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행운
김애란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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톱니바퀴처럼. 불행과 행복이 맞물려 돌아간다. 누군가의 말처럼, 행복 뒤엔 불행이 불행 뒤엔 행복이 이어지는 것처럼 끊임없이 인간은 변화와 인생의 한 단락을 결코 안정적이지 않게 살아가며 나름대로 사적인 감정을 만들게 된다. 개인만의 감정이어서, 혼자만의 세계에서 구축된 거라서 아무도 이해할 수 없는 나만의 감정. 이번 김애란의 신작 소설집 <비행운>은 누구나 느껴봤을, 누구나 한번쯤 곰곰이 생각하거나 겪었을 그런 개인적인 무언가들을 '주제' 라는 작고 분명한 무대 위에 끄집어내므로써 공감하고, 누구나 그 좁은 무대에 서서 '자기 자신' 을 공연하고, 자랑스럽게 내보일 수 있도록 해준다.

그 내보임이 당사자에게 또는 관찰자에게 수치스러운 일인지는 그들의 감정에 달렸지만 이것 만은 확실하다. 은밀한 내보임이 행복을 기다리느라 지친

사람들에게 작은 안식의 앳된 한숨을 내쉬게 하는 것. 바로 비행기가 이륙하고 나서 생기는 비행운(飛行雲) 이다. 그 중 인상깊은 두 이야기를 소개하겠다.

 

<벌레들>

<벌레들> 을 영화로 만들면 아주 끔찍하고, 잔인하고 잊으려고 눈을 감아도 오히려 분명하게 그 실루엣이 나타날정도로 인간을 닮은 이야기다. '재건축'.

자신이 가지고 있는 추억을 한번 더 들으면, 지겹고 지루하듯이 '재건축' 역시 한국 국민이라면 모두 다 가지고 있는 '필수적인' 슬픈 추억이라 자칫 진부할 수 있는 소재이기도 하다. 하지만 김애란 작가는 누구나 꺼림칙해하는 벌레와 누구나 숙고해봤을 재건축 이라는 사회적 문제를 결합시켜 오도 끝도 못하는, 전혀 출구가 없는 처량한 인간의 모습을 나타내었다. 여자는, 예전에는 조상들의 자부심이었지만 땅의 금전적 가치, 물질적 가치가 '땅' 에 대한 조상들의 관념을 누른 결과물 재건축의 황량한 장소에서 아이를 낳고 만다. 징그러운 벌레들은 계속 이동하고, 그런 벌레들이 집에 나타나고..징그러운 영상이 눈에 스치는 것 같지 않은가? '외로움' . 이 감정이 오직 남과 어울리지 못해서 생긴 소외감에서 돌발되는 행동인 걸까? 외로움은 집단에 소속되지 않아서 생긴 불안감이나, 근심에서만 비롯되는 것이 아니다. 아이스하드를 다 먹어가면, 나무 막대기까지 어쩔수없이 빨게되어 입 안에 텁텁한 나무 맛이 나는 것처럼 우리도 인생을 살아가면서 본의아닌 '텁텁함' 을 느끼게 된다. 그 끝물의 아이스하드가 욕심과 황폐함의 감정이라 녹아서 자기 몸에 흐르지 않게, 우스꽝스럽게, 안쓰럽게 발버둥을 치며 그것을 빤다. 진정한 외로움이란 이것이 아닐까 싶다. 살고 싶어서, 행복하고 싶어서 외따로 발버둥을 치는 것. 그런 발버둥, 즉 시도가 우리의 가슴을, 딱딱하고 쓰라리게 만든다. 위기가 닥치면 곧바로 이동하는 벌레 무리처럼, 비가 오는 듯 조짐이 보이면 부지런히 몸을 움직이는 땅 깊은 곳의 개미들처럼 우리는 두려움을 피해가려 한다. 두려움을 경험하지 않으려 한다. 어쩌면, 이것이 '생존' 이라고 할수도 있겠다. 그 모습은 징그러워 보일수도, 혐오감이 느껴질 수도 있겠지만 어쨌든 '살기 위해' 무슨 형상을 띠어서든 곳곳으로 숨어든다. 곳곳으로 피해간다. 사회의 벼랑 끝에 선 인간의 모습은 위태로워보인다. 금방이라도 떨어질 것 같다. <벌레들> 은 벌레처럼 생존하기 위해 때론 징그러운 모습을 보여주지만 정작 벌레들 처럼 서로 같이, 때지어 이 힘든 사회구조를 올곧게 세워가지 않는다. 끊임없는 외로움의 감정으로, '살려주세요' 를 외친 후 나오는 고독감과 주위의 육중한 조용함과 무관심의 침묵으로 '고통스럽게' 살아간다. 손을 놓고, '개인주의'가 완연한 이 사회에서 무관심이 당연한 반응이 되어버렸다. 발버둥을 도와주기 보다는 구경하는 것이 일반적인 것이 되버렸다. 이 사회가 불안정한 이유는, '혼자' 여서가 아닐까. 혼자서 괴로움을 느끼고, 혼자서 무서움의 길을 달려가야 하는 것처럼. 외로움의 감옥 속에 몸을 조그맣게 오므리고 그 '무엇'을 향해 기어간다. 그 '무엇' 이 무엇인지는, 아무도 모른다. 도대체 무엇을 향해서 우리는 이렇게 힘들게 살아가고 있는 걸까.

<큐티클>

부모라는 어장 속에서 살았던 전 과는 달리, 모든 것이 자기 하는 것에 달려있고 '자신' 조차도 스스로가 통제해야 하고, 스스로가 견제하고 관리해야 하는 20대. 멋진 치장거리로 '난 이런 사람이에요' 를 뽐내며 길을 걷고 있는 누군가의 '그녀' 에 대한 이야기다. 깨끗해 보이고 싶어서, 아름답고 싶어서 수많은 고심을 한 끝에 네일샵에 가고 비싼 블라우스를 사지만 정작 사람들은 관심을 전혀 가지지 않는 모습에 낙담하는 것은 일반적인 일이다. 하지만 '일반적' 인 만큼, 우리의 치졸한 감정을 지배하고 있다. 자신의 자신감과 잘난 마음은 결코 혼자서 발원하는 것이 아닐 거다. 어쩌면, '봐주었으면' 하는 관심을 바라는 약간의 마음이 우리의 자존심과 자신감을 불러일으키는 것이 아닐까. 살아가면서 스스로에대해 자만심 또는 자신감을 가지고 있는 외향적인 사람들을 만나며 그들이 관심을 받지만 '더, 더' 라는 마음에 관심을 필요해 하는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들이 오히려 관심이 모자랄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모자라기 때문에 꾸미고, 꾸미기 때문에 '멋지다' 라는 생각이 머릿속에 입력되어 그것이 자신감으로 흐를 수 있는 길이 아닌가. 난 이 소설을 현대판 <운수 좋은 날> 로 정의하고 싶다. 메시지나 뉘앙스는 다르지만, 운수 좋은 날에 나오는 주인공처럼 이 소설에 나오는 주인공도 운이 없다. 아니, 운이 없다고 하기 보다는 무관심 속에 벼랑의 끝에 선 위태로운 '불행한' 사람이라고나 할까. 일명 힘찬 이륙(고난) 끝에 안도의 한숨을 행복하게 내쉬는 이 사회의 비행운(飛行雲) 이 되고 싶지만 정작 이륙만 있고 구름은 온데간데 없는, 오히려 비행운(非幸運) 만을 가진 사람. 꾸며서 자신감을 얻고, 관심을 받는 것이 누군가의 행복의 관점이 될 수도 있겠지만 진정한 행복이란 이런 것이 아닐까. '비행운' 같은 것. 단순히 허영이 아닌, 남의 시선 때문이 아닌, 인간의 본성 끝에서 나온 탐욕이 아닌 순수한 자기 자신만의 정체성과 자신의 '자신임'을 아름답게 뽐낼 수 있는. 그런 깨끗한 '아름다움' 이 아닐까. 마치 '큐티클' 처럼 말이다. 네일샵에서 큐티클을 긁어내면 희열에 찬 눈빛으로 하얀 그것을 바라보듯, '더해낸' 것이지만 진정 '빼야' 깨끗함을 자랑할 수 있는. 그런 것. 허영 또한 그렇다. 큐티클처럼, 살면서 우리 인생에 더해진 것이지만 그런 불필요한 것들을 빼냄으로써 욕심에 가득찬 자기 자신이 아닌, 자신의 분수에 맞는 자신의 그릇에 맞는 '자기 것처럼' 느껴지는 인생을 살 수 있을 것이다. 외부에 의해 부자연하게 꾸며진 것이 아니라 자신의 내부에 의해 방해물을 벗어내고 내적으로 빛나는 것이 자기 만족은 물론 진정으로 '꾸밈' 이 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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