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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이 끝난 건 아니야 - 2004년 윗브레드 상 수상작 ㅣ 미래인 청소년 걸작선 15
제럴딘 머코크런 지음, 이재경 옮김 / 미래인(미래M&B,미래엠앤비) / 2011년 11월
평점 :
절판
<로빈슨 크루소>를 미셸 투르니에가 뒤집어서 썼던 <방드르디, 태평양의 끝>을 감명 깊게 읽었던 이후로, 이런 식으로 원래의 텍스트를 독창적으로 재해석한 책들에 대해 무한한 애정이 가게 되었다.
이 책 <세상이 끝난 건 아니야>는 노아의 방주 이야기를, 죄 많은 인간들에 분노해 세상을 쓸어버린 신의 입장이 아니라 대재앙을 견뎌내는 인간의 입장에서, 신의 계시를 받고 행하는 노아의 입장이 아니라 남편과 아버지의 결정을 따르며 겪는 여성들의 입장에서, 그리고 동물들을 선발해 방주에 태운 인간의 입장이 아니라 방주에 태워진 채 끔찍한 시간을 겪는 동물들의 관점에서 재해석해낸 소설이다. 슬프고, 눈물겹기도 했고, 많은 생각들을 던져주는 책이었다.
기독교인이 아니더라도 워낙 유명해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친숙한 대홍수와 노아의 방주 이야기. 성경에서는 노아와 노아의 세 아들인 셈, 함, 야벳의 이름만 나오지만 작가는 상상력으로 여성 캐릭터들을 만들어낸다. 노아의 아내 아마, 그리고 셈의 아내 바스맛, 함의 아내 사래, 야벳의 아내가 된 질라와 막내딸 팀나. 소설의 실질적인 주인공인 팀나의 시각에서 그려지는 노아의 방주 이야기지만, 다른 등장인물들과 방주에 실린 동물들의 시각도 보여준다. 한 가지 이야기를 바라보는 각기 다른 사람들과 사자, 누, 토끼, 까마귀 등 동물들의 다양한 시선들. 노아가 아닌 노아의 아내, 아들과 딸들, 그리고 동물들의 관점에서 펼쳐지는 작가의 상상력의 결이 섬세하게 느껴졌다.
주인공 팀나는 참 매력적이고, 인간적이고, 사랑스러운 성장을 보여주는 캐릭터이다. 이웃사람들이 기분나빠하고 손가락질하는 미친 가족의 막내딸 팀나. “아버지는 마음만 먹으면 거꾸로 서서 하늘을 가로질러 걸을 사람”(p.11)이라고 믿고 아버지가 하느님으로부터 받은 계시를 믿고 순종하면서도, 그녀는 무작정 아버지의 믿음을 따르는 오빠들과는 다르다. 아무런 의구심도 품지 않고 하느님의 말씀만을 따르는, 살려달라고 노아 가족에게 목숨을 애원하는 사람들을 야멸차게 내팽개치는 아버지와 오빠들을 바라보며 팀나는 의문을 품는다.
하느님이 눈물을 흘리셨고, 그 눈물로 세상을 덮으셨다. 하지만 그전에 나와 내 가족에게 손을 뻗어 안전한 곳으로 끌어내주셨다. 그런데 나는 왜 기쁜 마음으로 하느님을 찬양하지 못하는 걸까? 난 은혜도 모르고 감사할 줄도 모르는 아이인가?(p.23)
물론 가족서열 최말단인 팀나에게 그런 의문을 제기할 권한이 있을 리 만무하다. 그러던 팀나는 우연히 세찬 물살 속에서 죽어가는 한 여인과 그 여인의 아이들인 한 소년, 그리고 소년의 품에 안긴 아기를 발견한다. “사탄들. 아버지의 말이 항아리 안의 돌멩이처럼 내 머릿속을 덜컹덜컹 굴렀다”(p.69)라고 느끼고 갈등하면서도 결국 팀나는 그들을 외면하지 못하고 남동생 야벳과 함께 소년과 아기를 구해 동물우리에 숨겨준다.
자신이 구해준 소년 키팀의 정체를 사탄이라 생각하며 끊임없이 죄책감에 시달리면서도, 식구들의 눈을 피해 어떻게든 먹을 것을 갖다 주고 소년을 지키기 위해 승강구 뚜껑 위에서 자는 팀나. 밍크가 물어죽인 갓난아기 아달랴 대신 소년이 품고 있던 아기를 안겨주어 가족을 위기에서 구해내는 팀나. 나중에 자기 안에 사탄이 들어갔다고 생각하는 아버지와 오빠들에게 죽임을 당할 위기에 처한 팀나가 떠올린 생각, 그 소박한 깨달음은 나를 감동시켰다.
제발 잘 숨어 있어라, 꼬마 키팀. 무슨 일이 있어도 나타나지 마라.(...) 난 네가 사탄이라고 생각하지 않아. 만약 네가 사탄이라면, 그건 사탄이 그리 무서운 존재가 아니라는 뜻이겠지. 다만 좀 귀찮을 뿐이야.(p.217)
자기 목숨이 위험한 상황에서도 다른 이가 무사하기를 진심으로 걱정할 수 있는 것, 그것이 세상이 끝날 것 같은 극한 상황에서도 마지막으로 품을 수 있는 희망이 아닐까. 그래서 슬프고 가슴 먹먹해지는 이야기였지만, 희망 한 줄기를 품게 하며 이야기는 끝을 맺는다. 키팀과 함께 뗏목을 타고 아버지로부터 도망친 팀나가 닿게 된 새로운 해안 풍경, 그 여운이 오랫동안 가슴에 남을 것 같다. “낯선 이는 모두 하느님의 선물이며 따라서 소중히 돌봐줘야 한다고 믿는”, "심지어 굶주린 핀치새도 쫓아버리지 않는“(p.252) 사람들이 일구어가는 세계. 그래서 우리는, 감히 희망을 말할 수 있는 것이리라.
해당 서평은 출판사에서 제공받은 도서를 읽고 작성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