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싸우는 여성들의 미술사
김선지 지음 / 은행나무 / 2020년 6월
평점 :
‘아름답고 담대한 한걸음’
이 책과 책에 나온 여성 예술가들에 바치고 싶은 말이다. 사실 2015년 이후로 아직까지 이런 주제의 책이 나오지 않았다는 사실이 놀라울 따름이다. 어쩌면 당장 눈앞에 있는 일들이 버거워서 예술로 눈 돌릴 수 없던 우리네 팍팍한 현실 때문이 아닐까도 싶긴 한데 지금이라도 이렇게 나와 주었으니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올해 봄에 런던 내셔널 갤러리에서 하는 아르테미시아 젠틸레스키의 회고전에 가고 싶었는데 망할 코로나 때문에 런던이고 자시고 당장 제주도 가는 것도 힘들어지다니. 무려 아르테미시아 젠틸레스키 ‘최초’의 회고전인데!!! 피렌체 미술 아카데미 최초의 여성 회원인 젠틸레스키의 회고전조차 2020년이 되어서야 열리다니. 그동안 우린 여성 예술가들에게 얼마나 박했는가. 화풍이 비슷해 동시대 남성 화가의 작품이라고 여겨지다가 여성 화가의 작품이라고 밝혀진 후(전문 화가의 길을 개척한 풍속화의 대가, 유디트 레이스테르) 순식간에 평가 절하되어 버리는 경우가 책에서도 나온다. 서양 미술사에 관심이 많고 아르테미시아 젠틸레스키의 팬이라고 해도 좋은 나조차도 여성 예술가의 성취에 대해 참으로 무심했음을 인정할 수밖에 없겠다.
책에 등장하는 여성 예술가는 스무 명. 그중엔 생전에 이미 대단한 명성을 얻어 스페인 궁정화가로 활약한 이(운명은 만들어나가는 것, 소포니스바 앙귀솔라)도 있고 외젠 들라크루아에 필적한다는 찬사를 받으며 평생 부유한 삶을 살아온 이(오직 자기 내면의 소리를 따라, 로자 보뇌르)도 있고 피렌체 미술 아카데미 최초의 여성 회원으로 혼자 작업장을 성공적으로 꾸려낸 젠틸레스키 같은 이도 있다. 하지만 정말 하나같이 모두, 어쩜 그럴 수가 있을까 싶을 정도로 사후엔 잊힌 사람이 되고 만다. 문서로 남은 기록은 전무하다시피 하고 그들의 작품은 동시대 남성 예술가의 작품으로 둔갑하며 성취를 제대로 인정받지 못했다. 아마 저자는 이 책을 쓰기 위해 엄청나게 조사를 했을 텐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정도의 정보밖에 얻지 못했다는 사실에 좌절했을 수도 있겠다. 하지만 그렇기 때문이 이 책이 더욱 의미 있는 한권이라고 생각한다. 덕분에 잊힌 여성 예술가의 이야기가 이렇게 어엿한 기록으로 남게 되었으니. 그것이 단 한줄, 이름뿐일지라도 참 다행이다. ‘싸우는 여성들의 미술사’가 마중물이 되어 많은 이들이 잊힌 여성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게 되길 바라본다.
책 속 문장들
현재 전 세계 미술관 및 갤러리에서 남성 미술가 대 여성 미술가 전시회 비율은 70:30이라고 한다. 지금도 이런데, 하물며 여성의 사회 활동이 극도로 제한받은 가부장 시대에 여성이 예술가로 산다는 것은 얼마나 힘든 일이었는지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 사실 여성 미술가들의 작품을 소홀히 하고 전시에서 누락시킨 미술관 역시 차별의 미술사를 만든 암묵의 협조자였다. p.13
화가가 자화상을 그릴 때는 자신이 사람들에게 어떻게 보이기를 원하는지가 그림에 드러나기 마련이다. 자신만만한 표정과 여유로운 자세, 레이스테르의 자화상에는 성공한 화가로서의 자부심과 당당함이 녹아 있다. p.57
프란스 할스의 작품 중 수작으로 평가되던 <즐거운 커플>은 19세기 말 네덜란드 미술사학자 코르넬리스 호프스테드 데 그루트에 의해 결국 레이스테르의 작품으로 판명되었다. 그런데 그토록 극찬하던 이 작품이 할스가 아닌 한 무명 여성의 그림으로 밝혀지자 미술사가들은 그림에 대한 평가를 완전히 뒤집었다. 그만큼 미술계에는 성차별이 만연했다. p.60
어머니와 아이를 그린 작품들은 마치 마돈나와 아기 예수를 그린 종교화의 구도를 연상시키는데, 이것은 카사트가 육아를 여자라면 누구나 쉽게 해내는 그림자 노동으로 보지 않고 고귀하고 가치 있는 일로 생각했음을 드러낸다. 남자의 사회생활만큼 존중받아야 할 일 말이다. p.99
장인의 바람대로 자피는 가정적이었고 열한 명의 아이를 양육하는 데 헌신적이었다. 덕분에 폰타나는 계속 그림을 그리며 가족의 생계를 책임졌다. 엄격한 가부장제 사회였던 약 500여 년 전, 이 부부는 아내와 남편의 성 역할이 완전히 뒤바뀐 삶을 살았던 것이다. p.122
“나는 여자가 무엇을 할 수 있는지 보여줄 것입니다. 당신은 한 여자의 영혼에서 시저의 정신을 발견할 것입니다.” 아르테미시아 젠틸레스키 p.1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