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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리브 키터리지
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 지음, 권상미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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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열세편의 단편 묶음

<올리브 키터리지>는 미국 잉글랜드 메인주의 바닷가 마을, 크로스비에서 살아가는 올리브 키터리지와 주변 사람들의 이야기이다. 총 13편의 단편소설을 구슬 삼아 올리브라는 실에 꿰어놓은 작품이다.

소설은 <약국>이라는 제목의 단편에서 시작한다. 중년의 올리브와 그녀의 남편 헨리 키터리지의 이야기이다. 그다지 새로운 것도, 특별한 것도 없는 부부의 이야기가 여상스럽다. 누구에게나 친절한 헨리와 친절을 경시(?)하는 올리브는 얼핏 보면 피차 상극이다. 매사 부딪힌다. 게다가 올리브와 헨리는 마음 속에 각각의 다른 사랑 하나씩을 비밀스럽게 품고 살아간다. 헨리는 약국의 일을 도와주었던 데니즈, 올리브는 나무에 차를 박아 교통사고로 죽은 짐 오케이시를 품고 살아갔다.

<밀물>은 케빈 코울슨과 올리브의 사연이다. 케빈은 올리브의 제자였다. 케빈의 어머니는 자살을 했다. 올리브의 아버지 또한 유서 쪽지 한 장 없이 불시에 자살로 생을 마감했기에, 둘은 서로의 상처를 이야기하다가 깊은 우울감이 사람을 죽게 한다는 것에 공감한다. 그러다 물어 빠져 죽으려하는 패티라는 여인을 구하는 이야기이다.

<피아노 연주자>는 앤젤라의 이야기. 앤젤라는 마을의 한 음식점에서 피아노 연주자로 살아가는 여인이다. 그녀의 어머니는 몸을 파는 여자였고 심지어는 앤젤라와 애인과 삼각관계를 이루기까지 한다. 깊은 슬픔과 우울로 살아가는 앤젤라는 중년의 나이가 되었지만 결혼하지 못한 채, 마을의 행정의원 맬컴 무디와 불륜 관계다.

<작은 기쁨>은 헨리와 올리브의 아들, 크리스토퍼의 결혼식 에피소드다. 도시 여자 수잔과 만난 지 6주만에 결혼하는 아들을 올리브는 걱정과 두려움으로 바라본다. 아무래도 올리브는 며느리가 될 수잔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 우연하게 수잔을 통해 아들 크리스토퍼가 엄마인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듣게 된다.

"그이는 힘든 시간을 겪였어"

이 말을 들은 올리브는 기분이 몹시 상해, 몰래 며느리의 스웨터를 망가뜨리고 신발 한 짝을 훔쳐서 버려버린다. 아주 소심한 화풀이를 실행에 옮긴다.

<굶주림>은 하먼과 보니의 부부 이야기가 주를 이룬다. 하먼은 철물점을 운영하는, 가정이 제일인 남자이고, 보니는 다소 건조한 사람이다. 이 둘의 화두는 오직 도넛, 이 둘을 연결하는 유일한 매개체가 도넛이다. 중년을 훌쩍 넘긴 부부에게 문제가 생긴다. 빈둥지 증후군. 보니는 더이상 남편과 부부관계를 맺고 싶지 않다. 하지만 하먼은 준비되지 않았다. 자식들로 출가하고 아무런 연결고리가 없는 부부는 위기다. 결국 하먼은 같은 마을 사람 데이지에게 그 사랑의 마음을 옮기고 불륜관계가 된다. 아내가 이 불륜을 알아차리기를 바라면서.

<다른 길>은 화장실 인질사건이다. 병원에 간 올리브와 헨리는 공교롭게도 병원 화장실에서 총을 든 한 소년에게 인질로 잡히게 되었다. 위험에서 서로를 보호하려다가 듣고 싶지 않은 말을 각각 상대로부터 듣게 된다. 올리브는 헨리의 어머니(시어머니)를 경건에 매몰된 위선자라고 생각했고, 헨리는 아들 크리스토퍼(크리스)가 그들을 떠난 것은 올리브의 지나친 통제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서로의 속마음을 예기치 않게 알게 된 그들은 마치 '다른 길'을 걸어가는 부부처럼, 마음의 거리를 극복하지 못하게 된다. 서로 다른 사람을 품었을 때보다 더 위기의 시기를 맞게 된 헨리와 올리브.

<겨울 음악회> 제인은 음악회에 참석해서 남편, 밥의 비밀을 우연히 알게 된다. 남편의 (과거의) 그녀가 죽을 병을 얻었다는 것, 그녀의 부탁을 외면하지 못해 그녀를 만나고 왔다는 것, 알고 싶지 않은 사실을 알게 된 제인은 맘이 상하지만, 남편을 믿고 싶다.
"서로를 빼면 그들에겐 아무것도 없기에. 그마저도 없다면 그들은 어쩐단 말인가?"(251)
이 문장이 노년을 향해 걸어가는 부부의 정직한 마음이다.

<튤립>에서는 라킨 부부 이야기가 주를 이룬다. 로저 라킨과 루이즈 라킨은 부부다. 세상 부러울 것이 없을 것 같은 이들 부부는 비극적 사실이 있다. 아들의 범죄. 살인인가보다. 올리브의 아들, 크리스는 수잔과 결혼하여 캘리포니아로 이사를 가버렸다. 올리브는 외로움의 병이 든다. 그래서 감옥 같은 루이즈의 집에 갔다. 자기 보다 더 괴로울 루이즈 집에 가면 루이즈의 불행이 자신을 위로하지 않을까 싶었지만 언감생심 위로 따윈 느낄 수 없었다. 올리브의 남편 헨리는 갑자기 뇌출혈로 쓰러지고 그예 일어나지 못하고 실명까지 하게 된다. 요양병원에 입원 중이다.

"하지만 그 여자(루이즈)가 괴로워하는 걸 보고 기분이 나아지길 바라며 루이즈 라킨을 찾아간 것은 잘못이었다.......이 이상하고 불가해한 세상에서 그녀는 자신이 대체 누구라고 생각했던 걸까?"(293)

이 문장 안에서 올리브의 불안과 외로움이 출렁거린다. 다만 그녀가 가장 정확히 알고 있는 것은 튤립을 언제 심어야 하는 지, 그 시기다. 모호함이 가득하여 불안하기만 한 세상에 던져진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은 듈립을 언제 심을 지 결정하는 일. 그녀가 정원을 가꾸는 일에 열심인 이유다.

<여행 바구니> 에드와 말린은 부부다. 에드는 투병을 하다 결국 죽게 된다. 마을에서 식료품 가게를 운영했던 이들 부부는 고등학교때부터 연인이었고, 종내는 결혼을 했다. 그러나 남편 에드의 죽음, 장례식을 치루면서 아내 말린은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된다. 에드에게 내연녀가 있었다는 사실. 마을의 케리와 내연의 관계였다는 사실을 장례식에 참석한 케리 본인에게서 듣는다. 추호도 남편을 의심하지 않았던 말린에게 이 사실은 청천벽력 같은 소식이었다. 이미 죽은 남편에게 어떠한 복수도 할 수 없는 상황. 병이 회복되면 여행을 가자고 계획하며 '여행 바구니'를 싸두었건만, 그 추억마저 분노가 되어버린 현실 앞에서 말린은 침통하다. 자신만 몰랐다는 사실에 수치심을 느끼며 케리에 대한 살의를 올리브에게 고백한다. 올리브는 말린의 그 살의를 얼마든지 공감할 수 있다. 자신이 그랬지 않은가.

<병속의 배> 애니타와 짐의 이야기. 그리고 그들의 딸, 줄리와 위니. 줄리가 브루스와 결혼을 하는 날이다. 그러나 브루스는 줄리를 떠나고 만다. 아마도 줄리의 엄마 애니타 때문일 것이다. 애니타는 진정제를 먹지 않으면 감정의 격동을 이기지 못한다. 어느 날 바다에서 죽음으로 돌아온 아버지, 그녀는 아버지와 지냈던 집을 떠나지 못한다. 스스로 자신을 그곳에 가두고 산다. 그 집은 살기에 형편없는 곳임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브루스는 지하실을 가득 채운 배를 만든다. 과연 그 배를 타고 이들 가족이 떠날 수 있는 날이 올까.

<불안> 올리브의 아들, 크리스가 재혼한다. 재혼한 아내, 앤에게는 이미 전 남편과 사이에 아이 둘이 있다. 이것부터 올리브는 마음에 들지 않는다. 크리스와의 사이에서도 아이가 태어났다. 크리스가 엄마와의 관계 회복을 위해 자신이 있는 도시, 뉴욕으로 올리브를 초청한다. 며느리가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은 차치하고 자못 설레는 마음으로 아들네 집에 가지만, 결국 3일의 평화를 뛰어넘지 못하고 아들과 심하게 다툰다. 아들을 그리도 사랑했건만, 아들은 힘들었다. 널뛰는 엄마의 감정과 그녀의 통제가.

"(크리스토퍼가) 이젠 엄마에 대한 두려움에 지배당하지 않을 거에요"
엄마에 대한 두려움? 누가 올리브를 두려워할 수 있단 말인가? 두려운 것은 바로 그녀였는데!(414)"

올리브는 심하게 다친 마음으로 아들집을 떠난다.

<범죄자> 레베카는 목사 집안의 후손이다. 외할아버지도 목사, 아버지도 목사. 그러나 그녀의 행동은 초반부처 이상하다. 대화의 경계를 모른다. 상황과 맥락에 맞게 주고 받아야 할 대화의 수위를 조절하지 못하고, 지나치게 불필요한 정보들을 수다스럽게 말한다. 이상하다. 아버지 브라운 목사와 결혼한 엄마 샬롯은 레베카를 낳자 배우가 되겠다고 집을 떠난다. 레베카는 엄마에게 버림 받는다. 아빠와 정상적인 관계가 아니다. 어린 나이에 맞지 않는 역할을 감당해야 했다. 대화가 없이 지냈다. 정서적 교류가 전혀 없는 상태에서 종교적 윤리가 강화된 분위기에서 살아간다. 그런데 묘하게도 아버지 브라운 목사와의 관계가 석연치 않다. 그저 아버지와 딸의 관계인가? 아니면? 아버지가 빨리 죽기를 바라서 레베카는 아버지의 밥상에 늘 버터가 듬뿍 넣은 요리를 한다. 아버지는 결국 심장병으로 죽는다.

<강> 올리브에게 새로운 인연이 생긴다. 잭 케니슨과의 만남. 남편 헨리는 아직 요양 병원에 입원 중이다. 뇌손상으로 실명까지 한 헨리, 남편이 다시 일어설 가망은 없다. 올리브는 헨리에게 매일 병문안을 갔지만 헨리는 요양병원에서 죽고 만다. 잭의 딸은 레즈비언, 그는 딸을 받아들일 수 없다. 외롭게 살아가는 그가 산책을 하다 쓰러지고 그 현장을 올리브가 발견한다. 올리브가 도움을 구하러 자리를 떠나려 하자 잭이 붙잡는다.

"그러지 말아요. 날 혼자 두지 말아요"(454)
"죽어도 상관하지 않는다구요. 그냥 날 여기 버려두지만 말아요"(455)

죽음보다 두려운 것이 외로움이었다.

올리브는 새로운 사랑을 향한다.

"젊은 사람들은 모르지, 이 남자의 곁에 누우며, 그의 손을, 팔을 어깨에 느끼며 올리브는 생각했다. 오, 젊은 사람들은 정말로 모른다. 그들은 이 커다랗고 늙고 주름진 몸뚱이들이 젊고 탱탱한 그들의 몸만큼이나 사랑을 갈구한다는 것을,.................사랑이 눈 앞에 있다면 당신은 선택하거나, 하지 않거나 둘 중 하나다. 그녀의 타르트 접시는 헨리의 선량함으로 가득했고 그것이 부담스러워 올리브가 가끔 부스러기를 털어냈다면, 그건 그녀가 알아야 할 사실을 알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알지 못하는 새 하루하루를 낭비했다는 것을"(483)

2. 예사롭지 않은 찌질한 이야기들,,

열 세편의 장편을 올리브 키터리지라는 키로 꿰어서 한 편의 소설을 만들었다. 언급한대로 이 소설에서는 하나같이 제대로 된 인물들이 없다. 불륜, 비행, 폭력, 다툼과 학대, 이상행동 등. 작가는 실제로 뉴욕에서 20년 이상을 살았지만 이 소설의 공간적 배경이자 작가의 고향인 메인주가 자기 작품의 근원이라고 했다. 이 소설을 읽자하면 작가의 고향이기도 한 메인주의 크로스비라는 마을이 어떤 곳이기에 이리도 하나같이 찌질하고 성한 사람이 없는가, 라는 의구심이 든다. 그곳에서 일어나는 일상은 내가 살고 있는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상과 다소 판이하다. 나는 섭식장애로 음식 거부를 하는 청소년, 그러다 결국에는 심장 쇼크로 죽음을 맞이한 청소년, 총을 들고 강도질을 하는 청소년, 딸의 장래는 고사하고 딸의 애인을 빼앗으려는 몸을 파는 엄마, 살인죄를 저지른 아들을 둔 엄마, 불륜을 저지르는 남편이나 아내, 정확하지는 않지만 목사 아버지로부터 성폭력을 당했음직한 사연 등, 이런 기막힌 일들을 경험하지 못했다. 그럼에도 이 소설 전체는 이런 이야기로 즐비하다.

그러나 작가, 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는 이런 일들을 마치 일상의 문체처럼 기술한다. 그녀의 기술에는 인물들을 향한 어떠한 윤리적 판단도 내포되어 있지 않다. 다만 그들이 그럴 법한 개연성을 곳곳에 배치하고, 독자가 최대한 소설의 인물들에게 골몰하게 한다. 그들이 당한 일, 겪었던 일이 무엇인지, 그들에게 찾아온 공허, 외로움, 좌절, 낭패, 어쩔 수 없음에 대하여 추측하다 보면 어느새 독자마저도 그들에 대한 윤리적 판단보다도 연민으로 일렁이는 감정의 파도를 겪게 된다. 특히 <범죄자>에서 인물을 향한 작가의 배려가 절정에 달했다고 느꼈다. 레베카가 구체적으로 어떤 일을 겪었는지는 알 수 없다. 엄마가 그녀를 버리고 가출했다는 것, 엄마가 가출하자 마자, 목사 아버지의 마누라 같은 역할을 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 등이 레베카의 이상 행동의 배경으로 묘사되면서 레베카를 매우 세밀하게 따라간다. 작가가 레베카와 같은 경험을 하지는 않았으리라. 경험하지 않는 세계를 그 인물의 입장에서 그려간다는 것은 애정이 없이 가능하지 않다. 작가가 그려준 시선 때문에 나 또한 외연이 보여주는 편견을 거두고 인물 그 자체에 집중하게 된다. 윤리적 판단에서 물러서게 된다. 매우 평면적인 시선에서 떨어져 입체적인 시선, 작가에게서 이런 시선을 배우는 되는 것이다.

3. 올리브

<올리브 키터리지>를 한 번 읽었을 때는, 올리브에게 정이 가지 않았다.매우 평면적인 읽기 때문이었다. 며느리가 맘에 들지 않는다고 해꼬지 하는 거며, 나의 불행의 위안을 삼고자 타인의 불행을 이용하는 행동, 매사 거칠고 배려가 없는 말의 본새 등이 맘에 들지 않았다. 무엇보다 그녀가 세상을 바라보는 시야가 맘에 들지 않았다. 세상은 휘황찬란한 불꽃놀이가 아니기에 친절이 필요하다. 화가 르느와르가 세상이 고통으로 가득 차 있기 때문에 즐거운 것, 밝은 것에 집착하며 그것들을 그려냈던 것처럼 말이다. 어두움을 외면하라는 것이 아니다. 삶을 축제로 보느냐, 싸움으로 보느냐, 이 둘 중에서 하나를 고르라고 한다면 나는 축제의 눈으로 세상을 보고 싶다. 고통스럽지만 축제. 천상병 시인처럼 아름다운 소풍이라고, 그런 시선으로 살아가고 싶다.

하지만 올리브의 눈에는 온통 싸워야 할 것들이다. 올리브에게 세상은 너무나 모호했다. 언제 어떤 일이 일어날 지 모르는 휴화산 같았다. 이것은 불현듯 총으로 자살을 한 아버지를 둔 트라우마가 크게 작용한 것일 게다. 그녀는 매사에 불안했다. 알지 못한다는 것이 가져다 주는 두려움. 그리고 진실이란 것에 대한 의심.

"울음은 올리브의 감정과 거리가 멀었다. 접이식 의자에 앉아있던 그녀의 감정은 두려움이었다.......그리고 신부(수잔)가 크리스토퍼를 바라보며 정말 그를 안다는 듯이 방긋 웃을 때도 두려움을 느꼈다"(122)

아들의 결혼식에서 며느리 수잔의 거침없는 태도에서 올리브는 일종의 두려움을 느낀다. '네가 내 아들을 정말로 알고 있느냐? 무엇으로 안다는 것이냐? 이렇게 알지 못하고서도는 너는 어떤 이유로 이 결혼이 행복할 것이라 확신하는 것이냐', 두려움은 바로 이 속내를 대변하는 감정일 것이다. 현재의 진심을 믿지 않는 올리브. 앎이 전제되지 않는 진심에는 의심의 구름이 가득한 올리브. 그래서 그녀는 친절하지 않다. 세상이 자신을 향하여 친절하지 않은데 자신이 어떻게 세상에게 친절할 수 있겠는가. 그래서 친절한 사람이 싫다. 남편 헨리와 끝내 거리를 좁히지 못한 이유일 것이다.

불안은 올리브에게 숙명과도 같다. 불안은 통제를 발달시킨다. 긍정과 친절함은 불안이라는 갑옷에 가둬진다. 이것이 아들 크리스와도 원만한 관계를 맺지 못하게 하는 이유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작가는 갑옷 속에 감춘 올리브의 진심을 간간히 꺼내준다. <밀물>에서 케빈과 자살에 관한 부모 이야기를 하면서, 케빈과 함께 물에 빠지려는 패티를 구하면서 올리브의 내면의 마음이 흘러 나온다. <여행 바구니>에서 절망과 수치심에 허덕이는 말린의 절규를 깊은 동조를 한다.

올리브가 입체적으로 보이기 시작했다. 작가의 역할 때문이다. 만약 내가 소설이 아닌 현실에서 올리브를 만났더라면 나는 올리브와 친해지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작가의 시선을 따라가면서 만난 올리브는 가슴으로부터 깊은 연민과 애정을 갖게 했다. 남편보다 짐 오케이시에게 마음을 줄 수밖에 없었던 것은 짐에게서 자신을 보았기 때문일 것이다. 헨리가 가닿지 못한 올리브의 마음, 그걸 읽는다. 아들이 이해하지 못한 올리브의 마음에 이르러 본다. 시기와 질투에 매몰된 데 스며있는 깊은 외로움과 불안을 읽는다. 어쩔 수 없이 받아들여야 하는 노년의 슬픔과 고독을 올리브와 함께 경험한다. 늙고 쳐진 피부에도 따뜻한 접촉이 필요하다는 것을 올리브를 통해서 인식한다.

4. 그래도 살아감에 관하여,,

소설 전체에서 구원의 이야기는 없다. 모두 고통스런 상황에 처해 있지만 그들에게 알맞은 정답이나 해결은 없다. 희망이랄 것, 쓸 데라는 것이 묘연하다. 그렇다고 해서 그들의 인생은 불필요한 것인가. 어떤 기준으로 필요와 불필요를 나눌 것인가.

살아감이 중요하다. 생의 파도가 밀려올 때 그 파도를 타기도, 고꾸라지기도, 엎어지기도, 빠지기도 하면서, 생을 존중하는 것. 사랑하는 것 말이다.

"그녀(올리브)는 눈을 감았다. 지친 그녀는 파도를 느꼈다. 감사의, 그리고 회한의 파도를, 그리고 머릿속에 그려보았다. 햇살 좋은 이방을, 햇살이 어루만진 벽을, 바깥의 베이베리를. 그것이 그녀를 힘들게 했다. 세상이. 그러나 올리브는 아직 세상을 등지고 싶지 않았다"(4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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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리브 키터리지
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 지음, 권상미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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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열세편의 단편 묶음

<올리브 키터리지>는 미국 잉글랜드 메인주의 바닷가 마을, 크로스비에서 살아가는 올리브 키터리지와 주변 사람들의 이야기이다. 총 13편의 단편소설을 구슬 삼아 올리브라는 실에 꿰어놓은 작품이다.

소설은 <약국>이라는 제목의 단편에서 시작한다. 중년의 올리브와 그녀의 남편 헨리 키터리지의 이야기이다. 그다지 새로운 것도, 특별한 것도 없는 부부의 이야기가 여상스럽다. 누구에게나 친절한 헨리와 친절을 경시(?)하는 올리브는 얼핏 보면 피차 상극이다. 매사 부딪힌다. 게다가 올리브와 헨리는 마음 속에 각각의 다른 사랑 하나씩을 비밀스럽게 품고 살아간다. 헨리는 약국의 일을 도와주었던 데니즈, 올리브는 나무에 차를 박아 교통사고로 죽은 짐 오케이시를 품고 살아갔다.

<밀물>은 케빈 코울슨과 올리브의 사연이다. 케빈은 올리브의 제자였다. 케빈의 어머니는 자살을 했다. 올리브의 아버지 또한 유서 쪽지 한 장 없이 불시에 자살로 생을 마감했기에, 둘은 서로의 상처를 이야기하다가 깊은 우울감이 사람을 죽게 한다는 것에 공감한다. 그러다 물어 빠져 죽으려하는 패티라는 여인을 구하는 이야기이다.

<피아노 연주자>는 앤젤라의 이야기. 앤젤라는 마을의 한 음식점에서 피아노 연주자로 살아가는 여인이다. 그녀의 어머니는 몸을 파는 여자였고 심지어는 앤젤라와 애인과 삼각관계를 이루기까지 한다. 깊은 슬픔과 우울로 살아가는 앤젤라는 중년의 나이가 되었지만 결혼하지 못한 채, 마을의 행정의원 맬컴 무디와 불륜 관계다.

<작은 기쁨>은 헨리와 올리브의 아들, 크리스토퍼의 결혼식 에피소드다. 도시 여자 수잔과 만난 지 6주만에 결혼하는 아들을 올리브는 걱정과 두려움으로 바라본다. 아무래도 올리브는 며느리가 될 수잔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 우연하게 수잔을 통해 아들 크리스토퍼가 엄마인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듣게 된다.

"그이는 힘든 시간을 겪였어"

이 말을 들은 올리브는 기분이 몹시 상해, 몰래 며느리의 스웨터를 망가뜨리고 신발 한 짝을 훔쳐서 버려버린다. 아주 소심한 화풀이를 실행에 옮긴다.

<굶주림>은 하먼과 보니의 부부 이야기가 주를 이룬다. 하먼은 철물점을 운영하는, 가정이 제일인 남자이고, 보니는 다소 건조한 사람이다. 이 둘의 화두는 오직 도넛, 이 둘을 연결하는 유일한 매개체가 도넛이다. 중년을 훌쩍 넘긴 부부에게 문제가 생긴다. 빈둥지 증후군. 보니는 더이상 남편과 부부관계를 맺고 싶지 않다. 하지만 하먼은 준비되지 않았다. 자식들로 출가하고 아무런 연결고리가 없는 부부는 위기다. 결국 하먼은 같은 마을 사람 데이지에게 그 사랑의 마음을 옮기고 불륜관계가 된다. 아내가 이 불륜을 알아차리기를 바라면서.

<다른 길>은 화장실 인질사건이다. 병원에 간 올리브와 헨리는 공교롭게도 병원 화장실에서 총을 든 한 소년에게 인질로 잡히게 되었다. 위험에서 서로를 보호하려다가 듣고 싶지 않은 말을 각각 상대로부터 듣게 된다. 올리브는 헨리의 어머니(시어머니)를 경건에 매몰된 위선자라고 생각했고, 헨리는 아들 크리스토퍼(크리스)가 그들을 떠난 것은 올리브의 지나친 통제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서로의 속마음을 예기치 않게 알게 된 그들은 마치 '다른 길'을 걸어가는 부부처럼, 마음의 거리를 극복하지 못하게 된다. 서로 다른 사람을 품었을 때보다 더 위기의 시기를 맞게 된 헨리와 올리브.

<겨울 음악회> 제인은 음악회에 참석해서 남편, 밥의 비밀을 우연히 알게 된다. 남편의 (과거의) 그녀가 죽을 병을 얻었다는 것, 그녀의 부탁을 외면하지 못해 그녀를 만나고 왔다는 것, 알고 싶지 않은 사실을 알게 된 제인은 맘이 상하지만, 남편을 믿고 싶다.
"서로를 빼면 그들에겐 아무것도 없기에. 그마저도 없다면 그들은 어쩐단 말인가?"(251)
이 문장이 노년을 향해 걸어가는 부부의 정직한 마음이다.

<튤립>에서는 라킨 부부 이야기가 주를 이룬다. 로저 라킨과 루이즈 라킨은 부부다. 세상 부러울 것이 없을 것 같은 이들 부부는 비극적 사실이 있다. 아들의 범죄. 살인인가보다. 올리브의 아들, 크리스는 수잔과 결혼하여 캘리포니아로 이사를 가버렸다. 올리브는 외로움의 병이 든다. 그래서 감옥 같은 루이즈의 집에 갔다. 자기 보다 더 괴로울 루이즈 집에 가면 루이즈의 불행이 자신을 위로하지 않을까 싶었지만 언감생심 위로 따윈 느낄 수 없었다. 올리브의 남편 헨리는 갑자기 뇌출혈로 쓰러지고 그예 일어나지 못하고 실명까지 하게 된다. 요양병원에 입원 중이다.

"하지만 그 여자(루이즈)가 괴로워하는 걸 보고 기분이 나아지길 바라며 루이즈 라킨을 찾아간 것은 잘못이었다.......이 이상하고 불가해한 세상에서 그녀는 자신이 대체 누구라고 생각했던 걸까?"(293)

이 문장 안에서 올리브의 불안과 외로움이 출렁거린다. 다만 그녀가 가장 정확히 알고 있는 것은 튤립을 언제 심어야 하는 지, 그 시기다. 모호함이 가득하여 불안하기만 한 세상에 던져진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은 듈립을 언제 심을 지 결정하는 일. 그녀가 정원을 가꾸는 일에 열심인 이유다.

<여행 바구니> 에드와 말린은 부부다. 에드는 투병을 하다 결국 죽게 된다. 마을에서 식료품 가게를 운영했던 이들 부부는 고등학교때부터 연인이었고, 종내는 결혼을 했다. 그러나 남편 에드의 죽음, 장례식을 치루면서 아내 말린은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된다. 에드에게 내연녀가 있었다는 사실. 마을의 케리와 내연의 관계였다는 사실을 장례식에 참석한 케리 본인에게서 듣는다. 추호도 남편을 의심하지 않았던 말린에게 이 사실은 청천벽력 같은 소식이었다. 이미 죽은 남편에게 어떠한 복수도 할 수 없는 상황. 병이 회복되면 여행을 가자고 계획하며 '여행 바구니'를 싸두었건만, 그 추억마저 분노가 되어버린 현실 앞에서 말린은 침통하다. 자신만 몰랐다는 사실에 수치심을 느끼며 케리에 대한 살의를 올리브에게 고백한다. 올리브는 말린의 그 살의를 얼마든지 공감할 수 있다. 자신이 그랬지 않은가.

<병속의 배> 애니타와 짐의 이야기. 그리고 그들의 딸, 줄리와 위니. 줄리가 브루스와 결혼을 하는 날이다. 그러나 브루스는 줄리를 떠나고 만다. 아마도 줄리의 엄마 애니타 때문일 것이다. 애니타는 진정제를 먹지 않으면 감정의 격동을 이기지 못한다. 어느 날 바다에서 죽음으로 돌아온 아버지, 그녀는 아버지와 지냈던 집을 떠나지 못한다. 스스로 자신을 그곳에 가두고 산다. 그 집은 살기에 형편없는 곳임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브루스는 지하실을 가득 채운 배를 만든다. 과연 그 배를 타고 이들 가족이 떠날 수 있는 날이 올까.

<불안> 올리브의 아들, 크리스가 재혼한다. 재혼한 아내, 앤에게는 이미 전 남편과 사이에 아이 둘이 있다. 이것부터 올리브는 마음에 들지 않는다. 크리스와의 사이에서도 아이가 태어났다. 크리스가 엄마와의 관계 회복을 위해 자신이 있는 도시, 뉴욕으로 올리브를 초청한다. 며느리가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은 차치하고 자못 설레는 마음으로 아들네 집에 가지만, 결국 3일의 평화를 뛰어넘지 못하고 아들과 심하게 다툰다. 아들을 그리도 사랑했건만, 아들은 힘들었다. 널뛰는 엄마의 감정과 그녀의 통제가.

"(크리스토퍼가) 이젠 엄마에 대한 두려움에 지배당하지 않을 거에요"
엄마에 대한 두려움? 누가 올리브를 두려워할 수 있단 말인가? 두려운 것은 바로 그녀였는데!(414)"

올리브는 심하게 다친 마음으로 아들집을 떠난다.

<범죄자> 레베카는 목사 집안의 후손이다. 외할아버지도 목사, 아버지도 목사. 그러나 그녀의 행동은 초반부처 이상하다. 대화의 경계를 모른다. 상황과 맥락에 맞게 주고 받아야 할 대화의 수위를 조절하지 못하고, 지나치게 불필요한 정보들을 수다스럽게 말한다. 이상하다. 아버지 브라운 목사와 결혼한 엄마 샬롯은 레베카를 낳자 배우가 되겠다고 집을 떠난다. 레베카는 엄마에게 버림 받는다. 아빠와 정상적인 관계가 아니다. 어린 나이에 맞지 않는 역할을 감당해야 했다. 대화가 없이 지냈다. 정서적 교류가 전혀 없는 상태에서 종교적 윤리가 강화된 분위기에서 살아간다. 그런데 묘하게도 아버지 브라운 목사와의 관계가 석연치 않다. 그저 아버지와 딸의 관계인가? 아니면? 아버지가 빨리 죽기를 바라서 레베카는 아버지의 밥상에 늘 버터가 듬뿍 넣은 요리를 한다. 아버지는 결국 심장병으로 죽는다.

<강> 올리브에게 새로운 인연이 생긴다. 잭 케니슨과의 만남. 남편 헨리는 아직 요양 병원에 입원 중이다. 뇌손상으로 실명까지 한 헨리, 남편이 다시 일어설 가망은 없다. 올리브는 헨리에게 매일 병문안을 갔지만 헨리는 요양병원에서 죽고 만다. 잭의 딸은 레즈비언, 그는 딸을 받아들일 수 없다. 외롭게 살아가는 그가 산책을 하다 쓰러지고 그 현장을 올리브가 발견한다. 올리브가 도움을 구하러 자리를 떠나려 하자 잭이 붙잡는다.

"그러지 말아요. 날 혼자 두지 말아요"(454)
"죽어도 상관하지 않는다구요. 그냥 날 여기 버려두지만 말아요"(455)

죽음보다 두려운 것이 외로움이었다.

올리브는 새로운 사랑을 향한다.

"젊은 사람들은 모르지, 이 남자의 곁에 누우며, 그의 손을, 팔을 어깨에 느끼며 올리브는 생각했다. 오, 젊은 사람들은 정말로 모른다. 그들은 이 커다랗고 늙고 주름진 몸뚱이들이 젊고 탱탱한 그들의 몸만큼이나 사랑을 갈구한다는 것을,.................사랑이 눈 앞에 있다면 당신은 선택하거나, 하지 않거나 둘 중 하나다. 그녀의 타르트 접시는 헨리의 선량함으로 가득했고 그것이 부담스러워 올리브가 가끔 부스러기를 털어냈다면, 그건 그녀가 알아야 할 사실을 알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알지 못하는 새 하루하루를 낭비했다는 것을"(483)

2. 예사롭지 않은 찌질한 이야기들,,

열 세편의 장편을 올리브 키터리지라는 키로 꿰어서 한 편의 소설을 만들었다. 언급한대로 이 소설에서는 하나같이 제대로 된 인물들이 없다. 불륜, 비행, 폭력, 다툼과 학대, 이상행동 등. 작가는 실제로 뉴욕에서 20년 이상을 살았지만 이 소설의 공간적 배경이자 작가의 고향인 메인주가 자기 작품의 근원이라고 했다. 이 소설을 읽자하면 작가의 고향이기도 한 메인주의 크로스비라는 마을이 어떤 곳이기에 이리도 하나같이 찌질하고 성한 사람이 없는가, 라는 의구심이 든다. 그곳에서 일어나는 일상은 내가 살고 있는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상과 다소 판이하다. 나는 섭식장애로 음식 거부를 하는 청소년, 그러다 결국에는 심장 쇼크로 죽음을 맞이한 청소년, 총을 들고 강도질을 하는 청소년, 딸의 장래는 고사하고 딸의 애인을 빼앗으려는 몸을 파는 엄마, 살인죄를 저지른 아들을 둔 엄마, 불륜을 저지르는 남편이나 아내, 정확하지는 않지만 목사 아버지로부터 성폭력을 당했음직한 사연 등, 이런 기막힌 일들을 경험하지 못했다. 그럼에도 이 소설 전체는 이런 이야기로 즐비하다.

그러나 작가, 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는 이런 일들을 마치 일상의 문체처럼 기술한다. 그녀의 기술에는 인물들을 향한 어떠한 윤리적 판단도 내포되어 있지 않다. 다만 그들이 그럴 법한 개연성을 곳곳에 배치하고, 독자가 최대한 소설의 인물들에게 골몰하게 한다. 그들이 당한 일, 겪었던 일이 무엇인지, 그들에게 찾아온 공허, 외로움, 좌절, 낭패, 어쩔 수 없음에 대하여 추측하다 보면 어느새 독자마저도 그들에 대한 윤리적 판단보다도 연민으로 일렁이는 감정의 파도를 겪게 된다. 특히 <범죄자>에서 인물을 향한 작가의 배려가 절정에 달했다고 느꼈다. 레베카가 구체적으로 어떤 일을 겪었는지는 알 수 없다. 엄마가 그녀를 버리고 가출했다는 것, 엄마가 가출하자 마자, 목사 아버지의 마누라 같은 역할을 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 등이 레베카의 이상 행동의 배경으로 묘사되면서 레베카를 매우 세밀하게 따라간다. 작가가 레베카와 같은 경험을 하지는 않았으리라. 경험하지 않는 세계를 그 인물의 입장에서 그려간다는 것은 애정이 없이 가능하지 않다. 작가가 그려준 시선 때문에 나 또한 외연이 보여주는 편견을 거두고 인물 그 자체에 집중하게 된다. 윤리적 판단에서 물러서게 된다. 매우 평면적인 시선에서 떨어져 입체적인 시선, 작가에게서 이런 시선을 배우는 되는 것이다.

3. 올리브

<올리브 키터리지>를 한 번 읽었을 때는, 올리브에게 정이 가지 않았다.매우 평면적인 읽기 때문이었다. 며느리가 맘에 들지 않는다고 해꼬지 하는 거며, 나의 불행의 위안을 삼고자 타인의 불행을 이용하는 행동, 매사 거칠고 배려가 없는 말의 본새 등이 맘에 들지 않았다. 무엇보다 그녀가 세상을 바라보는 시야가 맘에 들지 않았다. 세상은 휘황찬란한 불꽃놀이가 아니기에 친절이 필요하다. 화가 르느와르가 세상이 고통으로 가득 차 있기 때문에 즐거운 것, 밝은 것에 집착하며 그것들을 그려냈던 것처럼 말이다. 어두움을 외면하라는 것이 아니다. 삶을 축제로 보느냐, 싸움으로 보느냐, 이 둘 중에서 하나를 고르라고 한다면 나는 축제의 눈으로 세상을 보고 싶다. 고통스럽지만 축제. 천상병 시인처럼 아름다운 소풍이라고, 그런 시선으로 살아가고 싶다.

하지만 올리브의 눈에는 온통 싸워야 할 것들이다. 올리브에게 세상은 너무나 모호했다. 언제 어떤 일이 일어날 지 모르는 휴화산 같았다. 이것은 불현듯 총으로 자살을 한 아버지를 둔 트라우마가 크게 작용한 것일 게다. 그녀는 매사에 불안했다. 알지 못한다는 것이 가져다 주는 두려움. 그리고 진실이란 것에 대한 의심.

"울음은 올리브의 감정과 거리가 멀었다. 접이식 의자에 앉아있던 그녀의 감정은 두려움이었다.......그리고 신부(수잔)가 크리스토퍼를 바라보며 정말 그를 안다는 듯이 방긋 웃을 때도 두려움을 느꼈다"(122)

아들의 결혼식에서 며느리 수잔의 거침없는 태도에서 올리브는 일종의 두려움을 느낀다. '네가 내 아들을 정말로 알고 있느냐? 무엇으로 안다는 것이냐? 이렇게 알지 못하고서도는 너는 어떤 이유로 이 결혼이 행복할 것이라 확신하는 것이냐', 두려움은 바로 이 속내를 대변하는 감정일 것이다. 현재의 진심을 믿지 않는 올리브. 앎이 전제되지 않는 진심에는 의심의 구름이 가득한 올리브. 그래서 그녀는 친절하지 않다. 세상이 자신을 향하여 친절하지 않은데 자신이 어떻게 세상에게 친절할 수 있겠는가. 그래서 친절한 사람이 싫다. 남편 헨리와 끝내 거리를 좁히지 못한 이유일 것이다.

불안은 올리브에게 숙명과도 같다. 불안은 통제를 발달시킨다. 긍정과 친절함은 불안이라는 갑옷에 가둬진다. 이것이 아들 크리스와도 원만한 관계를 맺지 못하게 하는 이유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작가는 갑옷 속에 감춘 올리브의 진심을 간간히 꺼내준다. <밀물>에서 케빈과 자살에 관한 부모 이야기를 하면서, 케빈과 함께 물에 빠지려는 패티를 구하면서 올리브의 내면의 마음이 흘러 나온다. <여행 바구니>에서 절망과 수치심에 허덕이는 말린의 절규를 깊은 동조를 한다.

올리브가 입체적으로 보이기 시작했다. 작가의 역할 때문이다. 만약 내가 소설이 아닌 현실에서 올리브를 만났더라면 나는 올리브와 친해지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작가의 시선을 따라가면서 만난 올리브는 가슴으로부터 깊은 연민과 애정을 갖게 했다. 남편보다 짐 오케이시에게 마음을 줄 수밖에 없었던 것은 짐에게서 자신을 보았기 때문일 것이다. 헨리가 가닿지 못한 올리브의 마음, 그걸 읽는다. 아들이 이해하지 못한 올리브의 마음에 이르러 본다. 시기와 질투에 매몰된 데 스며있는 깊은 외로움과 불안을 읽는다. 어쩔 수 없이 받아들여야 하는 노년의 슬픔과 고독을 올리브와 함께 경험한다. 늙고 쳐진 피부에도 따뜻한 접촉이 필요하다는 것을 올리브를 통해서 인식한다.

4. 그래도 살아감에 관하여,,

소설 전체에서 구원의 이야기는 없다. 모두 고통스런 상황에 처해 있지만 그들에게 알맞은 정답이나 해결은 없다. 희망이랄 것, 쓸 데라는 것이 묘연하다. 그렇다고 해서 그들의 인생은 불필요한 것인가. 어떤 기준으로 필요와 불필요를 나눌 것인가.

살아감이 중요하다. 생의 파도가 밀려올 때 그 파도를 타기도, 고꾸라지기도, 엎어지기도, 빠지기도 하면서, 생을 존중하는 것. 사랑하는 것 말이다.

"그녀(올리브)는 눈을 감았다. 지친 그녀는 파도를 느꼈다. 감사의, 그리고 회한의 파도를, 그리고 머릿속에 그려보았다. 햇살 좋은 이방을, 햇살이 어루만진 벽을, 바깥의 베이베리를. 그것이 그녀를 힘들게 했다. 세상이. 그러나 올리브는 아직 세상을 등지고 싶지 않았다"(4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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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가 작다고 사랑이 작진 않아 - 차별 없는 은혜, 오름 직한 동산, 은혜의동산교회 이야기 동네 교회 이야기 시리즈 8
김종원 지음 / 세움북스 / 202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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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나지 않게 사랑하는 일에 선수, 김종원
<교회가 작다고 사랑이 작진 않아> 간증집을 읽고...
은혜동산교회의 첫 방문일이 생각난다. 예배를 위한 발걸음은 아니었고, 교회가 운영하는 <어,울림 도서관>에서 "도스토옙스키와 저녁을"이란 슬로건을 내건 독서모임에 참여하기 위한 발걸음이었다. 막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이란 책을 완독했고, 그 책의 여운이 가시지 않을 때쯤, 도스토예프스키 전작을 읽는 모임이라고 하니 눈이 동그래져서 꼭 가보고 싶었다. 작년 12월, 교회가 운영하는 도서관에서 만난 김종원목사님은 목사님 치고는 외모가 출중하셨다. 그러나 출중한 외모와는 달리, 매우 일상적인 인상을 받았다. 그러니까 처음 만났음에도 불구하고 거리가 느껴지지 않았다는 말이다.
머리털 나고 한 번도 가보지 않은 대전을, 도스토옙스키 때문에 방문하게 된 셈인데, 그곳에서 김종원 목사님을 만나게 된 것이다. 성심당을 제외하면 볼 것 없기로 유명한 대전(대전시민님들 죄송), 내 평생 갈 일이 있을까 싶은 그곳을 갔으니, 아무래도 내가 대전에 첫 발을 들여놓을 때부터 나는 김종원 목사님의 <교회가 작다고 사랑이 작진 않아>라는 동네교회시리즈 책을 읽을 운명(섭리)였나 보다. 그 만남 이후로 나는 목사님의 간증집이 출간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교회를 개척한 이야기, 그것도 코로나를 거친 이야기, 모두 아픈 사연과 상처를 갖고 찾아온 사람들의 이야기. 그리고 이 모든 이야기들 속에서 사람과 사람이 어떻게 만나고 관계를 맺어가는지, 도저히 일어설 수 없을 것만 같은 상황에서 어떻게 조금씩 회복되어 가는지의 이야기가 그저 일상의 에피소드처럼 기록되어 있다. 그러니까 힘을 뺀 이야기란 말이다. 다만 강조할래서 강조되는 것이 아니라 자연스레 사람들 만난 이야기가 서술되어 있다.
심한 사춘기를 겪으며 방황하는 청소년(춘기, 가명이겠지?)에게 "나랑 1박2일 부산 여행 갈래?', 금요일마다 금요특별철야예배 가는 심정으로 당구장에서 춘기를 만난 이야기, 빚더미에 앉아 미래가 막막한 자매의 이야기를 수없이 듣다가, 제주도 여행을 가자고 제안하는 일, 막막하니 생각나는 건 담배뿐인 이에게, 그의 담배 연기와 함께 만남을 가진 이야기, 호프집에서 술 잔에 술을 따르며 만난 이야기, 이렇게 만남을 이어가다가 마음의 허물이 벗겨지고, 마음과 마음이 만나 한 분씩 한 분씩 공동체의 식구가 되어가는 이야기, 결국엔 그분들 한 분 한 분이 공동체가 되어 아픔을 나누며 그 아픔이 삶을 갉아먹을만큼 중한 것이 아님을 알아가고, 'The Scar is a Star'가 되어가는 일들이 <교회가 작다고 사랑이 작진 않아>에 꽉 차게 담겨 있다.
그러나 짧게 기술된 이야기들 속에는 도리어 '기~인' 여정이 있었음을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다. 한 번 듣고 두 번 들어서, 한 번 만나고 두 번 만나서 마음과 마음이 만날 수 있는 일이라면, 사람 사랑하는 일, 사람 세우는 일을 뉘라서 어렵다고 할 것인가. 좋은 말도 숱하게 들으며 듣기 싫어진다는데, 아프고 괴롭고 막막하고 캄캄한 이야기를 듣고, 아파하고, 기도하고 변화를 기대하는 일이 어찌 만만한 일이었을까. 게다가 공황장애를 경험한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은 아니지 싶다. 그러나 그래서 이 모든 일의 배후에는 결국 하나님의 사랑이 도사리고 있다는 걸 알아차리게 된다.
나는 김종원목사님이 벽이 없이 가까운 거리에서 사람들을 만날 수 있었던 이유가 다음과 같은 고백에서 시작된다고 생각한다.
"엄마 배 속에서부터 교회와 나는 분리할 수 없는 하나였고, 한 몸이었다. 누구보다 교회를 잘 알고 있다고 자부했었다. 열정과 패기 넘치는 서른 살에 담임 목사가 되었으니 열심으로는 누구에게도 뒤처지지 않았다. 그런데 그 열심이라는 것이 어릴 때부터 경험한 교회의 문화를 답습하는 열심이었다"(54p)
선교지에서의 이같은 깨달음은 저자에게 교회에 관하여 새로운 시야와 도전을 갖게 하는 시금석이 되었을 것이다. 이런 정직한 자기 직면과 성찰이 지금의 저자를 있게 한 초석이 되었을 것이고, 공황장애라는 자기 한계와 아픔이 타인의 아픔을 이해하고 공감하는 일에 도왔을 것이다. 나는 이 두 가지가 지금의 저자를 이루고 있는 매우 중요한 줄기라는 생각을 했다.
나는 내 인생의 얼마간을 통해서 나와 너의 다름을 깨닫고 알아갔다. 특히 결혼생활 동안에 일심동체라고 불리는 관계에서 얼마나 서로 다른지를 체험적으로 알아갔다. 다름을 이해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나와 타인을 위한 이해의 발걸음이고 같이 살아가기 위한 행보이기도 하다. 그러나 토마스 머튼은 너와 나는 다르지 않다는 걸 '깊은 영성'으로 깨달았다고 한다. 그가 어느 지점에서 우리가 서로 다르지 않다는 걸 깨달았을까. 나는 그 지점이 바로 연민이라고 생각한다. 인간에 대한 연민이 깊어질 때, 나와 너는 다르지 않다는 걸 직관적으로 알게 된다. 그리고 이 연민은 동떨어져 거룩한 곳에서가 아니라 바로 나, 그리고 바로 내 옆의 인생들의 아픔을 그 일상의 현장에서 마주할 때, 터져나오는 것. 저자가 비록 잘생겼지만, 아픔을 아는 분이라서 앞으로 은동예배당은 사람 냄새와 은혜의 냄새로 가득할 것이라고, 감히 단언해본다.
생활밀착형 <은등교 목사 사용설명서>
1. 배고프거나 커피 땡길 때 언제든 전화합니다.
2. 애들 맡기고 부부가 데이트하고 싶을 때 전화합니다.
3. 이단이 접근해 이단 옆 차기 하고 싶을 때 전화합니다.
4. 이사할 때 전화합니다.
5. 부모님이나 아이들에게 문제가 생기면 전화합니다.
6. 당구장에서 짜장면 먹고 싶을 때 전화합니다.
7. 등산 가서 정상에서 컵라면 먹고 싶을 때 전화합니다.
8. 말씀이 땡기고 예배가 고플 때 전화합니다.
9. 복음을 전하려고 이웃을 만나러 가기 전에 전화합니다.
10. 마음이 슬프거나 괴로워서 말동무가 필요할 때 전화합니다.
이 사용설명서을 읽으면서 혹시나 저자가 과로사로 큰 일이 나면 어쩌나, 싶었다. 이건 그야말로 24시간 심부름업체 대표가 할 일이 아닌가 말이다. 그러나 사실 공동체는 서로에게 영향을 받으며 함께 살아가는 곳, 이것은 어쩌면 <은동공동체 사용설명서>가 되어가고 있는 건 아닐까, 싶어서 나도 모르게 미소가 떠오른다. 은혜의 동산이여, 행복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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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 - 옴니버스 작품집 세움 문학 6
김마리아 외 지음 / 세움북스 / 202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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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내음, 먼 이름, 그림자, 하모니카, 함께. 작품집 <아버지>에 나오는 아버지를 기억, 또는 상징하는 단어들이다. 이 단어들로 그들의 아버지가 저자들 각자에게 어떤 존재였는지 가늠해볼 수 있다.
아버지 등에 업힌 저자의 모습, 가깝지 않았던 아버지의 존재, 먼 이름, 아련한 추억의 소리, 하모니카, 그리고 존재가 있는 곳엔 어디에나 드리우는 그림자. 그리고 고된 세월을 지나 '함께' 길을 걷는 존재, 아버지. 유일하게 살아계신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 다섯 편의 아버지 이야기이다.
이 키워드를 중심 삼아 나와 아버지는 어떤 이름을 붙여줄 수 있을까, 생각해보았다. 내게 가장 가까운 아버지는 <아버지의 등내음>의 아버지와 가깝다. 저자의 아버지가 그녀를 업고 산을 올랐을 때 느꼈던 아버지의 등에서 나는 냄새, 그것은 단순한 냄새가 아니라 안정이었고 행복이었을 것이다. 나이 들어 보면 작디 작은 아버지의 등이 그 때만큼은 넓디 넓은 평야처럼 풍요로웠을테니까. 정확히 그 느낌을 알 것만 같았다. 비록 저자처럼 어린 시절은 아니지만, 고등학교 때 등하교길을 아빠가 함께 해주었다. 그 때 아빠는 공직에서 퇴직을 하고 엄마와 함께 수퍼마켓을 꾸리셨는데, 오토바이로 나의 등하교길을 태워주셨다. 하루에 세번을 왔다 갔다 하는 날도 있었다. 고등학교 때 심한 비염으로 고생할 때, 점심 시간에 병원 진료까지 그 오토바이로 나를 싣고 다니는 일을 귀찮다 하지 않으셨다. <아버지의 등내음>을 읽으면서 그 때의 시간들이 떠올라, 다시 아빠의 등내음, 그 너른 아빠의 등, 엄마의 품과는 다른, 단단하면서도 바위 같이 안전했던 아빠의 등을 다시 회상할 수 있었다. 내가 결혼하고 전화드릴 때마다, 또는 친정에 갈 때마다 "내 사랑 선영이"이라고 부르던 아버지의 목소리와 함께, 아빠의 등내음은 내게도 깊은 추억이다.
<아버지의 하모니카> 하모니카 하나로 그마나 연결되어 있었던 아버지. 죽어서야 비로소 마주할 수 있었던 아버지. 설명할 수 없는 아버지의 부재가 가져다 준 절망적인 상황때문에 원망하고 미워했던 아버지가 마침내 눈 앞에 주검으로 나타났던 순간, 한 쪽 손이 잘려나간 아버지의 주검은 미움과 원망을 객관화하는 시점이 되었을 것이다. 비로서 나의 입장에서가 아닌 아버지의 입장에서 생을 조명할 수 있었던 시간, 비록 서술된 인물이 완연히 다르긴 하지만 나는 이 짧은 소설을 읽으면서 김중미 작가의 <나의 동두천>이라는 소설이 소환되었다. 살았던 동네의 분위기, 그리고 술집에 나가는 여인의 손에 잡혀서 그나마의 작은 보살핌을 누렸던 소설의 주인공을 엿보면서 동두천의 이야기가 떠올랐다.
구어진은 아버지의 장례식 앞에서 비로소 아버지를 대신한 소중한 인연들을 떠올릴 수 있었다. 아버지의 죽음이 가져다준 선물이다. 아버지의 부재를 원망하다 잊어버려던 현재의 사람들, 의미없는 인생이라 여겼던 자신의 인생마저도 다시 의미를 찾는 시간이 바로 아버지의 장례식이었다. 그래서 구어진은 아버지의 하모니카를 마침내 버릴 수 있었을 것이다.
<먼 이름>의 아버지, 아버지가 먼 이름으로 대변된다는 것 자체가 아이러니면서도 어쩌면 가장 현실적인 이름인 지도 모르겠다. 60년대를 통과한 80년대, 90년대까지도 한국의 아버지들은 자식들에게 그리 가깝지 않았던 것이 일반적이지 않았을까. <먼 이름>이란 시점은 필연코 거리를 둘 수밖에 없는데, 이런 시선이 아버지와 저자 사이를 매우 객관적으로 바라보면서, 그 거리가 주는 인사이트를 충분히 건지고 있다. 그 거리 사이에서 느꼈던 저자의 죄책감과 수치심, 그리고 가족관계, 아버지의 부재 이후에 나타난 가족들의 변화 등을 담담하게 서술해 가면서, 그 사이에서 벌어졌던 저자의 마음을 잘 견져서 독자에게 전달한다. 어쩌면 다섯 편의 작품들 중에서 가장 사적인 글이라고 해야할 것 같다. 사적인 글이지만 관계 사이에서 일어나는 역동과 변이를 가장 세밀하게 표현했다고 말하고 싶다. 그래서 아마도 이 글을 읽는 많은 분들이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보는데 도움을 얻지 않을까 싶다.
"이제야 더 뒤늦게 슬퍼하는 중이다"라는 문장을 읽을 때, 저자의 내면 깊숙히 웅크리고 있었던 문제가 비로소 해결되었다는 안심을 하게 되었다. 대학 때 사별한 아버지를 이제 슬퍼하며 떠나 보낼 수 있어서, 저자가 비로소 마땅히 그랬어야 할 '슬픔의 주인'이 될 수 있어서, 그녀에게 찾아왔을 자유로움 때문에 나도 미소지었다.
<함께 길을 걷다>는 유일하게 살아계신 아버지와 이야기다. 죽음 이후의 화해는 아무래도 아쉬움이 있다. 이 글에도 아버지의 허물이 있고 저자의 허물이 있다. 하지만 그 모든 것을 받아들이고 다시 아버지와 회복의 함께함을 걷는 일을 우리 모두가 바랄 것인데, 이 글에는 이런 아버지와의 화해와 더불어 함께 걸어가는 삶이 서술되어 있다. 특히 아버지가 군복무를 하시던 철원으로의 동행. 이 동행은 아버지와 아들, 두 존재에게 매우 큰 의미였을 것이다. 나도 언젠가는 아버지의 고향을 갈 수 있기를 바란다. 아빠가 늘상 읊조리시던 '황해도 율계면 신평리 74번지', 지금은 행정구역의 이름도 바뀌었을텐데도, 나는 어릴 적부터 아빠에게서 들은 아버지의 고향 주소를 잊지 못하고 있다. 아빠가 돌아가시더라도 통일이 된다면 반드시 아버지의 고향을 찾아보라고 했던 말씀. 언제 통일이 될 지는 모르겠지만, 언젠가는 반드시 찾아갈 수 있기를 고대한다. 그만큼 아버지의 흔적은 자식에게도 매우 중한 것, 아버지의 젊음이 새겨져 있는 곳, 그곳에 대한 상상은 나 자신을 이해하는 일에도 일조한다. 철원에서 아버지와 함께한 시간들은 영원히 잊지 못할 추억이 될 것이 분명하다.
"지금은 그냥 아버지가 살아 계신 것만으로도 감사할 뿐이다." 이 고백은 어쩌면 아버지와 아들의 이름을 벗어난 고백일 수도 있겠다. 다만 인생을 같이 걷는 동반자로서의 아버지. 존재로서의 만남, 저자에게 박수를 보내고 싶다.
<그림자로 울다>, "아버지는 평생 혼자셨다"라는 첫 문장에서부터 가슴이 철커덩 내려 앉았다. 이 한 문장으로 모든 것이 상상이 되었다. 그간 그림자 이야기를 한 두번 들었나. 수많은 간증에서 들었던 것처럼, 가정 폭력, 알코올중독, 도박 등등...이 많은 사연들이 자연스레 내 머리를 셋팅하면서 그 한 문장의 의미가 묵직하게 내려 앉았다. 그러나 저자의 그림자는 그저 부정적 의미의 그림자가 아니다. 할아버지가 한센병인이셨다는 아주 특별한 환경에서 그 어린 나이에 아버지가 버린(?) 할아버지의 보호자가 되면서부터 아버지의 그림자는 깊게 드리워진다. 그 그림자의 어둠이 너무나 깊고 깊어서 도저히 빠져나올 수 없을 것만 같은데도, 저자는 기어코 어두움의 그림자에서 빛이 만들어준 그림자로 모든 것을 승화시킨다. 물론 그 여정에서 하나님 아버지가 함께 했다는 것은 기정 사실이다.
"중학교 1학년 때는 새벽마다 기도하면서 말하지 못할 단어가 하나 있었다. '하나님 아버지'라는 말이다. '아버지'라고 하면 가슴이 아파 기도하지 못했다. 아버지라는 말은 내게 불행이었고 고통이었으며 아픔의 전부였다. 그래서 '하나님, 예수님, 주님'이라고만 했다. '하나님 아버지'라는 말은 너무 낯설고 아팠다. 아니 싫었다"(316p)
이렇게 아픔이 되었던 '아버지'가, 그 아버지의 그림자가 어둠을 벗어나 그늘을 만드는 선선한 그림자가 되기까지 저자의 생에 있었던 모든 고난과 수고와 눈물에게 찬사를 보낸다. 그리고 타인의 생을 살리는 지금의 사역에 박수를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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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울하고 불안한 그리스도인들에게 - 청교도 목회자 리처드 백스터가 주는 조언
리처드 백스터.제임스 패커.마이클 런디 지음, 최원일.감안식 옮김, 최관호 감수 / 세움북스 / 202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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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인이 되기 위해서 필연적으로 거쳐야 할 관문은 자신의 죄인됨을 인식하는 것이다. 대한민국 법에 저촉되는 일을 행하지 않았더라도, 양심에 거리끼는 일을 행동으로 옮긴 적이 없더라도 하나님의 의 앞에서 절대죄인이라는 것을 인식하고 돌이키는 일이다. 눈에 보이는 행동이 죄라서가 아니라 동기가 악할 때에도 죄인 것을 인정하는 일, 선한 행동 이면에도 자기 중심성의 또아리를 발견하는 일이 비일비재하게 발견되면서 나라는 존재의 부패성에 대해서 처절하게 느끼는 과정이 있다. 이런 죄책감은 자칫 자기 학대와 비하로 내닫기 쉬운 것이 어쩌면 신앙인들의 숙명인지도 모른다. 그래서인지 우울증은 비기독교인보다 기독교인들에게서 더 심하게 발현된다는 얘길 듣곤 했다.

나는 간혹 우울감을 느끼기는 하지만 우울증을 경험한 것 같지는 않다. 그래서 우울증을 겪는 사람들의 어려움을 깊이 공감하지는 못했고 그저 피상적인 느낌만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다가 고요의 <나는 내가 왜 사는 지 몰랐습니다>라는 책을 읽고서 우울증이 그저 마음에게만 국한되는 일이 아님을 인식하게 되었다. 우울은 단지 증상일 뿐이 아니라 병이라고 칭할 수 있는 생리적 이상 현상에 의한 것임을, 아무리 의지로 우울을 이겨보려고 해도 불가항력적인 것일 수도 있음을 알게 되었다. 다리가 부러진 사람이 의지가 있을지라도 걷을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인 것이다. 그간 교회 안에서 조언이라고 회자되었던 것들, 예를 들어 마음 먹기에 따른 문제이지 더 기도를 열심히 해라, 믿음의 의지를 더욱 사용해 보아라, 항상 기뻐라하라, 감사하라 하셨으니 이 말씀을 붙잡아 보아라 등의 섣부른 말들이 실제 우울증(또는 병)을 겪는 사람들에게 얼마나 폭력적이었을지 비로소 상상할 수 있었다.

청교도 목회자, 리차드 백스터는 도리어 이런 조언을 한다.

"개인적인 기도를 하기가 어려운 곳이라면 굳이 힘들게 기도하지 말라.....능력 밖의 모든 노력은 당신을 방해하고, 의무를 걱정거리로 만들며, 당신의 상황을 악화시켜, 당신을 무력화시킬 뿐이기 때문이다.....배 속이 불편할 때는 건강한 상태로 회복하기 위해 음식을 많이 먹어서는 안되고 잘 소화시켜야 한다. 소화가 잘되지 않을 때는 먹는 양을 줄여야 하듯이 묵상과 개인 기도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138P)"

"문맹인 사람은 성경을 읽지 않고도 구원받을 수 있고, 감옥에 있거나 병든 사람은 말씀의 선포 없이도, 혹은 성도의 교제가 없이도 구원 받을 수 있다. 같은 이치로 우울증으로 능력이 감퇴한 사람은 공식적이고 긴 시간이 필요한 기도와 홀로 하는 기도가 아닌 간단한 묵상과 짧은 기도를 통해서도 구원 받을 수 있다(139p)"라고,

그간 교회 공동체에서 너무 쉽게 회자되던 조언과는 거리가 있는 그의 지침이다.

이는 단지 기도를 줄여하라는 의식적 규율의 제한ㅇ을 말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만약 어떤 사람이 다리가 부러졌다면, 완쾌될 때까지는 걷지 말아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몸 전체가 고통을 받게 될 테니 말이다. 부러지고 상해를 입은 부분이 바로 당신의 사고 능력 혹은 상상력이다(136p)"

벡스터의 진단 중 하나는 바로 이것이다. 부러지고 상해를 입은 것을 먼저 온전케 하는 것 이전의 종교적 행위는 그다지 의미있는 것이 아니라는 뜻일 게다. 또한 이렇게도 지침하고 있다.

"몸이 치료되지 않는 한 마음의 치료는 요원하므로 아무리 명쾌하고 논리 정연한 중고라고 해도 효과는 없을 것이다(161p)"

"여기서 다시 한 번 강조하고 싶은 것은, 그 영혼의 상태가 개인의 선택과 통제를 벗어나 눈에 보이지 않는 생리적 과정에서 불가피하게 발생한 것일수록, 죄와 거리가 멀고 위험도도 낮은 상태라는 것이다(179p)"

위와 같은 언급들을 하며 실제로 약물치료를 부정적으로만 생각하지 않았다. 17세기의 청교도 목사가 우울증에 대하여 이렇듯 깊은 이해를 하고 있었다는 것이 매우 신기했다.

<영혼의 밤을 지날 때>라는 책을 읽으며,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신앙적 위인들이 얼마나 깊은 우울증으로 시달렸는가를 알게 되었다. 그들의 성과나 업적 이면에는 우울이 깊이 내재하고 있었다. 하여 어떤 이는 자살에 이르기도 하였다. 15세기 종교개혁가 루터 또한 우울병을 앓았다고 한다. 아이러니하게도 자기 삶의 쓸모없음을 탄식하는 메모를 남기기도 했다. <죄인 괴수에게 베푸시는 은혜>에서 읽은 존 번연의 글에서도 깊은 우울이 읽히곤 했다. 죄책감에 몸부림치면서 한 오라기의 실낱같은 죄라도 자기 영혼에 붙어있지 않기를 씨름하면서, 때론 마귀의 참소와 치열하게 싸우고 환영과 환청을 들으면서까지 괴롭힘을 당하는 에피소드 들을 읽었다. 그러나 항상 베푸시는 은혜로 다시 살아나는 경험을 반복적으로 하는 번연을 그 책에서 자세하게 읽을 수 있었다. 이처럼 그리스도인은 끊임없는 자기 내부의 진단과 조명으로 자칫 하나님의 은혜와 영광의 빛을 미처 간과하고 우울감에 빠지기 쉬운 존재이기도 한 것 같다.

그러나 우리가 성공과 성취를 타인과 비교경쟁하여 재단하는 것을 옳다 하지 않듯이, 죄 또한 타인과의 비교로 더 나쁜 죄, 덜 나쁜 죄롤 구분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절대 존전 앞에서 그 빛 앞에서 죄인 것이다. 다시 말해 위에서 아래를 보는 것이다. 만약에 우리의 본래 모습이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전제가 없다면, 죄인임을 고백하는 것은 쓸 데 없는 일일 수도 있다. 죄란 기준에 미치지 못한다는 것이며, 본래의 모습에서 떨어진 모습을 말하는 것이다.

"신체적이든 지적이든 그것이 자기 파괴적이라면 그것은 지나친 죄책감이라 할 수 있다......시민법, 교회법, 가족법 등의 목적이 각 영역을 발전시키고 파멸에 이르지 않도록 하는 것에 있듯이 개인에 대한 규율은 사람에게 해로움이 아닌 유익을 끼치기 위함인 것이다. 하나님께서 희생 제사보다 자비를 더 원하신다고 말씀하셨듯이 우리는 종교를 핑계 삼아 우리 자신이나 이웃에게 해를 끼치는 구실로 사용해서는 안된다(170p)"

빛 앞에서의 죄에 대한 통절함은 자기 파괴적이지 않다는 것이다. 하여 죄임임을 고백하는 것은 우리가 본래 하나님의 형상이었음을 기억하고 재확인하는 일이다. 본래의 모습에서 이탈한 자신의 모습을 인식했을 때, 그곳에서 빠져나와 새로운 세계로 진입하려 할 것이다. 이는 자기로부터의 자유이기도 하다.

"그들의 생각은 저의 자기에 관한 것으로 한정된다(121p)"

벡스터의 이 진단은 매우 주효하다. 그래서 그들의 관심을 자꾸 바깥 세계로 이끌어주고, 그들을 홀로 두지 않고 함께 있어주는 것은 매우 필요한 조언임이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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