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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극으로 가는 트랙터 - 세상에서 가장 느리지만 가장 용기 있는 여행
마논 오스포르트 지음, 신석순 옮김 / 시공사 / 2012년 11월
평점 :
시작은 아주 작은 거라고. 거대한 일도 어느 누군가에 의해 작은 것부터 하나하나 시작되는 거라고. (65쪽)
털털거리는 초록색 트랙터를 타고 사람들의 꿈을 하나하나 모아, 유럽대륙과 발칸 반도를 거쳐 아프리카 대륙을 종단하여 세상 끝 남극으로 향하는 머나먼 길. 마논의 도전을 누가 단지 엉뚱하거나 무모하다고만 말할 수 있을 것인가? 순수함, 용기, 꿈을 향한 굳센 믿음, 포기하지 않는 의지, 그리고 무엇보다도 길에서 만난 수많은 이들과의 교감과 우정으로 가득한 그녀의 특별한 여정으로 빨려 들어갔다.
마논의 여정에서 특별한 점 중의 하나는, 여행 중에 펼치는 그녀의 공연일 것이다. 공연예술을 공부하고 어릴 때부터 자신만의 공연을 꿈꾸어 왔던 마논은, 꿈을 주제로 한 극을 통해 사람들과 소통한다. ‘어떻게 하면 용기를 구할까?’ 이것이 그녀의 공연이 던지는 중요한 질문이다.
전 세계의 모든 사람들이 이해할 수 있도록 몸짓 언어로 스토리를 꾸미고, 공연을 통해 사람들의 각양각색의 꿈을 수집하는 그녀의 모습을 상상하는 것은 즐거웠다. 연극의 결말 부분에서 사람들의 꿈을 모은다는 발상이 신선하게 느껴졌다. 고된 여행을 하는 중에 다양한 배경의 문화를 가진 사람들을 대상으로 공연을 한다는 일이 쉽지는 않았다. 공연할 장소를 찾아 애를 먹기도 하고, 어떨 때는 통역을 구하지 못해 쩔쩔매기도 하고, 에티오피아에서는 ‘돈 좀 있는 외국인은 말썽거리만 될 뿐’이라고 시비를 거는 사람이 공연을 망칠 뻔 하기도 하고... 하지만 그녀는 무대에서 자신의 에너지를 발산하고 관중들과 소통하는 일을 진심으로 즐기는 것 같았다. 그녀는 자신의 공연을 원하는 이들이라면 누구든 가리지 않고 서슴없이 다가간다. 수감된 청소년들 앞에서도 그녀는 자신의 에너지를, 꿈에 대한 메시지를 마음껏 나눈다.
꿈을 모으는 순간은 매우 특별했다. 예상치 못했던 엄숙한 분위기가 흘렀다. 모두들 자신의 꿈이 곧 세상 밖으로 여행을 떠나게 될 거라고 믿는 듯했다. 그들의 꿈은 다른 꿈들과 함께 아무런 차별 없이 여행을 떠나게 될 것이었다. 또한 온 세상 꿈의 영원한 상징으로서 남극에 묻힐 것이었다.(157쪽)
유럽을 거쳐 아프리카로 온 마논은 여러 가지 힘든 상황에 부딪치고 내적으로도 많은 갈등을 겪게 된다. 물 부족과 기아로 고생하는 많은 사람들, 각종 원조단체의 원조에도 불구하고 구조적인 가난을 극복하지 못하는 아프리카의 상황에 대해 그녀는 진심으로 안타까워한다. 그리고 동정에서 비롯된 무조건적인 후원보다는 지역 경제를 일으켜 ‘더 이상 구걸에 의존하는 사람들로 만들지 않아야 할’ 필요성에 대해서도 절감한다. 다만 얼마 전에 아프리카의 역사와 오늘날의 총체적인 상황을 분석한 인문서를 읽은 뒤라 그런지, 좀 더 아프리카에 대한 깊이 있는 시각이 아쉬워지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아프리카가 지금의 모진 고통을 겪고 있는 것에 대한 책임은, 오랜 세월 그 대륙을 철저히 수탈했던 서구 제국주의 국가들에게 있다고 생각하니 그녀의 착하지만 단순해 보이는 시각에 불편함이 느껴졌다. ‘백인의 눈으로 아프리카를 말하지 말라’라는 책도 기억나는데 역시 서구인의 한계 같은 것일까. 뭐 인문서랑은 장르가 다른 여행기인데 내가 너무 많은 것을 기대했던 것일지도.^^;
암튼 이런 아쉬움도 있긴 했지만, 역시 이 씩씩하고 멋진 여성에 대한 내 마음은 응원과 격려다. 특히 케냐의 성폭력 예방법을 통과시키기 위한 패션쇼 행사에서 자신의 경험을 사람들에게 공개적으로 이야기하는 그녀의 용기는 특히 감동적이었다. 열아홉의 나이로 네덜란드에서 잔인하게 당했던 강간을 이야기하며 그녀는 케냐의 법이 변화하기를, 케냐의 여성들이 정의에 의해 보호받기를 염원한다.
온갖 고난에도 포기하지 않고 자신의 꿈을 향하는 그녀의 여정을 힘껏 응원하고 싶다. 그녀의 꿈은 자신만의 꿈이 아닌, 하루하루 사는 것이 고달픈 아프리카의 아이들을 포함한 수많은 이들의 꿈과 희망을 함께 품고 있는 것이기에 더더욱. 다음 달이면 그녀의 트랙터는 드디어 희망봉을 떠나 남극에 도착한다고 한다. 부디 그녀가 무사히 남극에 도착해서(하필 겨울이라 살짝 걱정이 되기도 한다^^;), 사람들의 꿈을 남극빙하에 잘 심고 오게 되길 바란다.
‘절대로 이상적이라고 할 수도 없고 가끔은 희망조차 없어 보이는 내 상황이 여행길에서 만나는 사람들의 삶과 교차했다. 적적함, 과로, 마음의 혼란에도 불구하고 나는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 묵묵히 고군분투했다.(239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