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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를 구할 여자들 - 유쾌한 페미니스트의 과학기술사 뒤집어 보기
카트리네 마르살 지음, 김하현 옮김 / 부키 / 2022년 9월
평점 :
이 책의 제목이 지구를 구한 여자들이 아니라 지구를 구할 여자들이라는 점은 매우 의미심장하다.
나는 제목을 눈여겨보지 않은 채로 이 책이 지나간 과거의 어느 순간에 과학기술발달의 한 걸음을 보탠 위대한(동시에 역사에는 남지 못했거나 남았더라도 부당한 대우를 받았던) 여자들에 대한 이야기이리라 예상했다. 물론 이 책은 일부 그러한 여자들의 이야기도 소개하고 있지만, 전반적으로 보다 큰 범주의 여자들에 관해 다루고 있다. 과거에 대한(지구를 구한) 이야기가 아니라 과거로부터 미래까지를 관통하는(지구를 구할) 이야기를 통해서 말이다.
『지구를 구할 여자들』은 발명/기술/여성성/신체/미래 다섯 챕터에 각각 2장씩 분배하여 총 10장으로 구성되었다. 죽 이어지는 연대기식 구성은 아니고 각각의 챕터 속 작은 장마다 개별적인 주제를 다루었지만, 20세기 초에서 출발해 뒤로 갈수록 21세기, 바로 지금의 관심사로 옮겨오는 경향을 보인다. 각 장의 내용은 여행 캐리어의 발명이나 이미 존재했다가 사라져 버린 전기차 이야기부터 SNS 인플루언서와 AI, 기후 변화 이야기까지 다양하다.
흥미롭고 감동적인 것은 여러 시대, 여러 사건을 다룬 이 책을 하나로 꿰어 내는 뚜렷한 문제의식이 존재한다는 점이다. 바로 ‘여성적이어서’ 당연하게도 가치 폄하되어 왔던 것들이 실은 그렇지가 않다는 것이다.
기술의 선택, 발달, 혁신은 항상 가장 최선의 방향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때 세상을 지배하고 있는 논리에 부합하는 범위 내에서 이루어져왔다. 이 책에서는 당시의 사회에 존재하던 고정관념과 부딪쳤을 때 패배하는 쪽이 기술이었던 사례, 강력한 필요에 의해 기술이 채택되었으나 필요만큼이나 강력한 반발로 애를 먹었던 사례를 제시하면서 오늘날 인류의 ‘신화’인 과학기술사가 우리의 생각만큼 매끄러운 일필휘지가 아님을 보여 준다.
그런 가운데, 특히 젠더 관념이 가로막은 기술의 ‘가지 못한 길’에 대한 서술이 인상 깊다. 무수한 기술을 만들고 다듬고 활용하면서 쌓아 온 인류사가 놓치거나 외면한 또 다른 가능성에 대해, 저자는 반복적으로 질문을 던진다.
예컨대 이런 것이다. 도구의 역사가 수렵을 위한-남자가 휘두르는- 창이 아니라 채집을 위한-여자가 쥔- 뒤지개로부터 시작되었다면? 또는, 여성적인 것 취급을 당하면서 사라져버렸던 전기차와 전기차가 다니는 시내에 대한 구상이 살아남아 현실화되었다면? 등등. 가부장제의 논리로 완벽하고도 완고하게 구분지어진 여성적인 것이 선택되었다면 지금의 우리는 어떤 모습이었을까. 물론 이 질문에 정답을 단언할 수는 없겠지만 몇 가지는 분명하다. 우선, 지금의 세상은 남성(그중에서도 1세계 백인 남성)의, 남성을 위한, 남성에 의한 선택으로 이루어진 결과물이라는 것.
또한 그렇듯 편파적인 룰 아래 타자화되어 살아야 했던 여성들에게 있어, 세상은 공정하지 않았다는 것. 역사의 기록에서나 기술의 발전에서나, 가치가 개입하는 모든 흐름에서 여성은 주로 낮춰지거나 지워져 왔다는 것.
그리고 그것은 결국 인류사 전체의 손실이라는 것도.
남성에 대비되는 존재로서 여성에 대한 왜곡은 끝도 없다. 타고난 능력이 뒤떨어지는 존재, 집 안에 있어야만 하는 존재, 무엇이든 잘 하면 그것은 타고난 것이므로 높게 쳐 줄 까닭이 없는 존재, 반대로 잘 못하면 그것은 집단 전체의 공통적인 부족함이므로 중요한 일을 맡길 수 없는 존재, 따라서 높은 임금을 주지 않아도 되는 존재.
『지구를 구할 여자들』은 이러한 인식이 과학기술사에도 강력한 영향을 끼쳤음을 구체적으로 지적한다. 그리고 이른바 남성적인 가치를 추구하는 방향으로 발달해 온 과학기술이 지금 직면한 문제에 이르러, 도저히 없을 것 같은 해결책은 의외로(어쨌거나, 누군가에게는) 여성적인 가치에서 발견될 수 있다고 말한다. 결국 여성과 여성적인 것을 무시해 왔던 기존 패러다임으로부터의 전환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어떤 대결의 문제가 아니라, 바로 지금 함께 살아남아 공존하기 위해서.
가볍게 읽기 시작했는데 생각할 거리가 많았고, 각 장이 모두 흥미진진했다. 저자가 페미니즘이라는 분명한 렌즈를 단단히 들고 과학기술사를 들여다본 덕분인 것 같다. 이 포스팅을 하기 전, 책을 다 읽기도 전부터 주변에 좋은 책이 나왔다고 추천하는 중이다.
그중에서 특히 기후 위기 논쟁을 언급하고 나아갈 길을 전망하는 마지막 10장의 경우, 바로 지금 피부에 와 닿는 문제인 만큼 유독 관심이 갔다. 도나 해러웨이 『트러블과 함께하기』와 같이 읽으면 더욱 생각할 거리가 많을 듯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