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태 - 그 창조적인 역사
피터 투이 지음, 이은경 옮김 / 미다스북스 / 2011년 10월
평점 :
품절


 

 원래 나는 권태라는 단어에 애정이 깊은 편이다. 뭐 내가 딱히 권태로운 성격이라서가 아니라(사실 파닥거리는 것을 즐기는, 정반대에 가깝다), 순전히 10대 때부터 매료된 이상(李箱) 덕분이다. 첫 키스의 기억만큼 강렬했던, 이상과의 첫 만남이었던 ‘날개’의 주인공이 보여주었던 ‘권태’에 대한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그리고 세상을 떠나기 1년 전, 이상은 ‘권태’라는 제목의 에세이를 일본에서 발표했다. 그 중 한 구절은 이렇다. 

 “끝없는 권태가 사람을 엄습하였을 때, 그의 동공은 내부를 향하여 열리리라. 그리하여 망쇄할 때보다도 몇 배나 자신의 내면을 성찰할 수 있을 것이다.”

 아아, 사랑할 수밖에 없다. 겨우 스물일곱 해 살았던 주제(?)에 이런 시각을 가지고 있었다니. 그래서 사람들은 그를 일컬어, 시대를 앞서간 천재라고 하나보다.

 이 책 <권태>의 저자 피터 투이도 자타가 공인하는 권태 매니아(?)이다. 파릇한 나이에 세상과 이별한 이상과 차이가 있다면 올해 환갑인 그는 꽤 오랫동안 권태를 주제로 사색해 왔다는 것일 것이다. 그는 권태에 지워진 낡은 견해와 부정적인 개념 정의에 반기를 든다. 그리고 “권태야말로 사상가와 예술가들이 지금까지 널리 인정돼온 것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고 변화를 모색할 수 있는 계기”였다고 강조한다.

 물론 저자도 ‘만성적 권태’의 위험에 대해서는 경고한다. 사람들이 만성적 권태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종종 극단적인 방법을 취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만성적 권태가 감추고 있는 파괴적 힘, 극단적인 방법의 선택이라... 이거 혹시 우울증과도 관련 있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우울증으로 고통을 겪다 결국 돌이킬 수 없는 선택을 한 사람들을 우리는 (슬프게도) 꽤 많이 알고 있다. 그들이 겪은 우울증에는 이 만성적인 권태도 포함되어 있지 않았을지.  


 그렇다면 저자가 말하는 실용적이고 창조적인 권태란 뭘까? “단순하고 일상적인 권태는 우리 곁에 살아 숨쉬는 지극히 정상적인 감정”일 뿐이라고 저자는 말한다. “그것은 분명 순수하고 희석되지 않은 시간이며, 거기에서 광채를 발견하는 것은 바로 당신의 몫”이라는 저자의 시각은 분명히 실용적이고 창조적이다. 무미건조한 시간으로 여겨온 권태에서 우리는 광채를 발견할 수 있다는 것... 아마도, 이상도 그랬겠지?

 우리가 흔히 단조롭고, 쓸모없고, 심지어 해로운 감정으로 여기는 권태가 아닌, 오래 담금질한 사색을 통해 새로운 눈으로 권태의 창조성을 바라보게 하는 책. 좋은 책은 이렇듯, 전혀 다른 시선이 가능함을 보여준다. 그것도 아주 성실한 방식으로.

 아무래도 저자 피터 투이는 르네상스형 인간 같다. 저자의 전공인 그리스/로마 고전학 외에도 철학과 심리학, 문학과 회화에 비평까지, 온갖 분야를 종횡무진 넘나들며 권태의 역사를 추적하고, 권태의 양상을 두루두루 펼쳐낸다. 가끔 그 비행에 어지럽긴 했지만, (능력은 심하게 모자라도) 르네상스형 인간이 되고 싶어 하는 나에게는 좋은 지적 자극을 주었던 책이었다. 그렇다, 이렇게 생각으로 꽉 찬 책을 읽는 일은, 전혀 권태롭지 않은 일인 것이다.

[ 네이버 북카페를 통해 제공받은 도서를 읽고 작성된 서평입니다.
 본 서평은 작성자 본인의 주관적인 견해에 의하여 작성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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