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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기 전에 더 늦기 전에 - 호스피스 의사가 먼저 떠난 이들에게 받은 인생 수업
김여환 지음 / 청림출판 / 2012년 6월
평점 :
품절
죽음을 배우면 죽음이 달라지는 것이 아니라 삶이 달라진다. 자신의 마지막을 정면으로 응시하면 들쭉날쭉하던 삶에 일관성이 생기고 시련을 극복할 수 있는 용기가 생긴다.(10쪽)
이 책을 읽으면서 그동안 내가 경험했던 사람들의 죽음이 생각났다. 사람이 이 세상을 떠나면 밤하늘의 별이 된대... 아주 어렸을 적에 들었던 이 말을 떠올리며 밤하늘을 올려다보면서 그 사람들을 생각하는 버릇이 지금도 내겐 남아있다. 어렸을 적과는 달리 이제 이 말이 과학적인 근거 없는, 남아있는 사람들의 마음을 위로하기 위해 만든 말이라는 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지만 그래도 여전히 이 말을 좋아한다. 그들과 이 세계에서 다시는 만나지 못한다 하더라도, 무언가 보이지 않는 끈으로 연결되어 있다는 느낌 때문일까.
800여 명의 환자에게 임종 선언을 해 온 호스피스 의사는 담담한 어조로, 말기 암으로 시한부 인생을 살았던 환자들의 삶과 죽음의 이야기를 전하고 있었다. 따뜻하고 아름답고 이야기도 있고 너무나 안타깝고 마음 저린 이야기도 있다. 우리의 삶의 이야기들이 제각각 다채롭듯이 죽음의 풍경 또한 그러하다는 것을 새삼스럽게 다시 느낀다. 책에서는 먼저 세상을 떠난 이들을 '선배'라고 부르는 대목이 종종 등장하는데, 그들의 죽음을 지켜보면서 우리는 우리의 죽음을 생각하고 삶을 돌아보게 되니 맞는 표현이라는 생각이 든다. 건강할 때 먼저 세상을 떠나는 '선배'에게 죽음을 배우라는 말이다.
"좋은 죽음이 좋은 삶에서 비롯되는 것처럼, 좋은 삶은 좋은 죽음을 상상하는 데에서 시작된다."(227쪽)는 말을 음미한다. 우리는 마치 내게는 고통스런 병이, 갑작스런 죽음이 들이닥치지 않을 것처럼 살고 있는 것이 아닐까. 하지만 "죽음읜 신이 온다는 사실보다 확실한 것은 없고, 죽음의 신이 언제 오는가보다 불확실한 것은 없다"(7쪽)는 독일 격언처럼, 죽음은 누구에게나 딱 한 번 온다는 것만이 공평할 뿐, 언제 어떤 방식으로 내게 오게 될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러므로 애써 회피하거나 두려워하기보다는, 나의 마지막을,'나의 좋은 죽음'을 상상하고 준비해야 하는 것이리라.
책을 덮으며 이 책에서 만난, 수많은 이들의 삶과 죽음의 이야기를 생각한다. 자신도 말기 담낭암으로 말할 수 없이 고통받으면서도 다른 환자들에게 진심어린 상담을 해 주고, 사람들이 마지막 숨을 거둘 임종실이 쓸쓸해 보인다며 학이 그려진 그림 한 점을 기증하고 떠난 사람의 따뜻한 마음을 생각한다. 암세포가 아래턱을 녹여버려 혀와 치아가 그대로 드러나 누구에게도 자신의 처참한 얼굴을 보여줄 수 없어 수없이 자살을 생각했으면서도, "죽을 때 죽더라도 자살은 할 수 없어요. 애들한테 상처가 될 테니까..." 하던 아버지의, 아이들에 대한 사랑과 책임을 생각한다. 아이가 네 살 때 직작암으로 아내를 떠나보냈을 때 아내와 스스로에게 한 약속을 지키기 위해, 정년퇴직 후 호스피스 봉사에 헌신하고 있는 한 봉사자가 품고 있는 인간에 대한 애정과 연민을 생각한다. 자신이 여행한 너무나도 짧은 생을 '생명의 건전지가 다할 때까지 열심히 살아가는 것'이라고 말한 일곱살짜리 소아암 환자의 용기를 생각한다.
'죽음을 기억하라(Memento Mori)'. 중세 수도사들은 이 말로 아침인사를 대신했을 만큼 이 말을 즐겨썼다고 한다. 죽음을 기억하라는 말은, 갑작스런 죽음을 미리 걱정하거나 인생의 모든 것을 초월하듯 살아가라는 의미가 아닐 것이다. 이 책의 저자는 메멘토 모리를 '인생의 마지막 상자를 쌓는 작업'이라고 표현한다. "자기만의 상자를 차곡차곡 쌓아가는 작업이 인생이라면 가장 꼭대기에는 모리(죽음)이라는 이름의 상자가 자리한다. 이 상자를 잘 올려놓으면 인생이 안정적으로 완성되지만, 잘못 올려놓으면 기껏 쌓은 상자가 와르르 무너질 것이다."(229쪽)
그리고 남는 사람이 떠나는 사람의 인생을 함께 돌아봐 줄 때, 떠나는 사람을 위해 아낌없이 자신의 시간을 내어줄 때 마지막 상자 쌓기는 완성된다고 한다. 인생의 마지막 상자를 잘 쌓으면 그 인생은 좋은 것이 되는 것이다.
나는 내 상자를 어디까지 쌓아왔는가를 생각한다. 듬성듬성하게 쌓아온 시간도 있었고 악착같이 차곡차곡 쌓았던 시간도 있었다. 그리고 앞으로 어떻게든 상자를 높게 멋지게 쌓아야지, 하는 생각이 내 머릿속을 꽉 메우고 있었다. 사실 마지막 상자를 생각하는 것은 아직까지 내겐 두려운 일이다.
하지만 내 상자들을 좀 더 촘촘하고 풍요롭게 쌓기 위해 마지막 상자를 상상하고 준비하는 것은, 내 삶을 더욱 사랑하는 일이라는 생각이 든다. 어떤 높이에서, 어떤 방식으로 마지막 상자를 쌓게되든 최선을 다해 정성스럽게 내 상자들을 쌓아가야겠다. 그리고 또 하나, 내 상자를 준비하면서 다른 이들의 상자에 관심을 기울이고 마음을 함께하는 일이 얼마나 소중한 일인지도. 내 인생의 버킷리스트에 한 줄을 더해 본다. '건강할 때 호스피스 병동에서 자원봉사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