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 많은 디자인 씨 - 디자인으로 세상 읽기
김은산 지음 / 양철북 / 2010년 10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우리는 살아가면서 많은 디자인들을 보게 된다. 티비든, 연필이든, 엠피쓰리이든. 대부분 디자인은 상품 속에 깃들어있는, 감초같은 존재를 한다고 생각한다. 나 역시 그랬었다. 하지만 디자인은 결코 상품에 탐을 내주게 하는 부분적인 요소가 아니라 삶과 우리 인생에 전반적으로 자극이 되고, 무언가의 메세지를 줄 수 있다는 것임을 깨달았다. 물건을 색칠하고, 어떤 모양으로 만드는가가 디자인의 다가 아니다. 때론, 진실된 디자인은 인간의 삐뚤어진 모습을 새롭게 디자인하기도 한다.

이 책은 결코 디자인 그 자체에 대해서만 주구장창 쓸데없는 설명을 늘어놓는 책이 아닌, 디자인을 통해 비쳐진 인간의 어두운 한쪽 내면을 비쳐준다. 꼭 그 내면이 악한지 선한지는 사람의 관점에 따라서 다르겠지만 '디자인' 이라는 요소를 통해 우리가 좀 더 번영하거나 잃은 진정 자신의 모습을 발견해낼 수 있다.

 

  시계, 뭔가 이상하지 않은가? 일반적인 시계라면 1부터 12까지의 숫자가 각각의 자리에 올바르게 배치되있어야 하는데, 이것은 숫자 5만 덩그러니 놓여져 있을 뿐이다. 시간과 시계를 바라보는 낡은 사고방식을 지워버리듯 칼맨은 숫자 5만을 남겨두고 다른 숫자를 모두 지웠다. 그러나 여전히 칼맨(시계만든사람)이 지운 숫자는 우리 안에서, 우리 머릿속에서 여전히 째깍째깍 소리를 내고 있다. 우리는 여전히 근대라는 시간의 영향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이다. 우리 세상 속의 시간은, 오직 시간의 효율성을 위해 바쳐진 시간이다. 근대 디자인은 이처럼 표준과 규격이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앤디 워홀이 만들어낸 동일성의 작품들, 서로 다르게 생긴 사람조차 똑같은 것처럼 만들어버리는 졸업앨범 처럼 획일화된 정체

성을 강요하는 질서는 우리 세상의 시간의 산물이다.

이제 알겠는가? 왜 그가 숫자 5만을 남겨두었는지. 그는 우리가 매어있는 시간, 그러나 그것을 넘어 설 수 있는 또다른 시간을 이야기하고 싶었던 것이다. 오직 규칙성, 규격에만 맞는 근대의 시계가 아닌 그것을 통과하므로써 얻을 수 있는 무언가의 가치를 그는 표현해내고 싶었던 것이리라. 그의 시계는 정확한 시각을 알려주는 대신 시간에 대해 성찰할 수 있는 정한 '시간'을 되돌려준다. 5시. 퇴근하는 시간 뿐 아니라 비로소 가족, 친구와 함께하는 시간, 편안한 집으로 돌아가는 시간, 경쟁과 속도의

날카로운 톱니바퀴에서 벗어나 자신만의 가치와 의미를 찾는 시간.. 어쩌면 이 시계는 그 시간을 영원히 가둬두고 싶어서 만든 것이 아닐까.

특정시간을 영원히 가둬둘 순 없지만 이 디자인을 통해서 우리는 이 시간을 비로소 희망하고, 기쁘게 기억해낼 수 있다. 디자인의 힘. 대단하지 않은가?

우리가 만들어낸 규칙성의 시간을 깨고 때론 행복했던 추억, 그리고 곧 올 '행복할' 시간에 대해서 말해주고 있으니. 이런 디자인을 통해 우리는 무기력한

삶에서 조금이나마 벗어나 다른 삶으로 향할 수 있다. 디자인은 단순히 구매욕구만 충족시키는 것이 아니다.때때로 무언가를 되새기고, 느끼게 해준다.

하하. 이 그림을 보시라. 한 사람이 라면을 먹고 있고, 젓가락에 선풍기 비슷한 것이 달려있다. 그 이름도 유명한, <라면 냉각기>. 이름에서도 알 수 있듯, 말그대로 뜨거운 라면을 냉각시켜(시원하게 만들어) 먹을 수 있게 해주는 발명품이다. 하지만 많이 불편할 것 같지 않은가? 오히려 입으로 호호 불어 먹는 편이 더 나을것 같지 않은가? 이처럼, 기능만을 강조한 근대의 디자인은 사물을 단순한 '도구' 로만 이해하여 오히려 사물의 쓰임새와 기능성을 제한한다. 이렇게 기능에만 집착한 흥미로운 것들을 '진도구' 라 부른다. 가장 흥미로운 점은 무언 줄 아나? 자신의 의도를 스스로 배반하게 된다는 점이다. 기능에 충실한 물건이지만 실은 너무 지나쳐서 쓸모가 없다. '진도구' 는 사물의 기능을 극한으로 밀어붙였을 때 결국 기능 자체가 사라질 뿐더러 사물 자체도 '무' 에 다다르게 된다는 깨달음을 준다. 사물의 가치는 결코 기능성만을 만족시키는 것이 아니며, 실용성에 지나치게 몰두할 때 그 쓸모가 없어지게 된다. 사람이 오직 '일' 만 하는 기능만을 갖추었다면 진정 사람의 도리를 갖추지 못하듯, 무언가가 계속 지나치게 된다면 디자인의 기본 역할과 도리는 넘어서는 것은 물론 그 자체로 쓸모가 없어지게 된다.

명품에 집착하는 사람들. 변기까지 프라다로? 모든 것이 명품이여야 한다! 일상을 예술처럼, 일상을 작품처럼 명품처럼! 그들은 일상보다는 예술의 삶을 추구하고, 삶의 가치와 의미를 제대로 누리고 싶다. 하지만 디자인과 예술의 역할로 만들어낸 물건들을 사용한다고 해서 삶이 저절로 예술이 될까? 정답은 No.

편안하게. 편안함과 평범함의 미덕을 알아야 한다. 아무리 삶이 명품이고 예술품이라 한듯 '자신' 을 제대로 연기하지 못하면 무슨 소용이겠는가. '나' 라는 캐릭터 자체를 예술품이 닳을까 걱정되 무대에 올리지도 못하고 삶을 마쳐버리면 어떡하나. 이 프라다 변기는 삶에 대해서 우리가 일반적으로 가지고 있는 생각을 신선하게 깨준다.

이 표지판을 자세히 보시라. 여성이 공사 작업을 하고 있고, 남자가 아이의 귀저기를 갈고 있고, 흔히 남자로 표시되던 비상구 표시가 여자로 표시된 비상구로 바뀌었다. 이 캠페인은 오스트리아 빈의 '빈은 다른 눈으로 바라본다' 라는 행사이다. 대부분 표지판에는 남성이 등장한다. 여성이 등장하는 경우는 거의 지하철 노약자석 표지, 기저기 가는 표시 뿐이다. 이렇게 고정적인 성 역할을 탈바꿈 하는 데도 디자인의 손을 빌렸다. 하지만 모든 사람들이 이 캠페인에 찬성하는 입장은 아니었다. 세금 낭비와 여자가 공사장에서 치마를 입고 작업을 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라며 반대하는 무리들도 있었다. 하지만 내 생각에는 공공 표지판을 교체하는 일은 기존의 사회적인 인식을 바꾸고 남녀 모두 똑같은 기회와 책임을 부여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어떤 특정한 역할들이 남자가 하는일/여자가 하는 일로 나누어져 있다면 우리는 여전히 극히 제한적인 일을 하며 한쪽 면만 보고 살아갈 수도 있을 것이다.

디자인은 사회,정치, 경제에 대해서 큰 영향을 끼친다.모든 디자인이 그런 힘을 행사하는 건 아니지만, 예술으로서의 역할 외에 다른 역할로 보여지는 우리가 고개 돌리고 살았던 우리의 본성에 대해 알 수 있는, 일종의 터닝포인트같은 역할을 하는 것이 바로 '디자인' 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비행운
김애란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2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톱니바퀴처럼. 불행과 행복이 맞물려 돌아간다. 누군가의 말처럼, 행복 뒤엔 불행이 불행 뒤엔 행복이 이어지는 것처럼 끊임없이 인간은 변화와 인생의 한 단락을 결코 안정적이지 않게 살아가며 나름대로 사적인 감정을 만들게 된다. 개인만의 감정이어서, 혼자만의 세계에서 구축된 거라서 아무도 이해할 수 없는 나만의 감정. 이번 김애란의 신작 소설집 <비행운>은 누구나 느껴봤을, 누구나 한번쯤 곰곰이 생각하거나 겪었을 그런 개인적인 무언가들을 '주제' 라는 작고 분명한 무대 위에 끄집어내므로써 공감하고, 누구나 그 좁은 무대에 서서 '자기 자신' 을 공연하고, 자랑스럽게 내보일 수 있도록 해준다.

그 내보임이 당사자에게 또는 관찰자에게 수치스러운 일인지는 그들의 감정에 달렸지만 이것 만은 확실하다. 은밀한 내보임이 행복을 기다리느라 지친

사람들에게 작은 안식의 앳된 한숨을 내쉬게 하는 것. 바로 비행기가 이륙하고 나서 생기는 비행운(飛行雲) 이다. 그 중 인상깊은 두 이야기를 소개하겠다.

 

<벌레들>

<벌레들> 을 영화로 만들면 아주 끔찍하고, 잔인하고 잊으려고 눈을 감아도 오히려 분명하게 그 실루엣이 나타날정도로 인간을 닮은 이야기다. '재건축'.

자신이 가지고 있는 추억을 한번 더 들으면, 지겹고 지루하듯이 '재건축' 역시 한국 국민이라면 모두 다 가지고 있는 '필수적인' 슬픈 추억이라 자칫 진부할 수 있는 소재이기도 하다. 하지만 김애란 작가는 누구나 꺼림칙해하는 벌레와 누구나 숙고해봤을 재건축 이라는 사회적 문제를 결합시켜 오도 끝도 못하는, 전혀 출구가 없는 처량한 인간의 모습을 나타내었다. 여자는, 예전에는 조상들의 자부심이었지만 땅의 금전적 가치, 물질적 가치가 '땅' 에 대한 조상들의 관념을 누른 결과물 재건축의 황량한 장소에서 아이를 낳고 만다. 징그러운 벌레들은 계속 이동하고, 그런 벌레들이 집에 나타나고..징그러운 영상이 눈에 스치는 것 같지 않은가? '외로움' . 이 감정이 오직 남과 어울리지 못해서 생긴 소외감에서 돌발되는 행동인 걸까? 외로움은 집단에 소속되지 않아서 생긴 불안감이나, 근심에서만 비롯되는 것이 아니다. 아이스하드를 다 먹어가면, 나무 막대기까지 어쩔수없이 빨게되어 입 안에 텁텁한 나무 맛이 나는 것처럼 우리도 인생을 살아가면서 본의아닌 '텁텁함' 을 느끼게 된다. 그 끝물의 아이스하드가 욕심과 황폐함의 감정이라 녹아서 자기 몸에 흐르지 않게, 우스꽝스럽게, 안쓰럽게 발버둥을 치며 그것을 빤다. 진정한 외로움이란 이것이 아닐까 싶다. 살고 싶어서, 행복하고 싶어서 외따로 발버둥을 치는 것. 그런 발버둥, 즉 시도가 우리의 가슴을, 딱딱하고 쓰라리게 만든다. 위기가 닥치면 곧바로 이동하는 벌레 무리처럼, 비가 오는 듯 조짐이 보이면 부지런히 몸을 움직이는 땅 깊은 곳의 개미들처럼 우리는 두려움을 피해가려 한다. 두려움을 경험하지 않으려 한다. 어쩌면, 이것이 '생존' 이라고 할수도 있겠다. 그 모습은 징그러워 보일수도, 혐오감이 느껴질 수도 있겠지만 어쨌든 '살기 위해' 무슨 형상을 띠어서든 곳곳으로 숨어든다. 곳곳으로 피해간다. 사회의 벼랑 끝에 선 인간의 모습은 위태로워보인다. 금방이라도 떨어질 것 같다. <벌레들> 은 벌레처럼 생존하기 위해 때론 징그러운 모습을 보여주지만 정작 벌레들 처럼 서로 같이, 때지어 이 힘든 사회구조를 올곧게 세워가지 않는다. 끊임없는 외로움의 감정으로, '살려주세요' 를 외친 후 나오는 고독감과 주위의 육중한 조용함과 무관심의 침묵으로 '고통스럽게' 살아간다. 손을 놓고, '개인주의'가 완연한 이 사회에서 무관심이 당연한 반응이 되어버렸다. 발버둥을 도와주기 보다는 구경하는 것이 일반적인 것이 되버렸다. 이 사회가 불안정한 이유는, '혼자' 여서가 아닐까. 혼자서 괴로움을 느끼고, 혼자서 무서움의 길을 달려가야 하는 것처럼. 외로움의 감옥 속에 몸을 조그맣게 오므리고 그 '무엇'을 향해 기어간다. 그 '무엇' 이 무엇인지는, 아무도 모른다. 도대체 무엇을 향해서 우리는 이렇게 힘들게 살아가고 있는 걸까.

<큐티클>

부모라는 어장 속에서 살았던 전 과는 달리, 모든 것이 자기 하는 것에 달려있고 '자신' 조차도 스스로가 통제해야 하고, 스스로가 견제하고 관리해야 하는 20대. 멋진 치장거리로 '난 이런 사람이에요' 를 뽐내며 길을 걷고 있는 누군가의 '그녀' 에 대한 이야기다. 깨끗해 보이고 싶어서, 아름답고 싶어서 수많은 고심을 한 끝에 네일샵에 가고 비싼 블라우스를 사지만 정작 사람들은 관심을 전혀 가지지 않는 모습에 낙담하는 것은 일반적인 일이다. 하지만 '일반적' 인 만큼, 우리의 치졸한 감정을 지배하고 있다. 자신의 자신감과 잘난 마음은 결코 혼자서 발원하는 것이 아닐 거다. 어쩌면, '봐주었으면' 하는 관심을 바라는 약간의 마음이 우리의 자존심과 자신감을 불러일으키는 것이 아닐까. 살아가면서 스스로에대해 자만심 또는 자신감을 가지고 있는 외향적인 사람들을 만나며 그들이 관심을 받지만 '더, 더' 라는 마음에 관심을 필요해 하는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들이 오히려 관심이 모자랄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모자라기 때문에 꾸미고, 꾸미기 때문에 '멋지다' 라는 생각이 머릿속에 입력되어 그것이 자신감으로 흐를 수 있는 길이 아닌가. 난 이 소설을 현대판 <운수 좋은 날> 로 정의하고 싶다. 메시지나 뉘앙스는 다르지만, 운수 좋은 날에 나오는 주인공처럼 이 소설에 나오는 주인공도 운이 없다. 아니, 운이 없다고 하기 보다는 무관심 속에 벼랑의 끝에 선 위태로운 '불행한' 사람이라고나 할까. 일명 힘찬 이륙(고난) 끝에 안도의 한숨을 행복하게 내쉬는 이 사회의 비행운(飛行雲) 이 되고 싶지만 정작 이륙만 있고 구름은 온데간데 없는, 오히려 비행운(非幸運) 만을 가진 사람. 꾸며서 자신감을 얻고, 관심을 받는 것이 누군가의 행복의 관점이 될 수도 있겠지만 진정한 행복이란 이런 것이 아닐까. '비행운' 같은 것. 단순히 허영이 아닌, 남의 시선 때문이 아닌, 인간의 본성 끝에서 나온 탐욕이 아닌 순수한 자기 자신만의 정체성과 자신의 '자신임'을 아름답게 뽐낼 수 있는. 그런 깨끗한 '아름다움' 이 아닐까. 마치 '큐티클' 처럼 말이다. 네일샵에서 큐티클을 긁어내면 희열에 찬 눈빛으로 하얀 그것을 바라보듯, '더해낸' 것이지만 진정 '빼야' 깨끗함을 자랑할 수 있는. 그런 것. 허영 또한 그렇다. 큐티클처럼, 살면서 우리 인생에 더해진 것이지만 그런 불필요한 것들을 빼냄으로써 욕심에 가득찬 자기 자신이 아닌, 자신의 분수에 맞는 자신의 그릇에 맞는 '자기 것처럼' 느껴지는 인생을 살 수 있을 것이다. 외부에 의해 부자연하게 꾸며진 것이 아니라 자신의 내부에 의해 방해물을 벗어내고 내적으로 빛나는 것이 자기 만족은 물론 진정으로 '꾸밈' 이 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