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터문 에디션 D(desire) 4
파스칼 브뤼크네르 지음, 함유선 옮김 / 그책 / 201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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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이 함정을 판, 내 욕망을 끄기는커녕 부채질하는 덫을 놓은 그녀를 원망하는 대신 그녀에게 존경심을 느꼈다. 사실 나는 내가 전혀 알지 못했던 이 달콤한 지옥을 사랑하고 있었고 내가 아주 다른 사람인 것을 발견했다."(337~338쪽)

 

'인간 내면에 숨겨진 은밀한 욕망의 세계를 탐험하고, 나아가 인간이라는 가장 불가해한 존재에 대해 깊이 이해' 하게 하는 작품들을 소개한다는 에디션 D시리즈의 '비터문'. 그 목적의식은 정확히 들어맞았다. 이 소설을 읽는 내내 한계를 모르고 치달아가는 인간의 욕망에 대해서, 그리고 사랑과 증오, 환상과 파괴가 뒤얽힌 정말 '불가해한' 인간의 내면에 대해서 한없이 침잠해 들어가는 느낌이었다.

이것은 심연이다. 인간 내면의 가장 어둡고 은밀하고 비참한 끝까지를 끝내 파고들어가고야 마는 심연. 근데 뭐랄까, 너무 캄캄하고 섬뜩하기까지해서 그냥 눈을 돌리고 싶지만, 이상하게도 외면하지 못하고 눈을 가린 손가락 틈 사이로 들여다보게 되는... 그런 대책없는 심연이다.

 

사실 이야기 구조는 꽤 단순하다. 아니다, 단순해 보이지만 결코 단순하지 않고... 아니다, 단순하다(지금 내가 뭐라는 건지^^;; 충격의 쓰나미였던 결말을 막 읽고 난 후라 정신이 혼미한 듯).

막 서른 살이 되던 해, 파리에 있는 한 고등학교에서 문학을 가르치는 디디에는 애인 베아트리스와 함께 인도를 향한 여행을 나선다. 베아트리스의 직업은 이탈리아어 교수고, 둘은 소르본느 대학 도서관에서 처음 만난 이후 5년 동안 충실히 사랑을 키워오다가 드디어 오랫동안 꿈꾸던 여행을 위해 터키 국적 여객선 트루바 호에 탑승한 것. 도대체 어떻게 해서, '우리는 행복했다. 세상에서 말하는 진리가 무엇이든 과감히 맞서겠다는 확신을 갖고 있었다'(13쪽)라며 시작했던 이 커플의 달콤한 '허니문'이 쓰디쓴 '비터문'으로 바뀌게 되었을까. 

 

지성과 상식, 또한 자신이 오랫동안 만들어온 동양에 대한 환상으로 가득차 있던 순진남 디디에에게 접근한 '악의 그림자(상투적인 표현이지만, 소설을 읽다보면 진짜 이 놈 밉다...징글징글하다)' 프란츠. 초췌한 얼굴에 얼굴로 봐서는 나이를 가늠할 수 없는, 휠체어를 탄 불구자인 그는 말 그대로 세 치 혀로 디디에를 쥐락펴락한다. 마치 자신을 마음대로 부릴 수 있다는 듯이 일방적으로 자기 이야기를 듣게 하는 프란츠에게 디디에는 처음부터 거부감을 느끼지만, 마치 세헤라자데의 이야기에 매일밤 귀를 기울이는 샤라알 왕처럼 그의 방으로 향한다.

그리고 프란츠의 젊고 아름다운 아내 레베카. 작가가 공들여 묘사하고 있는 레베카는, 뭐랄까 너무나 많은 겹을 가진 여자다. 책을 읽어나가면서 계속 든 생각... 도대체 이 여자 정체가 뭐야!!! 처음에는 그저 남자를 홀리는 팜므파탈이라고만 생각했는데. 암튼 치명적일 정도로 관능적인 것만은 틀림없는, 베아트리스와는 너무나 다른 매력을 가진 이 여자에게 디디에는 마음을 제대로 잠금해제시켜버린다. 그리고, 나흘 동안 이어지는 세헤라자데 프란츠의 이야기...

 

세헤라자데의 다층적이고 재미있는 이야기는 샤라알 왕의 마음을 녹게 했지만, 이 세헤라자데 악의 버전은 디디에를 서서히 파멸의 구렁텅이로 밀어넣는다. 프란츠와 레베카의 지난날에 대한 이야기, 변태적이고 기이한 육체관계, 욕망과 배신과 타락으로 뒤범벅된 이야기를 들으며 불쾌감과 분노를 느끼면서도, 디디에는 그 심연으로 젖어들었던 것이 아니었을까. 마치 불에 탈 줄 알면서 뛰어드는 부나방같이.

넷째 날, 프란츠의 이야기는 거의 매듭이 지어지고, 트루바 호에서는 신년축하파티가 벌어진다. 그리고 다섯 째날...은 이야기하지 못하겠다(스포일러 자진검열!). 돌이킬 수 없는 일들이 가끔, 인생에서는 일어나기도 한다...

 

만약 디디에와 베아트리스가 트루바 호에서 프란츠와 레베카를 만나지 않았더라면 어땠을까. 그들은 그냥 평범하게, 함께 책을 읽고 동양에 대한 환상을 품고서 사이좋게 나이들어 갔을까. 혹은 열정이 식고 단조로워져서, 프란츠&레베카 급까지는 아니더라도 뭔가 자신들의 내면을 건드리는 유혹에 이끌려 파탄에 이르게 되었을까. 인간이라는 존재의 내면을 그 밑바닥까지 그대로 들여다보는 일은, 제목처럼 쓰디 쓰다.

 

아, 그리고 또 하나. 파스칼 부뤼크네르야말로 진짜 세헤라자데가 아닐까 싶은, 풍부하게 흘러넘치는 지적인 비유들이 페이지마다 빼곡하다. 소설을 읽으면서 내용만 후루룩 빼 읽기보다, 인상적인 표현을 곱씹으며 읽기를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이 소설은 안성맞춤일 듯.

<롤리타>의 작가 블라디미르 나보코프가 자신의 예술론을 이렇게 표현했던 것이 문득 기억난다. '내게 픽션은 거칠게 말해 미학적 지복을 주는 한 존재한다'. 그렇다, '비터문'은 비록 읽어서 기분이 상쾌해지거나(오히려 반대이다-비위가 약해지기도 하고^^;), 깨알같은 재미를 주는 이야기는 아니다. 하지만 인간에 대해서 치열하게 끝까지 밀고 나가는 이야기이고, 무엇보다 미학적 지복을 넘치도록 선물해준다. 그래서 분명히,'존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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