라는 듯이. 수없이 많은 대팻밥이 떨어지고 쌓였기에, 반질반질 윤이나는 나뭇결이 더욱 의미를 갖는다는 것을 우리는 외면하고 살고 있는 것이 아닐까. 앗, 반갑게도 옮긴이도 나와 같은 생각인 것 같다.

'대패질을 잘못해 재목을 망치고 대팻밥만 잔뜩 만들 수도 있는데, 작가는 그래도 대패질을 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노력하는 한 방황하지만, 진심이 있는 한 좋은 결과를 낳을 수밖에 없다고 말해준다.'(258쪽)

 

가슴이 따뜻해지는 것 같다. 내가 깎아낼 재목보다 내 발 아래 수북히 쌓인 대팻밥에 마음이 쓰여 우울해지는 어느 날, 대팻밥 제조기(?)였던 이 늙은 수호천사를 떠올리고 싶다. 그리고 힘차게 외쳐주는 거다. 대패질을 하면 당연히 대팻밥이 떨어지는 거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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