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일드 - 4285km, 이것은 누구나의 삶이자 희망의 기록이다
셰릴 스트레이드 지음, 우진하 옮김 / 나무의철학 / 2012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책 표지의 낡은 등산화 한 짝이 무척 강렬하게 느껴진다.

프롤로그에서 저자는 캘리포니아 북부의 가파른 산등성이 위에서 떨어뜨린 등산화 한 짝을 굽어보고 있다. 혼자 수천 킬로미터에 이르는 머나먼 길을 걷고 있는데 잠시의 실수로 신발을 잃는다? 생각하기도 힘든 막막한 심정일 것이다. 그리고 다음 순간, 조금 전까지도 갓난아이처럼 품에 끌어안고 있던 남은 한 짝을 온 힘을 다해 멀리 내던져 버린다. 자기 자신을 던져버린 쓸모없는 등산화처럼 널브러져 있었다고 고백하는 그녀는, 자신의 삶도 그렇게 훌훌 털고 싶었던 것이 아닐까. 그렇게 모든 것이 절박했던 것이 아닐까. 안쓰러운 마음이 들었다.

 

저자 셰릴 스트레이드는 26세 되는 해에 '퍼시픽 크레스트 트레일(PCT)'을 걸어가겠다는 강렬한 열망을 느꼈다고 한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 바로 내가 해야만 하는 일이었다’라고 그녀는 그 열망을 이야기했다. 20대, 흔히들 인생에서 가장 빛나는 때라고 하는 시절이지만 셰릴의 삶은 끝없이 가라앉아 가는 듯해 보였다. 너무나 갑작스럽게 말기암 진단을 받고 세상을 떠나버린 엄마의 죽음으로 가족들은 뿔뿔이 흩어져 버렸고, 사랑하는 남자와 결혼했지만 자신의 슬픔에 빠져 방황하다 그와의 관계도 끝이 나 버렸다. 그러나 그녀는 자기 삶을 비관하거나 포기하는 대신 용기를 낸 것이다. “인생을 이처럼 우스꽝스럽게 만들어버린 모든 것으로부터 아주 멀리 떨어진 채, 내 의지와 힘을 다시 찾을 생각이었다.”는 구절을 읽으며 나도 모르게 마른 침을 삼켰다. 그녀를 힘껏 응원해주고 싶은 기분이었다.

 

도무지 현실적으로 금방 와 닿지 않는 어마어마한 길이, 4,285Km라니 얼마나 먼 길일까. 벽에 걸린 세계지도의 아메리카 대륙 쪽을 대충 눈으로 훑어봐도 장난이 아닌 길이다. 9개의 산맥과 사막과 강과 협곡, 황무지, 인디언 부족들의 땅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장대한 퍼시픽 크레스트 트레일을 생초보가 걸으며 겪는 이야기들은 그동안 내가 도보여행에 대해 품고 있던 일종의 낭만적(?) 이미지들을 산산이 무너뜨려 주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사막의 무시무시한 열기와 시에라네바다 산맥의 혹독한 강추위, 시시때때로 출몰하는 온갖 야생동물들의 위협, 마실 물을 구하기 위해 수 킬로미터를 걷고 또 걸으며 발톱이 빠져나가는 일도 다반사로 일어난다. 꼭 필요한 물건들만으로 짐을 최대한 간소하게 꾸리라는 조언을 초보자답게 가뿐히 무시하고 이것저것 몬스터(자기 배낭을 그녀는 이렇게 부른다) 속에 집어넣은 덕분에, 몬스터가 닿는 몸 곳곳은 쓸려서 상처투성이가 되어 피가 흐르고...

 

그렇게 대자연의 혹독한 길을 홀로 걸으며 그녀는 자신의 인생을 돌아보고 성찰해간다. 그러나 그녀가 원하는 것은 그 길을 통해 완전히 새로 태어난다거나 그런 거창한 것은 아니다. ‘강한 의지와 책임감, 맑은 눈을 가진 사람. 의욕이 넘치며 상식을 거스르지 않는 그냥 보통의 좋은 사람’의 모습을 되찾겠다는 것이다. 또 걷는 내내 돌아가신 어머니를 생각하는 그녀의 마음이 너무나 공감되어 목이 메기도 했다. 끝없는 그리움, 그리고 너무나 일찍 돌아가신 것에 대한 원망과 분노, 그리고 엄마의 부재로 인해 흩어져버린 가족들에 대한 애증까지... 끊임없이 걸으면서, 그 모든 얽혀졌던 감정을 이제 그녀는 풀어놓고 받아들이는 법을 배운다.

 

그녀는 혼자였지만, 또 혼자가 아니기도 했다. 퍼시픽 크레스트 트레일을 걸으며 만난 사람들은 모두 각양각색이고 먼 길을 걷는 각자 나름의 이유들도 모두 다채로웠지만, 자신의 삶을 다시 마주하고 새롭게 나아가기 위해 길을 걷는 그녀를 사람들은 진심으로 격려하고 여러 가지 도움을 준다. 안락함 대신 기꺼이 고생을 택한, 같은 길 위에서 만났다는 그 이유만으로 사람들은 동지애를 느끼고 기꺼이 서로에게 힘이 되어 주려고 하는 법이다. 책장을 넘기며 그동안 여행지에서 만났던 여러 그리운 얼굴들이 겹쳐 보이기도 했다.

 

까뮈는 “여행이란 자신의 내면의 무대장치를 부수는 것”이라는 말을 남겼다. 정말 공감이 가는 말이다. 그동안 나를 둘러싸고 있었던 익숙해진 모든 시간과 공간을 넘어서는 일, 새로운 눈과 마음으로 다른 무대 속에 서 있는 나를 발견하는 일. 셰릴 스트레이드는 4,000km가 넘는 긴 여정을 통해 그동안 자신을 방황과 슬픔으로 가두어두었던 무대장치를 성공적으로 부수었다. 그리고 새로운 자신의 무대를 창조하기 시작했으리라.

 

이 책 덕분에 안 그래도 포화상태(?)인 내 인생의 버킷 리스트가 하나 추가되어 버렸다. 배낭여행자들이라면 누구나 한 번은 걷고 싶어 하는 꿈의 코스라는 PCT를 나도 걸어봐야겠다는 소망.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 내가 해야만 하는 일’이라는 열망이 나에게도 꿈틀거리고 있다. 나는 그 길을 통해서 또 얼마나 자라게 될까. 어떤 무대장치를 부수고 새로운 무대를 만들어갈 것인가. 책을 덮었지만 두근거림은 사라지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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