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토록 아찔한 경성 - 여섯 가지 풍경에서 찾아낸 근대 조선인들의 욕망과 사생활
김병희 외 지음, 한성환 외 엮음 / 꿈결 / 2012년 5월
평점 :
품절


역사를 무척 좋아하지만, 고등학교 다닐 때의 국사시간은 꽤나 암울했던 기억으로 남아있다. 재미도 감동도 없었고 어떤 의문이나 문제제기가 끼어들 여지가 없었던, 오로지 시험을 위한 암기 위주의 공부였다(물론 국사과목만의 문제는 당연히 아니었지만). 그래서 이런 책을 만나면 행복감을 만끽함과 동시에, 옛날의 나에게로 살포시 돌아가 위안을 건네곤 한다.

 

OBS에서 방송한 교양프로그램 <세상을 움직이는 역사>의 내용을 편집한 이 책은, 그동안 암울한 시기로만 인식하고 있었던 우리의 근대사의 속살을 펼쳐 보여준다. ‘일본의 침략적 제국주의에 고통 받던 시대’라고만 정의내리기엔 너무나 다채롭고 생기발랄하게 느껴진다. 일제강점기라는 고난을 맞으면서도, 단발령과 창씨개명, 태평양전쟁을 겪으면서도 나름대로 치열하게 자기 삶을 살았을 사람들. 새로운 문물의 홍수 속에서, 옛것과 새것이 뒤섞임 속에서 그들이 일구어갔을 일상생활을 상상해 볼 수 있었다. 이것이 거시사와는 다른, 미시사만이 지닌 힘이 아닐까.

 

광고, 대중음악, 사법제도, 문화재, 미디어, 철도의 여섯 가지 범주로 바라본 근대의 풍경들. 이 책을 통해 새롭게 알게 된 사실들도 많았고, 또 대강은 알고 있었지만 속사정까진 잘 몰랐던 것들을 제대로 배울 수 있어 기쁘다. 가슴 아픈 이야기도 많았는데, 일제강점기 후진적이었던 사법 제도가 해방 이후 인적 청산과 개혁을 이루지 못한 역사에 대해서는 특히 확확 열 받았다. 으아아~

그리고 무엇보다 일제 강점기 때 민족 문화재 수집과 보호에 심혈을 기울여 문화재의 일본 유출을 막았던 간송 전형필에 대해서 알게 된 것이 큰 수확이다. 어마어마한 재산을 물려받았지만 자기 사리사욕을 채우지 않고 앞장서서 수많은 문화재를 구해 낸 사람. 나라 잃어버린 백성이란 탓에 때로는 죄인 취급도 받고 각종 재판에 휘말려가며 구한 수많은 국보와 보물들... 당시 한글 말살 정책을 펴고 있던 일제의 눈을 피해, 오랜 노력 끝에 간신히 구한 <훈민정음 해례본>을 오동나무에 넣어 베개 속에 숨겨놓고 잤던 간송 같은 이가 있었기에 우리 문화의 맥이 끊어지지 않고 우리나라가 근대에서 현대로 빨리 넘어갈 수 있었다. 이런 이름을 우리는 왜 국사 시간에 배우지 못했을까?

 

인문학자 남경태 씨가 책의 대담 중에 했던 말이 잊히지 않는다. 그는 찰리 채플린이 했던 말, “인생은 멀리서 보면 희극인데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다”는 말을 거꾸로 뒤집어 인용한다. 즉 일제 강점기는 “롱 테이크로 보면 비극적이고 암울한 시대였는데, 일상생활은 희극적이었다고 말할 수는 없겠지만 비극과는 다릅니다.(56쪽)”라는 것이다. 정말 고개가 절로 끄덕여지는 통찰이다.

맞다. 아무리 나라를 잃어서 서럽고 힘들어도, 사람들은 여전히 일상을 살아갔을 것이다. 여전히 끼니때가 되면 배고픔을 느꼈을 것이고, 광고를 통해 본 새로운 물건들을 욕망하기도 하고, 당시엔 세련되게 여겨진 트로트 가요를 부르며 마음을 달래도 보고, 신문을 통해 세상 돌아가는 소식을 접하며 이야기를 나누었을 것이다. 날벼락처럼 일제강점기라는 현실에 떨어지게 되었지만, 그런 현실 속에서도 열심히 하루하루를 살았던 우리 할아버지와 할머니들의 모습들... 그 일상의 모습들을 떠올리며 책장을 넘기고 있으니 왠지 애틋한, 그러면서도 한편 벅찬 마음이 든다. 이토록 면면하게 이어져 내려오는 삶이란 것에 대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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