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닉 - 숨기려 해도 숨길 수 없는 마음
배명훈 지음 / 북하우스 / 201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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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은닉]은 [타워], [신의 궤도]에 이은 배명훈 작가의 세번째 장편소설이다. 장르를 말하자면 첩보 스릴러 SF라고 할 수도 있겠다. 물론 단순하게 장르로 규정할 수 없는 "배명훈"만의 소설이지만. 이전 작품들과 비교하자면 한결 어둡고 차갑고 묵직한 느낌이다. 단편에서 곧잘 나왔던 재기발랄한 위트나 풍자는 없다. 특유의 독특하고 거침없는 상상력은 여전하지만, 서사는 내내 진중하다. 


 주인공은 연방(아마도 통일 한국) 소속의 킬러로 사랑하는 여인 은경이가 조직의 목표가 되었음을 알고 그녀를 구하기 위해 움직이게 된다. 숙청된 권력자 장무권의 전략무기개발 네트워크, 그를 장악하려는 연방 조직, 주인공의 친구인 천재 정보분석관 조은수 등이 서로 얽히는 싸움 가운데, 전략무기개발 네트워크에서 개발하던 무기가 무엇인지 마침내 드러난다... 


(아래 내용에는 스포일러가 될 수 있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보통의 첩보 스릴러 소설과 다른 점은, 우선 주인공의 내면과 인간관계에 이야기의 중심이 쏠려 있다는 점이다. 주인공은 끊임없이 고뇌에 부딪친다. 킬러 일을 앞으로 계속 해갈 수 있을지 없을지, 은경이가 표적이 되었다면 어떻게 해야할 지, 조은수를 신뢰할 수 있는지 등등... 그리고 주인공과 김은경, 조은수 세 사람 간의 묘한 삼각관계도 이야기를 끌어가는 또 하나의 축이 되고 있다. 액션과 병기 묘사에 치중하는 남성적인 액션 스릴러와는 대비되는 점이다. 


  한편, [은닉]은 하드 SF에 비해 다소 관념적, 추상적인 개념의 과학기술이 등장한다. 디코이 같은 경우 굉장히 신선한 개념이었지만, 디코이를 조종했다거나 하는 면에서 단순히 전자 기록을 남기는 가상 프로그램이 아니라 개인의 총체적 아바타 같은 것인지 헷갈리기도 했다. 작품 후반에 등장하는 "악마" 등은 더욱 그러하다. 감시장치와 정보기기 네트워크에서 창발한 AI 같은 존재인 듯 싶다가도 그보다 훨씬 오래 전부터 존재해왔었다는 식의 서술도 등장한다. 이런 추상적인 관념과의 연결은 문학적인 요소로 이해해야 할까 싶기도 하다 (다시 읽어보면 좀더 명쾌하게 이해할 수 있을지...). 눈에 보이는 유형의 물리적 기반, 기술에 입각한 하드 SF 취향의 팬이라면, 좀 불만스러울 수 있는 부분이다.


  다른 점으로 배명훈 작가의 전쟁서사 취향(?)이 곳곳에 묻어나와 즐거웠다. 작품 중에 등장하는 깃발을 드는 기수 이야기나 '악마'의 존재는 예전에 웹진 거울에 게재된 배명훈의 단편 [마탄강의 유역]과도 맞닿는 면이 있다 (현재는 아쉽게도 본문이 비공개된 듯). 개인적으로는 앞으로도 좀더 대놓고 전쟁과 인간 이야기를 묵직하게 풀어내주었으면 좋겠다 싶기도 하다.


  

  총평하자면 [신의 궤도]보다 한결 밀도 높게 완성된 장편소설이라고 생각한다. [신의 궤도]는 단편의 틀을 벗어나기 위해 이야기를 크게 늘리고 벌이면서 다소 산만하거나 인과관계가 느슨해진 것처럼 느껴진 반면, [은닉]은 훨씬 그런 부담을 털어낸 것처럼 매끄러워 보인다. [신의 궤도]가 너무 지루하거나 부담스럽게 느껴졌던 분들이라도, "취향"이 맞다면 즐겨볼만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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