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저 에버트 - 어둠 속에서 빛을 보다
로저 에버트 지음, 윤철희 옮김 / 연암서가 / 201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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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저 에버트’라는 이름을 확실하게 각인하게 된 것은, 몇 년 전 만나게 된 <위대한 영화>라는 책을 통해서였다. TV 영화 비평프로그램인 <시스켈과 에버트>를 통해 이름이 알려진 영화 평론가인 그가 사랑하는, '다시는 볼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고통스러운 생각이 드는' 영화들을 모아놓은 그 책은 매혹적이었다. 그의 리스트에 들어있는 영화들 중에선 내 가슴에도 ‘위대한 영화’의 전당에 들어있는 작품들이 여럿 있어서 기뻤고, 그 책 덕분에 그동안 미국 영화에 편중되어 있던 취향을 돌려 훌륭한 유럽영화와 아시아영화, 고전영화들을 만나게 되었다. 어떤 리뷰들은 영화만큼이나 아름다웠던 기억이 난다.

 

그렇듯 왕성하게 활동하던 그가 갑상선암 치료에 따른 합병증 때문에, 먹고 마시고 말하는 능력을모두 잃어버리게 되었다는 것을 이 회고록을 통해 처음 알게 되었다. 40년간 브라운관을 통해 수많은 대중들 앞에서 입담을 과시하던 그에게, 목소리를 영영 잃는다는 것은 얼마나 큰 고통이었을까. 하지만 그는 자신의 고통에 거창한 의미를 부여하지 않는다. 시종일관 태연하고 담담한 어조로 자신이 겪었던 시간들에 대해 이야기한다. 어깨와 두 다리에서 살점을 떼어내어 시도한 수차례의 재건 성형이 실패하고, 불완전하더라도 말하는 능력을 회복하기 위해 겪은 세 차례의 수술도 모두 성공하지 못했고, 잃어버린 부위의 환지통에 시달리면서도 그는 절망하지 않는다. 대신 이렇게 이야기한다.

 

‘나는 이런 상태에 빠졌고, 이 장애를 고칠 방법은 없다. 내가 글쟁이라는 것, 그래서 나 자신을 글을 통해 표현할 수 있다는 것은 행운이다.(568쪽)’

 

614쪽에 이르는 두꺼운 책이었지만 책장은 술술 잘 넘어갔다. 태연하고 천연덕스럽고 유머가 담긴, 그 아래에 삶에 대한 깊고 예리한 통찰력을 담고 있는 그의 글솜씨에 홀린 듯이 책을 읽어 내려갔던 것이다. 책을 다 읽고 덮으면서 다시 표지 사진을 물끄러미 들여다봤다. <에스콰이어>지에 전면으로 실렸다는, 그가 현재 어떤 모습인지를 정확하게 보여주는 사진. 다리에서 취한 뼈와 살로 얼굴을 완전히 재건하는 수술은 실패했지만, 그래서 그의 턱 일부는 사라지고 없지만, 그는 웃고 있다. ‘그게 뭐 어때서?’라는 듯이.

 

‘그 얼굴을 부인하는 것은 의미 없는 짓이다. 그 얼굴을 감출 도리는 없다. 그런 얼굴로 살아가는 편이 훨씬 낫다. 그 얼굴이 당신 마음에 들지 않으면, 그건 당신의 문제다. 나는 내가 이보다 더 나쁘게 보이지 않아서 행복하다. 나는 삶을 계속 살아가기 위해 간단한 결정을 내렸다. 나는 글쟁이였다. 그래서 나는 운이 좋았다. 나는 썼다. 그러므로 나는 살았다. 다른 외과적 시도를 제의받았지만, 나는 싫다고 말했다. 할 만큼 했다. 나는 내 지금 모습처럼 보일 것이고 나 자신을 활자로 표현할 것이다. 그리고 만족할 것이다.(577쪽)’

 

자신과 사람들의 삶에 대한 그의 따뜻한 시선, 그를 지켜준 아내 채즈에 대한 지고지순한 믿음과 사랑, 영화와 글쓰기에 대한 한없는 애정과 열정... 책을 읽는 동안 가슴이 따뜻해져 왔다. 삶이 던져준 커다란 고난을 이겨낸 사람들에게서 느껴지듯, 로저 에버트의 이야기 속에서도 삶의 본질을 꿰뚫어보는 그의 시선을, 지혜와 평온함을 느낄 수 있었다. 그는 간결한 어조로 말한다. ‘친절’은 그의 정치적 신념의 전부를 커버한다고. ‘우리에게 부여된 능력을 따른다면, 결국, 우리는 다른 이들을 조금 더 행복하게 만들어주는 일을 할 수 있고, 그것이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이라고(610쪽)’ 그는 말한다. 크게 고개가 끄덕여진다.

 

‘다른 이들을 덜 행복하게 만드는 것은 범죄다. 우리 자신을 불행하게 만드는 것은 모든 범죄가 비롯되는 지점이다. 우리는 세상의 기쁨에 기여하려고 노력해야 한다. 우리가 무슨 문제점을 가졌고 우리의 건강상태가 어떠하며 우리가 처한 상황이 어떠하건, 그것은 참말이다. 우리는 노력해야 한다. 내가 이 깨달음을 늘 알았던 것은 아니다. 그래도 나는 이걸 알아내기에 충분할 만큼 오래 살았다는 사실이 행복하다.(610쪽)’

 

사랑스러운 글이다. 사실 이런 깨달음을 모른다기보다는, 우리는 모르는 척하는 게 아닐까. 살아가는 일이 쉽지 않다는 이유에서, 우리 자신도 다른 이들도 덜 행복하게 만드는 것에 대해 너무나 많은 핑계를 대고, 눈앞의 다른 이익에 급급하고, 편협해진 눈과 마음을 쉽게 정당화하면서 살아가는 것이 아닐까. 로저 에버트의, 한쪽 턱의 살점이 없는 채로 당당하게 웃는 얼굴이 잊히지 않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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