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의 경고 - 현대인들의 부영양화된 삶을 꼬집어주는 책
엘리자베스 파렐리 지음, 박여진 옮김 / 베이직북스 / 201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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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특한 매력을 가진 책이었다. 원래 책을 휘리릭 빨리 읽는 편인데, 이 책은 며칠 동안 끼고 다니면서 틈틈이 곱씹으면서 읽었다. 다채롭고, 맛있었다.

 

건축학을 공부하고 건축 실무에 종사했던 경험을 가진, 현직 교수이자 칼럼니스트인 저자 엘리자베스 파렐리는 전공인 건축 외에도 종횡무진 여러 분야를 넘나들며 생각을 펼친다. 문학, 역사, 철학, 심리학, 민속학, 문화인류학... 다방면에 굉장히 풍부한 관심과 지식을 지닌 사람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래서 이 책의 많은 부분은 인용으로 이루어져 있다. 여러 철학자와 작가들이 남겼던 말이나 작품들에서 따온 인용에서부터 <뉴욕 타임즈>에 실렸던 일화, 세계보건기구의 자료집, 각종 웹사이트의 설문조사 자료들까지... 종횡무진 펼쳐지는 인용의 향연이다.

연상 작용이랄까, 대학생 때 처음 발터 벤야민의 책을 읽고 그의 환상적인 인용들에 감탄을 거듭하며 가슴 두근거렸던 때가 떠오르기도 했다. 이 책을 읽고 다시 벤야민을 만나고 싶어 온 책장을 뒤져서 <도시의 산책자>를 찾아낸 것도 수확이기도 하고.

 

우리는 끝없이 원하고, 소비하고, 버리고, 그 악순환을 당연하다는 듯이 끝없이 반복하고 있다. “나는 소비한다, 고로 존재한다”가 얼마나 많은 이들의 존재의 이유가 되어 있는가. 저자는 현대를 ‘풍족해도 의미는 빈약한 시대’라고 규정하며 현대인들이 좇고 있는 여러 ‘행복의 허상’들을 파헤친다. ‘현대 사회에서 지나치게 많은 것에 습관적으로 익숙해진 우리는 그토록 간절하게 열망하던 바로 그 의미를 강탈당하고 있다’(10쪽)는 통찰은 빛난다.

 

훌륭한 교사가 그러하듯이 단정적인 답을 제시하기보다는 다양한 각도에서 생각하게 하는 질문들이 쏟아진다. 그 질문들에는 우리가 평소에 너무나 당연하게 여기고 있었던 근본적인 생각들도 물론 포함된다. ‘민주주의가 우리에게 원하는 것을 준다면 어째서 그토록 많은 민주주의 산물들은 우리가 원하지 않는 것들인가? 우리가 민주주의 체제에서 살고 있다면 어째서 그토록 많은 체제가 파괴적이고, 값비싸고, 그토록 추할까?’(296쪽)

 

건축을 공부한 사람답게, 쉽게 설계되고 쉽게 버려지는 건축물들과 교외로 끝없이 확장되기만 하는 현대의 도시에 대해서는 특히 예리한 비판을 가한다.

‘물질세계와 제대로 관계를 맺지 못했기 때문에 우리는 일말의 가책도 없이 닥치는 대로 버리고 부수게 되었다. 펜과 면도기처럼 건축물도 쉽게 버리게 되었다. 교회, 우체국, 은행 등 한 때 도시의 중심으로 세워졌던 기관들이 이제는 투기 목적으로 세운 건물들과 쇼핑센터, 빌딩숲 속에서 한낱 임대공간이 되어버렸다. 1세기 전 마리네티가 예언한대로 되어가고 있다. “각 세대마다 자신들만의 도시를 지어야 할 것이다.”’(233쪽)

 

안전과 행복에 대한 병적인 집착, 거의 병적인 수준의 강박관념에 대한 성찰은 특히 공감이 가는 부분이었다. 24시간 아이들 가까운 곳에서 맴돌며 늘 감시하는 ‘헬리콥터 육아’와 범국가적인 ‘안전에 대한 염려증’에 대해 이야기하며 현대 아이들의 삶에 결핍된 것을 지적하는 작가의 눈은 예리하다.

“하지만 누에처럼 만족의 고치 안에서 사는 것이 진정으로 좋은 삶인가? 위험은 어쩌면 놀이의 범위를 규정짓는 수단일지도 모른다. (중략) 완벽한 예측이 가능한 안전은 모든 것을 지루하게 만든다. 결과적으로 현대 어린이들은 예전보다 재미가 없어졌다. 더 많은 장난감들, 더 많은 음식들, 더 많은 놀이들이 있다한들 재미는 훨씬 줄었다. (중략) 우리의 아이들은 노력 없이 얻은 자존감을 가득 안고 자라지만 미래에 그 아이들에게 가장 필요할지도 모르는 한 가지 근육은 쇠퇴할 것이다. 바로 역경을 견디는 근육 말이다.‘(282,283쪽)

 

지적인 도전을 불러일으키는 책을 읽는다는 것은 참 기분 좋은 일이다.

책을 읽다가 생소한 작가들이며 건축가, 건축물 이름이 나오면 나중에 찾아봐야지 하는 생각으로 메모하기도 했다. 지금 들춰보니 꽤 많다(갈 갈이 멀다는 것을 실감한다). 오스트리아 건축가 폰 에를라흐가 1716년에 비엔나에 세운 카를 성당, 여러 도시들의 다양한 틈새들을 평생 작업의 주제로 삼았다는 건축조각가 리차드 굿윈, 스위스 건축가 페터 춤토르가 스위스의 수호신을 기리며 지은 클라우스 형제의 예배당, 이탈리아 여성 건축가 가에 아울렌티, 이라크 여성 건축가 자하 하디드... 이 책 덕분에 여성 건축가에 대해 처음으로 관심을 갖게 된 것도 기쁘다. 세상은 내가 모르고 있었던 것으로 가득하다는 것을 다시 확인하고, 나는 기쁘게 한발 한발 걸어 나가는 것이다. 더디더라도 충실하게, 내딛는 발걸음을 음미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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