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중들이 사랑해서 유행하게 되는 노래, 유행가!

그래서 한 시절을 그대로 대변하는 노래, 유행가!

여기 옛 유행가와 함께 질곡 속에서도 삶을 살아내던 우리네 그 시절을 기억해보면 어떨까요?


스타디움의 저주받은 자들


새는 날고, 물고기는 헤엄치고, 사람은 달린다.”

1952년 헬싱키 올림픽 마라톤 종목 챔피언, 그 올림픽 대회에서 마라톤뿐만 아니라 5천 미터, 1만 미터까지 무려 세 개의 장거리 종목 금메달을 모두 거머쥔 인간계를 뛰어넘은 철인, 그래서 인간 기관차라는 별명까지 얻게 된 에밀 자토펙. 그가 남긴 멋진 말이다.

러너는 가슴 가득 꿈을 안고 달려야 한다. 호주머니 가득 돈을 채운 자는 진정한 러너가 아니다.”

자토펙의 명언 시리즈는 사람들을 한껏 매료시킨다. 실제로 그는 진정한 러너가 되고자 갖은 노력을 다했다. 심폐기능을 높이기 위해 숨을 멈추고 뛰다 기절한 적도 있고, 탈장수술을 받은 뒤 2주 후에 개최된 1956년 멜버른 올림픽에서는 정상의 몸이 아닌 채로 마라톤 풀코스를 완주하며 자신이 인간계를 뛰어넘은 러너임을 다시 한번 증명하였다.

그런데 그가 달리는 모습은 정작 처연하다. 머리와 상체를 꼿꼿이 세우고 질주하는 러너들의 당당함을 그에게서는 찾아볼 수 없다. 머리와 상체가 옆으로 기울어져 있다. 얼굴은 고통스럽게 일그러져 있으며, 연상 씩씩대며 가쁜 숨을 몰아쉰다. 당당하기보다는 초라하고 가엽다. 곧 포기할 것 같다. 곧 쓰러질 것 같다. 심지어 곧 숨이 넘어갈 것 같다. 하지만 포기하지 않고 쓰러지지 않는다. 끝내.

사람들은 이러한 자토펙에 미친다. 얼굴이 잔뜩 일그러져 있기에 더 환호하며, 몸이 잔뜩 기울어져 있기에 더 열광한다. 그 고통을 엿보며 즐긴다. 겉으로는 인간 승리에 감동하는 것 같지만, 속으로는 인간 학대에 감탄하는 것 같기도 하다. 정신적 한계는 알겠고, 생물학적 한계는 어디까지지? 어쩌면 그 한계를 보고 싶어 환호하고 열광하는지도 모른다. 스포츠 세계는 일면 가학적이다.



손기정이 올림픽에서 우승하여 월계관을 쓴 건 자토펙보다 16년 앞선 1936년 베를린 올림픽. 스타디움에는 무려 12만 명의 관중이 운집했다. 어느 누가 먼저 들어올 것인가, 어느 누가 얼굴을 잔뜩 찡그릴 것인가, 어느 누가 골인점을 지나 토사물을 쏟아내며 그라운드를 나뒹굴 것인가. 12만 명 관중들의 관음.

이 스타디움은 유독 더 불온했다. 광적인 나치즘이 바랐던 건 아리아 인종이 다른 인종을 뿌리치고 스타디움으로 가장 먼저 들어오는 장면. 그래서 아리아인은 우수하다는 자신들의 인종주의적 주장이 옳다는 것을 입증하고 싶어 했다. 하지만 스타디움으로 가장 먼저 모습을 드러낸 건, 일장기를 큼직하게 가슴에 단 아시아 동맹국의 깡마른 청년.

그나마 다행이었다. 적대관계에 있던 유럽의 다른 인종이 아니어서 다행이었다. 동맹국이라 하지만 아시아의 맹주라고 자처하며 슬슬 기어오르려고 하는 일본인종이 아니어서 다행이었다. 동맹국 일본에게 침략당해 나라를 잃어버린 민족 조선, 그 조선의 깡마른 마라토너 손기정이어서 다행이었다. 12만 명 아리아인들은 손기정, 너라서 고마워라며 환호하고 열광했다.

그러나 손기정은 처연했다. 남의 나라에서 남의 나라 국기를 달고 남의 나라 이해관계로 환호 받고 열광받는 그 스타디움의 불온함과 가학성 때문에 처연했다. 새는 날고, 물고기는 헤엄치고, 나는 사람이라 달렸다. 달리는 게 좋아서 그저 달렸다. 뛰어난 인종이어서가 아니라 세계에서 고통을 가장 잘 이겨내며 달릴 수 있는 나였기에 월계관을 머리에 올릴 수 있었다.

 

반도가 낳은

마라손의 두 용사 우승 빛나는

즐거웁다 이 날이여

기쁨으로 맞이하자 그 공적 크도다

손기정과 남승룡은 찬양의 높은 소리

온 세상을 떨치누나

 

스포츠는 대리의 영역이다. 드라마도 대리의 영역이긴 마찬가지이지만, 인위적이라는 면에서 스포츠와 다르다. 스포츠는 말 그대로 각본 없는 드라마이다. 이 대리의 영역에서 관중들은 가혹하다. 자신들이 원하는 결말을 내면 한없는 찬사를 보내주지만, 그렇지 않을 경우 한없는 저주를 퍼붓는다.

또한 스포츠는 약소국이 강대국과 경쟁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영역이다. 합법적인 룰 안에서 약소국이 강대국을 처참하게 짓누를 수 있는 영역인 것이다. 그러나 역으로 약소국이 강대국에 처참하게 짓밟히는 영역이기도 하다. 짓누르지 못하고 짓밟혔을 때, 선수들은 그 대리의 경쟁을 함께 치른 관중들로부터도 짓밟힐 각오를 해야 한다.

국민의 성원에 보답 못해 죄송합니다.”

뭐가 죄송한지는 모르겠지만, 여하튼 이렇게 고개 숙인다. 스타디움의 저주받은 자들. 국가주의, 인종주의 스포츠로부터 저주받은 자들. 남의 나라 국기를 가슴에 달고 달린 처연한 손기정이었지만, 다행히 이 땅의 사람들은 그를 기쁨으로 맞이했다. 그의 공적을 크게 외쳤고, 높은 소리로 찬양했다. 시상대에서 환하게 웃지 못한 그였으나, 이러한 조선 민중의 환대에 비로소 미소 지었을 것이다. 그야말로 모든 이데올로기를 초월하여 순수한 스포츠 영역에서의 일인자의 환희를 마음껏 만끽했을 것이다.

하지만 순수 스포츠 영역에서도 여전히 처연한 한 사람이 있다. 손기정과 함께 끝까지 완주하며 3위를 기록한 남승룡. 그냥 하는 말인 줄 알았는데, 정말 역사는 승자의 기록인가보다. 그의 땀, 그의 투혼, 그의 결기가 남긴 기록은 사람들의 기억 속에 희미해져가고 있다.

오늘도 수많은 스타디움에서 수많은 관중들의 가학적인 관음 속에 수많은 스포츠가 불꽃 튀기고 있다. 짓누르지 못하면 짓밟히고 마는, 인생과 참 많이 닮은 저 스포츠가.

<<한 줄도 좋다, 옛 유행가-이 아픈 사랑의 클리셰>>는 다양한 예술이 전하는 한 줄의 의미를 마음에 새겨보는 에세이 시리즈, '한줄도좋다'의 4권입니다.


('한줄도좋다' 시리즈 출간 전 연재를 마칩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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